SCENE백합의 관
백합이라는 주제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 백합이 가득 차 있는 관에 누워있는 유키 화이트의 이미지를 떠올림. 생각해보면 백설공주 모티브 같기도 하다. 흰 꽃이 가득 차 있는 유리 관에 누워 있는 하얗고 창백한 소녀의 이미지. 백합의 향이 너무 강한 나머지 소녀의 향이라거나, 숨결이라거나 하는 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리고 꿈에서 빌이 그 이미지를 봤으면 좋겠다. 하얀 머리칼을 풀어헤친 채 백합이 가득한 관에 누워 있고, 작은 요정들이 그의 죽음을 슬퍼하듯이 울며 관을 옮기고 있는 장면을. 꿈속의 빌은 문득 깨달아. 자신이 이 아이의 죽음을 사주했다고. 그 아름다움, 그 빛남, 그 선함을 질투해 유키 화이트에게 독사과를 먹이고 말았다는 것을.
그러나 곧 빌은 이상함을 느끼겠지. 그야, 당연히 유키는 아름답지만. 아름다운 외견에 어울리는 정신을 가진 사람이지만. ‘빌 셴하이트’ 자신이 그런 일을 저지를 리 없으니까. 당연하잖아. 그는 유키를 질투하지 않아. 그보다는……
그렇지만 요정이 울어. 삶의 증명인 숨은 느껴지지 않고, 투명한 유리를 녹여 만든 관 안에 유키 화이트는 갇혀 있어. 꿈 속 세계가 속삭여. ‘너’는 할 수 없다고. ‘너’는 악역이니까. 이 꿈 속에서 빌 셴하이트는 유키 화이트를 질투하여 결국 독살해버린 악역이니까. 그것은 반박할 필요 없는 진실이고, 그게 이 ‘세계’의 법칙이니까.
…….
그러나, 누가 그런 법칙을 정했지?
빌은 울고 있는 작은 요정들을 헤치고 걸어가, 두어 걸음 만에 관 앞에 도달하고, 유리관의 뚜껑을 열어. 그리고 누군가에게 들려주려는 듯 작게 속삭이지.
“백합으로 가득 찬 방 안에 있으면 질식한다는 말이 있지.”
특유의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유키의 이마에 키스하고, 항의하는 작은 요정들을 향해 말해.
“혹시, 이 아이를 가둬 죽이려는 것은 너희가 아니니?”
빛의 요정들이 순간 조용해지고, 그럴 리 없다며. 우리는 그러려고 한 것이 아니라며 요정 중 하나가 외쳐. 순식간에 혼란스러워진 공간. 아우성치는 요정들을 무시하고, 빌이 다시금 말해.
“사랑으로 한 사람을 구원한다니. 그런 간지러운 일은 영화나 드라마 속에만 있는 것.”
이번엔 세계가 아우성쳐. 사랑은 모든 것을 구한다고. 악역 따위가 뭘 아냐고. 그렇게 태어나버린 남자가 세계의 법칙을 알기나 하냐고. 그 모든 걸 무시하고 빌이 선언해.
“그렇지만 굳이 사랑이 아니더라도 사람은 구할 수 있어. 그리고, 지금 여기서 유키를 구할 수 있는 건 역시 미디어 속에 ‘들어갈’ 수 있는 ‘배우’인 나밖에 없지.”
그렇게 그 창백한 입술에 입맞추고 유키가 천천히 눈을 뜨면.
“그게 ‘가짜’ 공주를 구하기 위해 ‘빌 셴하이트’를 불러들인 이유잖아. 그렇지 않니?”
귀에 속삭이는 빌. 그 말을 들은 꿈속 유키가 웃어. 암. 그렇죠. 가짜인 나를 구할 수 있는 건, 같은 가짜가 되어줄 수 있는 당신밖에 없죠. 그렇게 말하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