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롤로유키] 뜻밖의 만남
“이것으로 홈룸을 마친다. 그리고 화이트?”
“네.”
“학원장이 고물 기숙사에 공지사항이 있다니 방과 후 학원장실에 방문하도록.”
“네? 네에…….”
유키 화이트는 크루웰 선생의 말에 말꼬리를 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학원장이 할 말이 있다니, 유키로서는 또 귀찮은 일을 떠맡게 될 것이라는 예감이 든 탓이다. 학교에 입학하고도 1년 가까이 지났는데, 학원장은 여전히 유키와 그림을 학교의 잡다한 일들을 처리할 잡일꾼 정도로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그러지 않아도 중간고사 때문에 바쁜데, 또 무슨 일을 시킬 생각인지. 생각만 해도 한숨이 나왔다.
“또 호출이냐~ 학원장, 맨날 너네만 부려먹는 거 아냐?”
“다른 기숙사에는 맡길 수 없는 일이겠지. 미안, 유키. 못 도와줘서.”
“뭐어…… 위험한 일만 아니면 좋겠는데 말이야.”
유키와 절친한 하츠라뷸의 두 사람은 오늘 하츠라뷸의 티파티를 준비해야 한다며 심심한 사과를 남기고 떠났다. 학원장실에 가기 싫은 탓에 괜히 기숙사에 가져갈 참고서를 뒤적거리며 유키가 늑장을 부렸다. 그림이 유키의 책상 위로 올라와 삐죽거렸다.
“학원장 녀석, 또 무슨 생각인 거냐구.”
“그러니까. 곧 시험도 있는데……. 또 힘든 일 시키면 그 자리에서 울어버릴래.”
“운다고 들어주겠냐고…….”
“들어주지 않을까? 안 들어주면 번갈아가면서 울자.”
농담하며 유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쁘다는 티를 내려 에코백에 참고서를 잔뜩 챙긴 채였다.
“별 일 아니면 좋겠는데 말이야…….”
“학원장실에 나타난 벌레 잡기라도 시키려는 거 아니냐구.”
“그럼 그림한테 부탁해야지.”
“에에~ 유키가 하라구! 나도 벌레는 싫다구!”
실없는 대화를 하며 계단을 오르자 학원장실은 금방이었다. 유키가 학원장실의 문을 노크했다. “들어오십시오.” 하는, 학원장의 무게 잡는 목소리가 문 안 쪽에서 들렸다.
문을 열자, 다시는 만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사람이 서 있었다.
“……에?”
유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바보 같은 목소리였다. 상대도 제법 놀란 듯했다. 두 사람의 의문에 찬 시선이 학원장에게 박혔다. 눈치 없는 그림만이 반갑게 외쳤다.
“롤로잖아!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는 무슨 일이냐구!”
“……하?”
“잘 왔습니다, 유키 화이트 군, 그림 군. 이 쪽은 롤로 플람 군. 소개는 생략해도 되겠지요?”
“그건 괜찮은데, 노블 벨 칼리지의 학생회장 분이 여기는 왜 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이른바 교환학생이라는 거다.”
“아, 그렇군요……. 예?!”
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학원장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교환학생으로 온 롤로와 다른 기숙사장이 아닌, 고물 기숙사의 감독생을 부른 학원장. 학원장이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이 간 탓이다. 학원장이 예의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말했다.
“화이트 군은 눈치챈 것 같군요~? 예. 맞습니다. 플람 군을, 교환학생 기간 동안 고물 기숙사에서 맡아주셨으면 해서요.”
*
학원장과의 대화 이후 고물 기숙사로 향하던 중, 자연스럽게 롤로의 짐을 들어주려던 유키를 롤로가 저지했다.
“내 짐은 내가 들지.”
“앗, 네…….”
유키가 머쓱하게 내밀었던 손을 거두고 물러났다. 롤로가 유키를 흘긋 쳐다보고선 말했다.
“마담 화이트, 자네가 근력에 얼마나 자신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마담에게 도움을 받을 만큼 근력이 약하진 않아.”
“네. ……무시하려고 한 건 아니었어요.”
“알아. 나도 달리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건 아니다. 단지…….”
그는 말을 줄였다. 다른 학교에 온 첫날부터 그런 말을 할 필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키가 ‘단지’ 뒤의 말을 궁금해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자 여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학원 학생들의 인격이 궁금해졌을 뿐이다. 여자아이에게 제 짐을 들게 하는 무뢰한밖에 없는 모양이군.”
“아하하, 그러진 않아요. 다들 제 짐은 제가 드는데…… 롤로 씨는 손님이니까, 제가 기사도를 발휘한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마담에게 기사도를 발휘하게 하는 것이…… 아니, 됐어. 이 이상은 무의미할 것 같군.”
롤로가 한숨을 푹 쉬었다. 유키가 롤로를 돌아보며 삐죽였다.
“그나저나 학원장도 참 너무해요.”
“무엇이?”
“기껏 학생회장님이 이쪽으로 교환학생 왔는데, 이름도 ‘고물 기숙사’인 곳에 배정하다니요.”
“고물 기숙사라는 이름은 좀 그렇긴 하다구. 그러니까 ‘슈퍼 울트라 고저스 기숙사’라고 하자니까.”
“‘슈퍼 울트라 고저스 기숙사’라는 이름은 촌스럽잖아. 울림이 안 예뻐.”
“유키가 제안한 기숙사 이름도 구리긴 마찬가지였다구.”
“뭐어?!”
롤로가 앞서 걸어가는 그림과 유키가 티격태격하는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저 작은 여자아이는 제가 자신 때문에 이 먼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까지 교환학생을 오겠다고 한 것을 알까. 유키라고 불리는 소녀는 그날 밤 그런 의미심장한 말을 뱉었다는 사실이 없었던 것처럼 자신의 파트너 마수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롤로는 둘의 입씨름이 말싸움으로 격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 대화에 끼어들었다.
“단순 교환학생에게 학원의 마법 도구를 사용할 수 있게 허락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에? 불만이 없으세요?”
유키가 뒤돌아보았다. 동그랗고 큰 눈이 놀람을 가득 담고 롤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터무니없는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군. 그리 생각한 롤로는 고개를 내저어 보였다.
“그 부분에 대한 불만은 없으나, 여학생과 같은 기숙사를 쓰게 하는 학원장의 무심함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군.”
“아…… 그 부분 말이죠.”
유키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성과 함께 기숙사를 쓰는 일은 불편하기 마련이다. 안전에 대한 문제도 있고,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는 기본적으로 남고라 개인 세면실이 없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성과 같은 기숙사를 쓰는 건 불편하죠. 개인 세면실도 없구. 아마 롤로 씨와는 다른 층을 쓰게 될 테지만…… 신경쓰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나는 안전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다만.”
“아. 그 부분이요…….”
유키는 걸어가며 롤로를 돌아보았다. 앞을 보지 않고 걷는 것이 다치기 딱 좋다. 사람을 너무 믿는 건지, 안전불감증이라도 있는 건지 궁금했는데 아무래도 후자인 것 같았다. 유키가 어깨를 으쓱거려 보였다.
“뭐, 위험한 사람이라면 애초 다른 기숙사에 배치했겠죠. ‘그럴’ 생각으로 오신 건 아니잖아요?”
“내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건 어떻게 확신하지?”
“글쎄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런 말씀을 하시는 분이 저에게 위해를 가하실 것 같진 않은데요.”
“허…… 제법 세상을 모르는 말을 하는군.”
“그리고, 그림과 저는 항상 함께니까요. 불에 구워지고 싶진 않으시겠죠?”
그림의 귀에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을 바라보며 유키가 킥킥 웃었다. 롤로가 깊게 한숨을 쉬었다.
경각심이라는 것을 배우지 못한 어린아이 같군. 꼭 그 아이처럼…….
‘형이 날 해칠 리가 없잖아!’
그 아이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떠올리며 롤로는 이를 악물었다. 그 아이. 마법에 대해 경각심 없이 굴다 불타버리고 만 사랑스러웠던 어린 아이. 한 순간의 실수로 그 아이는 명을 달리했고, 아마 이 여자도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롤로는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말레우스 드라코니아와 친하게 지내는 것도 경각심이 없어서인가.”
“경각심이 없다니요. 저는 세상 모든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인데요.”
“……부하. 혹시 나도냐구…….”
그림의 말에 유키가 ‘실수했다’ 하는 표정으로 급히 변명을 쏟아냈다.
“아니! 그림이 무서울 리가! ……그렇지만 그림의 발톱은 무서울지도? 너, 곧 발톱 깎아야 할 때 되지 않았어?”
“발톱 깎기 싫다구!”
“너 그러다가 내 팔에 흉터 만들어 놓으려고 그러지! 오늘 들어가자마자 발톱 깎자. 선물받은 로즈마리향 펫샴푸로 씻고.”
“아직 씻을 때 안 됐다구! 괜찮은데 왜 씻어야 하냐구!”
“무슨 소리야? 네 몸에서 고등어 냄새 나는데. 오늘 들어가자마자 발톱 깎고 씻는 거야. 알겠지?”
“싫다구!”
그림이 비명을 질렀다. 뒤따라가던 롤로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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