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빈소희] 음악실의 유령
2024-02-04
2인


음악실의 유령
W. 서라
KP 3:33
PL 화
KPC 김래빈
PC 차소희
*
첫째날 아침
삐이이이익.
코드를 꽂아두었던 유리 티포트의 주둥이에서 수증기 빠지는 소리가 납니다.
오전 댓바람부터 틀어두었던 뉴스의 주제가 전환된 것은 그 때였습니다.
당신은 티포트의 코드를 뽑으며, 혹은 이른 아침을 해결하기 위해 식탁에 앉은 채 TV속 아나운서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차소희:(어쩐 일로 눈이 일찍 떠졌다. 이르게 일어난 김에 아침을 먹으러 방에서 나왔다. 이 시간에 TV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티포트의 코드를 뽑으며 냉장고의 빵을 토스터에 넣는다. 인스턴트 아메리카노... 마지막으로 어디에 뒀더라. 서랍을 열며 스틱을 찾는다.)
토스터의 빵이 튀어오르고, 당신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실 즈음 TV에 시선이 닿습니다.
한 달 전부터 기승을 부리기 시작한 정체불명의 전염성 질병에 대한 속보를 따로 다루기 위해 금주중 신설 편성된 채널이네요.
아나운서의 표정은 짐짓 심각합니다.
편성된 채널의 인트로격인 멘트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고, 본격적인 보도가 시작됩니다.
그러고보니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것 같은데…. 문득 TV의 볼륨을 낮춰두었던 것이 떠오릅니다.
차소희:(괜히 신경쓰여 TV 볼륨을 높이려 한다. 리모콘은 어디다가 던져놨지? 내 자취방인데 내가 엄마보다 더 모르는 것 같다.)
차소희, 관찰 판정.
차소희: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50
판정결과: Regular
식탁 아래,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리모콘을 발견합니다.
차소희:(리모콘으로 TV 소리를 높인다. 어제 TV를 끄지 않고 작업하러 들어갔던가, 왜 TV가 켜져있는지 모르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세상 돌아가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다. 과학 공부도 그닥 하지 않아 단백질 껍질이니, 유전체니 하는 말은 알아듣지도 못한다. 전염병의 정의에 대해서도 관심이 없고. 그렇지만 감염 경로를 모르는 병이라는 건, 위험해 보이긴 하네. 뭘 조심해야 하는지도 모르니까.)
정형화된 톤의 아나운서 멘트가 마무리 되면 화면이 뒤바뀌며 블러처리된 대형 병원들의 외관이 연이어 흘러나옵니다.
이번 전염병에 감염되면 체중이 급격히 감소하고 피부가 트는 등 사람에 따라 각종 면역력 결핍 증상을 보이지만, 대표적인 증상은 서서히 고열에 시달리기 시작하다 깊은 잠에 빠져드는 것이라는 기자의 설명이 이어집니다.
차소희, 지능 판정.
차소희: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73
판정결과: 실패
전세계를 강타한 이번 유행성 전염병의 병명이 아직까지 공식 발표되지 않았음을 떠올립니다.
그나마 공통적인 증세라고는 고열을 앓게된다는 점 말고는 밝혀지지 않았다니까요.
항간에서는 유행성 독감이라고도 부르는 것 같던데…. 참 기묘한 병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차소희:(유행성 독감이라. 뭐, 그럴 수도 있겠지. 별로 관심이 없다. 뉴스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토스트에 버터나 바른다.)
간단한 아침식사를 마친 당신은 집을 나섭니다.
신발끈을 묶고 거울을 확인하면 가슴팍에 간신히 달려 있는 교복 명찰에 눈이 갑니다.
곧 떨어질 것처럼 덜렁거리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차소희:하아…… (곧 떨어질 것 같은 명찰을 쳐다보며 한숨 쉬며 집 밖으로 나선다. 명찰 여분 같은 것, 어차피 이 집에는 없다. 교복을 가져다 둔 게 다행일 정도니까. 교복 없이 밤샘 작업하다 지각을 한 게 한두번이 아니다. 본가에 들렀다 갈까.) 귀찮은데…….
늑장을 부린 탓인지 지각이 코 앞입니다.
명찰은 그냥 두면 곧 떨어져버릴 것 같고, 그냥 뜯어서 넣어두는 게 차라리 안전할 것 같습니다.
차소희:(하루이틀 그러는 게 아니라 지각하는 게 별로 두렵진 않은데……. 명찰을 뜯어 주머니 속에 쑤셔넣는다. 교복 입고 가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하세요. 그런 생각을 하며.)
학교에는 꼬박꼬박 나가니 이정도면 모범적인 듯 합니다.
차소희:(역시 그렇죠? 레슨이니, 뭐니 하며 매번 학교를 빠지는 다른 애들보다는 낫지. 제대로 학교 나가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 솔직히.)
모범적으로 시간 내에 등교하려는 아침, 당신은 학교로 향할 때 무엇을 이용하나요?
차소희:(버스를 탑니다. 작업실과 학교는 생각보다 멀어서요. 학교 근처에 학교 이름을 단 정거장이 있고, 그곳에서 내려 조금 걸어야 해요.)
버스를 타면, 라디오에서 고즈넉한 클래식 곡이 연주되어 흘러나옵니다.
차소희, 정신력 판정.
차소희: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37
판정결과: Regular
맑은 하늘에 가벼운 공기. 여유로운 아침을 만끽하며 잠시나마 붕 떠있던 기분이 노골적으로 가라앉습니다.
왜일까요? 피아노를 그만둔 뒤로 건반에 더 손을 댄 적은 없어도 곡을 듣는 것까지 거북했던 적은 없는데….
차소희, 이성 판정.
차소희:
SAN Roll
기준치: 60/30/12
굴림: 2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 감소 없음.
이미 한 번 음악에 대한 의지를 저버린 탓인지 청각과 마음이 전같지 않습니다.
방금 느꼈던 메스꺼움도 그만둬버린 음악에 대한 내면의 적개심일까요. 아니면 미련일까요.
차소희:(기분 나빠……. 아침에 먹은 커피가 잘못된 건가? 커피를 좀 줄여야 하긴 한다. 가슴이 이상하게 두근거린다. 몸의 반응은 확실히 이상하지만, 그렇다고 피아노에 대한 적개심이나 미련이 남아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재미없고 지루할 뿐이니까. 피아노도, 바흐와 쇼팽도. 방금 전에 나온 비발디도 그렇다. 그냥 지겨울 뿐. 피아노 소리도, 학교 가는 것도, 이런 익숙한 모든 것들이. 그냥 그런 거다. 그러니까, 나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생각을 멈춘다. 나오는 음악은 며칠 전 사운드클라우드에 올라온 EDM. 아. 이것도 지겨워지려고 해.)
넓지도 좁지도 않은 시멘트 길의 인도를 따라, 같은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삼삼오오 무리지어 등교하는 모습이 보입니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씁쓸한 입맛을 돋굽니다. 여름이니까요.
차소희:더워……. (그리고 더운 건 싫다. 싫었던 게 좋아진 적은 없지만 좋았던 건 언젠가는 싫어지게 된다. 늘 그랬다. 아니꼬운 눈빛으로 새파란 하늘을 쳐다보며 걷는다.)
정문 통과는 여유롭게 세이프.
당신은 3학년 A반이죠. 교실 뒷문을 열고 들어서면 조례 직전 출석이 막 진행되려던 참입니다.
C반 선생님: 빨리빨리 앉아라.
C반 선생님의 불같은 호령이… 잠깐만, C반 선생님이요?
여긴 A반인데요?
그러고보니 자리 배치도 어제와 묘하게 다른 것 같은 기분이?
당신이 허둥대고 있으면 선생님은 도끼눈을 뜹니다.
분필이 날아오기 전에 얼른 비어있는 자리에 앉는 것이 이롭습니다.
차소희:(비어있는 자리 아무데나 앉았다. 전염병인지 뭔지 하는 그거, 담임도 걸린 건가? 피아노과 단톡에는 아무 말도 없었는데.)
차소희, 관찰 판정.
차소희: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급한대로 빈 책상에 앉아 책가방을 내려둔 뒤 교실을 쭉 둘러봅니다.
당신은 한달전부터 시작된 유행성 질병으로 인해 텅텅 비어있던 열댓 개의 책걸상이 모르는 아이들의 머리통으로 빼곡히 들어차 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어 있었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아이들은 분명 본 적 없거나… 아니면 복도에서 한 번쯤 보았던 얼굴입니다.
역시 반을 잘못 들어온걸까요?
눈을 비비고 다시 살펴도 교탁 앞에 서있는 저 사람은 평소에 벌점을 남용하기로 유명한 그 C반의 담임 선생님이 맞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A반 아이들의 모습 또한 가득 찬 교실 속 틈바구니에 끼어 있군요. 이게 무슨 일이지….
차소희:(요새 잠이 부족하다 싶었는데, 꿈꾸나? 볼을 몰래 꼬집어 본다. 아픈 걸 보니까 꿈은 아닌데. 하아, 정신이 진짜 나갔나 보다. 부모님한테 말씀 드려서 정신과라도…….)
다시금 교탁으로 눈을 돌리면 출석체크 진행이 한창입니다.
앞자리나 옆자리에 앉은 친구를 살피거든 A반 학생, 당신의 반 친구가 맞습니다.
아무래도 C반 아이들과 한데 섞여 있는 모양인데, 어떡할까요?
차소희:(그냥 제 손이나 쳐다보며 가만히 앉아 있는다. 피아노 칠 일이 없으니까 손톱이 이렇게 자란 것도 몰랐네……. 오늘 집에 가면 자르자.)
가만히 있노라면, 당신을 포함한 모든 학생의 출석체크가 종료됩니다.
임시 통합 담임을 맡게된 C반의 선생님이 교탁 위로 출석부를 탕탕, 두어번 두드린 뒤 말합니다.
C반 선생님: 아까도 말했지만 뒤늦게 등교해 듣지 못한 사람이 있을테니 다시 한 번 공지한다.
갑작스럽겠지만 오늘부터 결석생 수가 많은 반을 임의로 묶어 합반 수업을 진행하게 되었다.
A반 C반은 미술, 음악중에 음악 과목을 선택한 반이지?
비슷하게, 미술을 선택한 B반은 D반과 합반 수업을 진행한다는 소식이다.
A반 선생님이 유행성 질병으로 병가를 내게 되셔서, 오늘부터 내가 A반과 C반의 통합 임시 담임을 맡게 됐고.
참고로 우리 반은 지금부터 A-1반이다.
C반 선생님: 이상, 조례 끝. 다들 조용히 1교시 준비하도록.
성황리에 황당한 공지를 일단락한 임시 담임 선생님이 안내를 끝마친 직후 교실 앞문 너머로 사라집니다.
몇몇 아이들의 얼굴에 불만의 기색이 내비쳐지는 한편, 원래 알던 사이인지 옆자리에 앉아 담소를 나누는 아이들도 눈에 띕니다.
바뀐 임시 시간표에 따르면 1교시는 수학이라고 하네요.
비어있던 자리가 당신의 책상이었던 모양인지 책상 사물함에 손을 넣어보면 당신 이름이 적힌 교과서가 모습을 드러냅니다.
차소희:(참, 별 일도 다 있네……. 주위를 둘러보면 역시나 음악과 애들뿐이다. 미술과와 음악과로 과를 나눈 걸 성의없다고 불평해야 할지,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피아노과 애들은 많이 결석한 모양인지 피아노과는 많이 없다. 아니면 오전 레슨 간다고 안 온 건가. 어느 쪽이든 마음에 들진 않는다. 나도 레슨 핑계 대고 뺄걸. ……안 믿었으려나?)
지루한 오전 시간이 흘러갑니다.
*
[ PM 12:40 ] 점심시간 종료 20분 전.
점심을 해결하고 교실로 돌아와 바뀐 시간표를 재차 확인하면, 5교시는 음악 수업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교실 칠판에 노란색 분필로 작성된 커다란 문구가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5교시 음악이래~! 교과서 챙겨서 음악실로 이동할 것!'
하필이면 음악 수업이라니… 내키지 않습니다.
책상 사물함이든 교실 사물함이든, 어쨌든 교과서를 챙기기 위해 내부를 뒤적이면 쉽사리 음악 책을 발견합니다.
그런데 어쩐지 사용감이 영 낯익지 못합니다.
차소희:……음? (내 책이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다. 어차피 교과서는 안 쓰는데, 누가 교과서를 바꿔간 건지. 짜증스럽게 책을 확인한다.)
교과서를 뒤집어 살핀 당신은 책 모서리에 적혀 있는 낯선 이름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비스듬한 삐침이 있지만 그럭저럭 단정한 글씨체로 '3학년 C반 김래빈'이라고 적혀 있네요.
아침부터 합반 수업을 위해 책걸상을 옮겼다더니 아무래도 그 소란스런 틈에 교과서가 뒤섞였나 봅니다.
차소희:(이 이름, 괜히 신경쓰인다. 이전까지는 콩쿨에 나오지도 않다가 작년부터 슬금슬금 수상권에 이름을 올리던 애였지. 이 애에게 자리를 빼앗긴 애가 분노의 연습을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이 학교에 왔구나. 피아노과에 있는 애들은 어차피 다 고만고만하니까 관심 없다. 어차피 피아노에 미쳐있는 애겠지. ……예전의 나처럼.)
(어차피 교과서 가져오든 말든 아무도 신경 안 쓰는데, 가져다줘야 되나. 일단 남의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다 문득 그 애의 얼굴을 모른다는 게 떠올랐다. 내가 콩쿨에 안 나가기 시작할 때부터 콩쿨에 등장했으니까, 얼굴 봤을 리가 없다. 아. 짜증나네. 꼭 내가 도둑이 된 것 같잖아.)
그나마 그가 C반이라는 건 알겠네요.
오늘부터 전체 합반 수업을 진행한다고 했으니, 이 교과서의 주인도 5교시의 음악실에 나타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차소희:(음악실에 도착하면 C반 애에게 김래빈이 누군지 물어보고 책을 돌려줘야겠다. 교과서는 없어도 어차피 괜찮을 테니까 자신의 것은 굳이 찾지 않고 조금 일찍 음악실로 향한다.)
3학년 A반은 3층, 음악실은 5층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최근 엘리베이터 고장 문제로 여지껏 수리가 미뤄지고 있으니 하는수 없이 계단을 이용해 올라가도록 합시다.
수업 시작 종울림을 목전에 둔 시간인지라 복도는 한적하기만 합니다.
주욱 시원하게 뻗은 복도 창 너머로 초록이 우거지고 청음이 기승을 부립니다.
여름이 불시에 목구멍에 들이닥친 듯한 기분.
그 막연함을 가르고 어디선가 나지막한 악기 소리가 들려옵니다.
차소희, 듣기 판정.
차소희: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70
판정결과: Regular
끊길듯 가냘픈 소리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연주를 재개합니다.
당연하게도 저 복도 끝에 자리하고 있는 음악실 너머에서 들려오는 소리임을 알 수 있습니다.
아울러 더 듣고 말고 판단할 것도 없이 피아노가 연주되어 흘러나오는 소리임을 눈치챌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당신이라면 더더욱 그럴 거예요.
아침에 들었던 곡소리와 다른 점이 있다면 속이 메스껍거나 신경이 날카로워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일까요? 과거에 당신이 꽤 좋아하던 곡이었기 때문일까요?
마치 태엽을 감듯 부드럽고 유연한 악상이 여운처럼 귓전을 맴돕니다.
흡사 굳어버린 고목나무처럼 못 박힌 듯 서서, 이어지는 곡조를 관청하다 보면… 꼭 본능처럼 되새겨지는 감상이랄 것이 남는 법입니다.
차소희, 지능 판정.
차소희: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83
판정결과: 실패
연주 실력이 아주 훌륭합니다.
이 학교에 이만큼이나 피아노를 잘 치는 학생이 있었던가?
기억이 가물가물합니다.
차소희:(뭐, 있었겠지. 나름 유명 예고인데 이 정도도 못 치면 곤란하다. 피아노를 안 친지 3개월이나 되었지만 나도 이 정도는 아직 칠 수 있어. 치기어린 생각을 한다. 괜한 경쟁심일까. 이 곡을 연주하는 스스로를 상상해 봤지만, 상상만으로도 피로해졌다. 지겨워. 피아노 소리 같은 건.)
당신이 음악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점심을 해결하고 뒤늦게 몰려온 아이들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우르르 몰려들어온 아이들의 대화 소리가 들립니다.
학생 A: 근데 누가 피아노 연주하고 있던 거 아니었어?
학생 B: 그러게? 아니면 그거 아냐? 이 학교 원래 음악실에 귀신 나온대.
학생 A: 뭔 소리야... 너 귀신 같은 거 믿냐?
학생 B: 너야말로 못 들었어? 요즘 애들 없는 시간에 간간이 5층 음악실에서 피아노 연주 소리 난다는 거… 왜, 나 작년에 클래식 동아리에 아는 선배 있었잖아. 그 선배가 그러는데 축제 기간에 밤 늦게까지 학교에 남아 있었던 적이 있더래. 달밤에 피아노 소리가 나서 눈 딱 감고 음악실 문을 열어봤는데 아무도 없었다는 거야!
학생 A: 아, 헛소리 그만하고 앉아. 벌건 대낮부터 웬 귀신 얘기.
학생 B: 진짜라니까?
한편 당신은 자꾸만 아까의 피아노 소리가 신경쓰입니다.
선생님도 아닌 모양인데,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였을까요?
그 전에 왜 이런 걸 생각하고 있는 거지…. 정말 귀신이었나?
됐고, 신경 끄자.
그런데도 신경이 쓰입니다.
차소희:(오후 수업 듣는 걸 보니 오전에 레슨을 들은 모양이고, 오전에 레슨을 하다 왔다면 질리도록 피아노를 치고 왔을 텐데 피아노를 또 치고 싶나? 이상한 놈들밖에는 없어. 나도 예전에는 저랬을 것 같지만. 누가 피아노를 쳤는지는 결국 보지 못했지만 어차피 우리 반 아니면 C반 애다. 나중에 찾아보던가 하고…… 일단 이 책 주인부터 찾아줄까. 아무나 모르는 얼굴에게 다가가 냅다 질문한다.) 너 C반 애지?
C반: 응? 맞는데. 왜?
차소희:혹시, 김래빈이 누군지 알아? 교과서가 바뀌어서.
C반: 김래빈? 알긴 하는데.. 여기 없는 것 같은데? 출석 안 한 거 아냐?
C반 학생은 건성으로 음악실 안을 휘휘 둘러보더니, 다시 자기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합니다.
차소희:(레슨을 가던가 했겠지. 음악실에 없다면 알 바는 아니다. 아무데나 빈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이번 시간에는 뭘 하면 좋을까. 지루해.)
때마침 수업 종이 울립니다.
마흔 명에 육박하는 아이들이 왁자지껄 음악실을 서성이다 각자 자리를 찾아 착석합니다.
당신 또한 마침맞게 빈 자리에 몸을 앉히고 선생님을 기다리다보면… 톡톡. 누군가 어깨를 두드립니다.
차소희:(어깨를 두드리는 사람을 올려다봅니다.)
고개를 돌려 상대를 확인하면 커다란 남학생이 당신을 향해 몸을 구기고 있습니다.
언뜻 살벌하기까지 한 기세에 당신은 조금 놀라 몸을 뒤로 뺐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까만 눈, 좀 푸석푸석하고 북실거리지만 제법 예쁘게 모양을 낸 머리.
무서운 인상이라 몰랐는데, 조금 진정하고 보니 하얀 얼굴에 잘생긴 이목구비가 시선을 사로잡습니다.
김래빈:…… 안녕. 혹시 옆자리 비어있을까?
차소희:(예쁘장하게 생겼네, 첫인상은 그러했다. 얼굴 때문인지 조금 긴장을 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바보 같은 말에 금세 긴장이 풀렸다. 옆자리 빈 거 누가 봐도 보이잖아. 가장 친한 친구는 오늘 오후 레슨이라 수업에 빠졌다. 뭐, 얘가 그걸 알 리는 없나…….) 응. 비었어.
김래빈:그럼 혹시 내가 앉아도 괜찮을까? (까만, 약간은 작은 눈동자가 똑바로 너를 쳐다보지 않고 이리저리 데굴데굴 구른다. 그러다가도, 질문을 할 때는 너를 똑바로 바라본다. 눈이 마주치고, 조금 긴장한 채 답을 기다렸다.)
차소희:(눈동자를 굴려 교실 안을 본다. 자리가 꽉 차 있지는 않은데…… 그래도 뭐, 상관 없나.) 응. (옆자리에 앉는 당신에게 시선을 두고 질문한다.) 근데, 혹시 김래빈이 누군지 알아?
김래빈:어? 어, 응?!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살짝 튀어오르듯 한다. 소란을 피워 시선을 끌었을까봐 주변을 황급히 둘러본다. 다행히 아직 선생님이 들어오지 않아 교실은 어수선했다. 안도의 한숨을 삼키고 고개를 끄덕인다.) 저기, 네 이름이 차소희 맞지?
이거, 피치못하게 내가 가지고 있었어. 돌려줄게. (책 한 권을 불쑥 내민다.)
그가 내민 것은 사라졌던 당신의 음악 교과서입니다.
선이 뚜렷한 손목의 둘레를 따라 채워진 은색 손목시계의 테가 단정하게 빛을 반사합니다.
시중에 저런 디자인의 시계를 팔던가?
꼭 처음 접해 생소한 이계의 보석처럼 느껴집니다.
학생 신분에… 차기에는 꽤나 비싸보이는 시계네요.
차소희:(그에 대해서도, 시계에 대해서도 별 생각이 없다. 예고 다니는 애들은 다들 집이 잘 사니까, 그러려니……. 근데, 내 이름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제 가슴팍을 쓱 본다. 명찰은 역시 없는데. 콩쿨에서 만난 적도 없고.) 어. 고마워. (예의상 인사하고 책을 받아든다. 옆으로 교과서를 밀어주며) 이건 네 교과서 맞지?
확인차 상대의 가슴팍에 붙어 있는 플라스틱 명찰에 시선을 주면, 당신의 짐작이 맞습니다.
광택 없이 매끈한 명찰 위로 새겨진 이름은 '김래빈'.
그는 반가운 기색으로 음악 교과서를 받아듭니다.
기뻐하는 얼굴을 보니 책을 들고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락 말락.
김래빈:아, 맞아. 챙겨줘서 고마워. (책을 받아들고 옅게 웃는다. 조금, 아니 꽤 기쁜듯한 기색이다.)
차소희:(별 것도 아닌데 기뻐하는 당신을 보니 이상한 기분이 든다. 제게 뭐 바라는 게 있을 턱이 없다는 사실을 알긴 하는데, 뭐 바라는 게 있어서 미인계를 쓰는 것 같이 느껴져서. 당신에게서 고개를 돌린다.) ……주인은 돌려줘야 할 것 같아서 말이야. 근데, 너 나 알아? (시비조로 말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눈동자를 굴립니다. 해명해야 하나.) ……그니까, 콩쿨에서 얼굴 본 적 없는데, 나 어떻게 알아봤나 싶어서.
김래빈:(물끄러미, 너를 바라본다. 한동안 사이에 침묵이 고였다. 눈동자가 작아 언뜻 놀란 것도 같은 얼굴이 가만히 너를 마주하다가, 인내심이 닳으려는 찰나 입술이 달싹인다.) 나는… 너를 원래 알고 있었어.
차소희:그래? (이상하다. 이 얼굴이면 아무리 어릴 적 봤다고 해도 잊을 리가 없는데. 의아할 뿐이다. 예전에 본 적이 있었나? 아니면, 내가 참여한 콩쿨을 구경하러 왔을지도. 가족이 참여한다면 그런 일, 흔하니까.) 그렇구나……. (어떻게 안 건지에 대해서는 더 묻지 않기로 한다. 귀찮아졌다.)
김래빈:(네 태도가 시큰둥해지자 응, 하고 대답해 굳이 대화를 끝맺는다. 이내 음악 선생님이 들어와, 앞을 바라본다.)
[ PM 13:08 ] 5교시 음악시간
음악 선생님: 자, 오늘 78p 바로크 시대 작곡가 파트 진도 나갈 차례지? 내가 알기로 A반 C반 진도가 비슷했거든?
모두 책 펼치자.
유럽 문명사에서 지칭되는 바로크 시대란 보통 17세기를 가리킨다는 거, 저번 시간에 먼저 이야기 했었지?
17세기의 예술을 가리킨다고….
점심시간 종료 이후, 선생님이 음악실에 등판함과 동시에 수업이 시작됩니다.
점심 식사 직후인지라 어마어마한 식곤증이 밀려옵니다.
벌써부터 꾸벅꾸벅 조는 등 시동을 걸고 있는 아이들의 수도 만만치 않습니다.
이제나 저제나 78p를 펼치기 위해 교과서 페이지를 넘기던 당신은…
어라? 60p쯤에서 전에 본 적 없던 작곡가의 이름을 발견합니다.
차소희:(의아하다. 음악사는 질리도록 들어서 대부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런 작곡가가 있었던가? 음악 선생이 78페이지에 대한 설명을 하든 말든 60페이지를 펴서 읽는다.)
소제목은 'A에 대하여'.
원래 음악책에 이런 내용이 실려 있었던가요?
A라는 작곡가가 존재했던가요?
과거에 나름 오래간 피아노를 전공했던 자신이 교과서에 실릴 만큼 이름난 작곡가를 모를리 없는데…
왠지 모를 위화감이 듭니다.
차소희, 이성 판정.
차소희:
SAN Roll
기준치: 60/30/12
굴림: 91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
손 놓고 지내는 동안 머리가 돌처럼 굳어버린 건가?
차소희:(그럴 리 없다. 아무리 생각해도 A라는 작곡가는 존재하지 않았다. 교과서에 실릴 만큼 이름난 작곡가라면 내가 모를 리가 없잖아? 내가 들어보지 못한 작곡가가 이렇게 유명할 리도 없다. 피아노 곡을 하나도 작곡하지 않았다면 모를까…… 교과서를 읽는다.)
교과서에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되었다는 A의 곡에 대한 기사 내용이 첨부되어 있습니다.
차소희, 관찰 판정.
차소희: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64
판정결과: 실패
박스 하단에 작은 글씨로 새겨진 메모를 추가로 발견합니다.
달리 흥미로운 내용은 아닙니다.
어떤 예술가의 증언에 따르면 악보에는 작곡가 A의 자필 사인으로 추정되는 은은한 빛의 인장이 새겨져 있었다는군요.
차소희, 지능 판정.
차소희: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54
판정결과: Regular
마침 몇년 전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였던 A에 대한 기사를 접했던 기억이 떠오릅니다.
음악에 문외한인 인물도 단숨에 사로잡을 수 있을 만큼 매혹적인 악보였다는 뜬소문이 내용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죠.
그런데 그게 도둑을 맞았었나봅니다.
심지어 나머지 한 곡은 분실되었고요.
어쨌든 도둑 엔딩이라니 별 대단한 내용도 아닙니다.
악보 원본이 공개된 것도 아닌 모양인데 별 게 다 교과서에 실리는군요.
그 두 곡을 제외하곤 여지껏 악보랄게 발견되지도 않았던 무명 작곡가가 어떻게 교과서까지 신출귀몰 했는지 의문입니다.
차소희:(별 게 다……. 평소 음악 교과서를 펼쳐보지도 않았는데 이런 게 교과서에 실려 있을 줄이야. 그래도 한 번쯤 읽어볼 가치는 있을지도. 교과서를 재평가하며 동태 눈깔로 음악 선생님을 쳐다본다. 졸려 죽겠는데 정신은 멀쩡하기 그지없다.)
옆자리의 남학생 역시 꾸벅꾸벅 졸더니 책상에 머리를 박고 잠들어있습니다.
말랑한 목덜미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에 시선이 갔다가도 쉬이 흩어집니다.
음악실의 에어컨이 고장난 걸까요… 너무나 덥습니다.
바깥에서는 매미가 울고 풀벌레가 나무를 깁니다.
방충망에 달라붙어 있던 나비 하나가 창틀을 타고 오르다 이내 나뭇잎 너머로 자취를 감춥니다.
여름이네요.
종례, 방과후
어떻게 하루가 지나갔는지 모르겠습니다.
세상은 염증이 날만큼 물러 터졌는데 시간은 너무나도 착실히 흐릅니다.
어쨌든 드디어 귀가입니다. 집에 갈 준비를 해볼까요.
차소희:(가방에다 필통을 집어넣는다. 단출한 짐을 챙기고 종례를 기다린다.)
음악 선생님: 차소희.
종례 도중, 담임 선생님이 갑작스레 당신의 이름을 호명합니다.
각자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당신의 자리에 고였다가도 빠르게 흩어집니다.
듣자하니 임시 출석부가 음악실에 있는 것 같다며, A, C, 두 반 모두 반장이 결석해 없는 고로 당신이 음악실에서 출석부를 들고 교무실에 가져다둔 뒤에 하교하라는 심부름이 떨어지네요.
왜 하필 전데요?
반문하고 싶지만 선생님은 당신의 책상 위에 음악실 열쇠를 내려두고 종례 선언을 끝마친 뒤 교무실로 사라집니다.
하는 수 없이 음악실에 들렀다 집으로 돌아가야겠네요.
차소희:(아무래도 C반 담임에게 단단히 미움을 산 게 틀림없다. 왜 싫어하는진 몰라도 귀찮게 됐다. 가방을 들고 음악실로 향한다.)
마스터키를 들고 5층으로 발걸음하면 음악실의 방음 문이 좁은 틈을 벌리고 열려있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 사이로 오후 다섯 시의 비산하는 빛줄기가 묘연히 바닥을 적시고 있고요.
누군가 음악실에 잔류해 있는 걸까요?
마지막으로 음악실을 사용했던 다른 반의 주번이 잠그는 일을 깜빡했을지도 모릅니다.
차소희:This message has been hidden.
이런저런 가능성을 유추하고 있노라면 그 사이를 놓치지 않고 작달만한 피아노 소리가 들려옵니다.
이 곡은… 익히 들어왔기에 잘 알 수밖에 없는 곡입니다.
드뷔시의 달빛.
누구인지 모를 연주자의 손끝에 의거하여 피아노 독주가 막 시작되는 찰나입니다.
차소희, 지능 판정.
차소희: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그러고보니 며칠 전부터… 이 시간 즈음 계단에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를 들었던 것도 같습니다.
문득 음악 시간 시작 전에 문 너머로부터 새어나오던 피아노 소리를 떠올립니다.
어쩌면?
늘 환청같은 피아노 곡소리를 들으며 계단을 내려가던 기분이 좋았는지 싫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문은 여전히 열려있고 연주는 거리낌이 없습니다.
한편으로 방과후에 마음대로 음악실을 사용해도 되는 건가 싶기도 할테고요.
선생님께 하달받은 심부름도 있으니 당신은 음악실로 들어서기로 합니다.
문을 가르고 접어든 공간의 꼭 닫혀있던 커튼이 말갛게 걷힌 가운데, 잠시 눈 앞이 하얗게 정전했습니다.
산발하는 태양 빛은 이따금 사람의 혼을 쏙 빼놓는 구석이 있습니다.
눈부신 빛에 적응한 시야 너머로 들어오는 것은 예의 그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
투명한 햇빛을 눈부시게 반사해 고아한 빛을 뿜는 악기 너머 건반을 다루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오늘 음악 시간에 함께 수업을 듣던 C반의 김래빈입니다.
막연히 듣기에도 굉장히 탁월한 실력입니다.
청명한 수풀이 푸르른 가운데 녹색으로 물든 빛이 등 뒤를 적시고 있습니다.
순간 넋이 나갈 뻔했습니다.
그런 순간이었습니다.
차소희:(잠시 멍해진 채로 음악소리를 듣는다. 좋은 연주다.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것. 단단하면서도 몽환적인 소리가 귀를 잡아챈다. 달빛이라면 자신도 몇 번 연주해보았던 곡이다. 그 때의 나는 어떤 심정으로, 어떻게 피아노를 연주했었던가? 기억이 날 것 같기도 하고, 아주 먼 옛날의 일처럼 희미하기도 하다. 직접 피아노를 쳐 보면 확실한 일이긴 하지만…… 아직은 마음에 거리낌이 있긴 하다. 그래도. 직접 다시 한 번 쳐 보고 싶어. 이건 경쟁심일까, 혹은 드뷔시의 마법일까. 입을 열긴 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극복 Roll
기준치: 100/50/20
굴림: 52
판정결과: Regular
손가락이 건반에서 떨어져 나오면 래빈은 그 옆에 세워두었던 녹음기의 정지 버튼을 누른 뒤 주머니에 집어넣고 당신에게 아는 척을 합니다.
김래빈:안녕. 또 만났네. (연주동안 기척에는 신경조차 쓰지 않던 기색은 어디로 가고, 온 주의가, 마주한 사람이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에게 집중되어있다. 센 인상이라 더더욱 부담스러운 느낌이다.) 방과후인데 음악실에는 어쩐 일이야?
차소희:……너 종례 때 졸았지? (그 피아노 연주에 홀린 것이 괜히 부끄러워졌는지 괜히 퉁명스럽게 말한다. 종례 때 김래빈이 반에 있었는지도 기억 못하면서.) 담임이 나보고 출석부 들고 오랬잖아. 음악실에 출석부 있는 것 같다면서. (조금 부담스러워져 시선을 피하며 교탁을 뒤진다.)
김래빈:그랬었나? (답지않은 무관심을 보이며 대답을 흘렸다. 그러곤 교탁을 뒤지는 네 근처를 얼쩡거린다. 그러다 너보다 한 발 빨리, 바닥에 떨어진 출석부를 발견해 주워 네게 내밀었다.) 여기 떨어져 있다. 선생님이 떨어뜨리셨었나봐.
차소희:응. 귀찮게, 왜 나한테… 물론 내가 제일 시간이 많은 사람이긴 할 테지만…… (불평하다가 당신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조금 놀란 얼굴로 당신이 내미는 출석부를 가볍게 받아든다.) 고마워. 임시 실장이라도 지정해서 걔한테 시키지. (낮은 한숨.)
김래빈:네가 제일 시간이 많아? … 이제 피아노를 안 쳐서? (까만 눈이 너를 물끄러미 응시한다. 다소 직설적인 질문이지만 물러서거나 돌려말하는 기색은 조금도 없다. 그것이 아주 중요한 문제인 것처럼.)
차소희:(눈을 동그랗게 뜬다. 뭐, 사실 유명한 일이긴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라서. 놀란 기색을 이쪽도 숨기지 못하고 멍하게 당신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끄덕인다.) 뭐, 뭐…… 그런 거지. 연습도 안 하고. 레슨도 받으러 안 가고. 이 학교는 왜 왔냐고 묻는 쌤들도 가끔 있으니까?
김래빈:왜? 피아노가 싫어졌어? (저가 피아노도 아닌데 눈썹을 팔자로 만들어가며 심각하게 묻는다. 그도 그럴 것이,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해왔으니까.) 왜 그만둔 건지 물어봐도 돼?
차소희:(지겹도록 들어오던 질문이지만, 굳이 대답해주지 않을 이유도 없다.) 싫어진 거라고 해야 하나? 그냥, 재미없어서. (다들 이런 이유에서 피아노를 그만두었다고 하면 어이없다는 듯 쳐다보곤 했다. 그렇지만 정말 재미없고, 지겨워진 걸 어떡해.) 재미없는 거 계속 하면 지겹잖아. 지겨워졌어. 그냥.
김래빈:그랬구나. (따로 더 이래봤냐, 저래봤냐 훈수를 두지는 않는다. 그저 눈을 크게 뜨고 귀 기울여 들을 뿐. 그러다가 머뭇머뭇, 시선을 발 끝으로 옮긴다. 어떡하지? 하고 맹렬하게 생각 중.) 저기, 그. 그럼 듣는 건 어때? 그것도 지겨운 거야? 사실은 너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거든….
내가 사실 콩쿨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별로 유의미한 피드백을 받지 못하고 있어서 식견 있는 사람의 의견이 꼭 필요해. 괜찮다면 혹시 내일 조례 전 아침에 음악실에 들러서 내 연주를 듣고 피드백을 해줄 수 없을까? (빠르지만 따박따박 잘도 귀에 꽂히는 부탁이 쏟아져나온다.)
차소희:응? 듣는 건 그렇게까지 지겹진 않은데…… (조금 당황해서 당신을 쳐다본다. 식견 있는 있는 사람의 의견이라니. 그럼 내 의견을 듣는 건 의미 없는 거 아닌가? 레슨 받는 선생님한테 들어야 하는 거 아니야? 잠시 과거를 떠올린다. 온통 칭찬뿐이라 유의미한 피드백을 받지 못한다고 느꼈던 적이 없지 않았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는 알 것 같다. 그래도 나한테 부탁해봤자……) 괜찮긴 한데, 내가 그만큼 잘 듣는 관객이라고는 생각이 안 드는데…… 괜찮겠어?
김래빈:(앗. 어. 정당한 근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반응이 나올 거라고는 미처 상상하지 못한 듯 고장난다. 눈을 껌뻑거리다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채 눈을 옆으로 쓱 돌린다.) 그, 그게. 레슨 선생님이 유행성 독감에 걸리시기도 했거든. 아무도 안 봐주는 연습을 계속하는 것보다는 누군가 있는 게 훨씬 낫지 않을까? (설득력 있는 발언이었다고 생각하는지 다시 너에게로 시선이 쓱 돌아왔다.)
차소희:아. 요새 유행한다는 그거? (고장난 듯 뚝딱거리는 걸 빤히 바라본다. 왜 긴장한 거지. 나, 피아노 안 친 지 벌써 반 년이 다 돼가서 도와줄 수 있는 부분이 없을 텐데. 차라리 음악 쌤한테 부탁드리는 것도…… 거절의 말을 생각하다가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문득 떠올린다. 굳이 거절할 필요도 없지 않나. 하는. 그리고 계속 귀찮게 굴 것 같아서 지금 승낙하는 게 낫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 좋아. 콩쿨 성적 잘 나오면 나중에 커피나 한 잔 사. (굳이 한 마디 더 덧붙이며 뒤돈다.)
김래빈:(가방을 챙겨 후다닥 따라나온다. 네가 먼저 가버릴까봐 얼른 음악실 문을 잠갔다. 그리고 무작정 따라가는 건 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가방을 안고 네게 물었다.) 저, 소희야. 괜찮다면 같이 하교해도 될까?
차소희:……응? (교무실로 내려가는 길에 질문이 들어왔다. 방향이 같다면 모를까, 방향이 다르면 오히려 귀찮지 않나.) 나 버스 타고 가야 하는데. XXX번. 방향 맞으면 같이 가는 건 괜찮아. 너네 집 어딘데?
김래빈:OO초 방향이면 나도 그거 타. (밝아진 안색으로 성큼성큼 걸어와 네 옆에서 걷는다.) 부탁 들어줘서 고마워. 콩쿨 성적이 어떻게 나오든 커피는 사줄게. (조금 들뜬 것 같은 기색이다.)
차소희:아니, 뭐. 들어주기 어려운 부탁도 아니었는데……. (잘생긴 얼굴이 밝게 웃는 걸 보니까 갑자기 조금 부담스러운 거 같기도 하고……. 얼빠인 게 잘못이지. 그렇지만 저 얼굴에 홀리지 않을 사람이 어딨나. 근데 OO초 방향이면 하교하면서 자주 마주칠 법도 한데, 이전에 마주치지 않았던 게 의아하긴 하다. 저런 얼굴이면 기억 못할 리가 없는데.) 그리고 커피는 농담이었어. (농담 아니었는데, 농담인 편이 나은 것 같다. 계속 엮이면 귀찮은 일이 생길 것 같아.)
래빈은 아니라며, 커피 정도는 약소하다고 말하며 거듭 대접하겠다고 말합니다.
그런 대화를 하며 당신과 래빈은 하교를 마칩니다.
둘째날 아침
전날 래빈의 요구를 수락한 당신은 오전 7시에 음악실에서 만나자는 약속에 따라 제법 이른 시간 등교하게 됩니다.
나뭇잎 사이를 걸러 들어온 햇빛이 묘하게 어슴푸레하게 느껴지는 오전, 공기는 제법 서늘하고 묶어놓지 않은 커튼을 바람이 나부낍니다.
암막 커튼과 그 위에 이중으로 쳐놓은 쉬폰 커튼이 펄럭일 때마다 텅 빈 사각형의 교실 위로 유령의 몸짓같은 그림자가 일렁이길 반복합니다.
오늘은 내가 가장 빨리 등교한 건가? 그런 생각과 함께 책가방을 내려놓고 교실을 둘러보면…
텅 빈 서른 대여섯 개의 책상중 유일하게 책가방이 올라와 있는 책상 하나가 눈에 들어옵니다.
차소희:(김래빈의 책상인가 보다. 별 생각없이 책가방을 제 자리에 내려놓는다. 괜히 남의 짐을 뒤지는 성격은 아니라, 일별하고 제 가방을 정리한다.)
(쟤는 가방도 시꺼먼 거 들고 다니네. 뭐 그런 생각을 하며 대강의 정리를 마치고 음악실로 올라간다. 콩쿨 곡이라면 제일 잘 치는 거겠지. 조금 기대되는 것 같기도 하고.)
오전의 음악실
마치 그 누구도 손대지 않은 것처럼 음악실 문은 굳게 닫혀 있습니다.
귀를 기울여보지만 오늘은 이 너머에서 달리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지는 않는군요.
문고리를 잡아 돌리면 부드럽게 돌아갑니다.
열려 있으므로 어렵지 않게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겠네요.
음악실로 들어서면 어제와 같이 환하고 눈부신 여름의 햇살이 당신의 전신을 덮칩니다.
이름난 과거 음악가들의 초상화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방음벽 어귀에 붙어 있고, 교탁 너머의 칠판에는 분필 가루가 얕게 묻어나긴 했으나 그 나름대로 깨끗하고 푸르기만 합니다.
오래된 악기만이 머금은 특유의 냄새는 익숙한 종류여서, 늘 이 냄새를 기억하고 있던 심장만이 조용히 두방망이질 칩니다.
창틀 너머로 풀잎의 싱그럽고도 비릿한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콧잔등을 건드리면 그제야 정신이 드는 것입니다.
그 단정하고 고요한 음악실 가운데 그랜드피아노 앞에는 약속처럼 래빈이 앉아 있습니다.
래빈은 뚜껑이 닫힌 피아노에 팔꿈치를 기댄 채 이마나 눈가를 짚고 있습니다.
당신이 들어온 인기척을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어딘가 몸이 좋지 않은듯 안색이 창백합니다.
비단 오전의 하얀 백색광선 탓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잠깐.
차소희:(잘생겼다…… 맑은 태양 아래의 미남이 눈가를 짚고 있는 모습이 어느 과거의 명화 같아서 잠시 정신을 빼고 있었다. 문득 정신이 들자 그가 인기척을 눈치채지도 못하고 창백한 얼굴로 아래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어디 아픈 거 아니야?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발소리를 크게 내며 그에게 다가간다.) 아침에 약한 편이야? (저혈압이라도 있나. 그런 생각을.)
김래빈:아. 왔구나. 잠깐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 (기척을 느끼자 화들짝 놀라며 손을 내렸다. 아침에 약한 편이냐는 물음에 고개를 젓는다.) 딱히 그런 건 아니고… 콩쿨 전이라 긴장해서 그런가 봐. 와줘서 고마워. (피아노에 올려뒀던 악보들을 너에게 내민다.) 한 번 봐줄래? 혹시 이 중에서 네가 좋아하는 곡이 있어?
차소희:긴장해서 그런 거 맞아? 얼굴이 창백한데. (악보들을 받아든다. 익숙한 곡들. 고교 콩쿨에서 자주 보이는 곡들이지만 좀 마이너한 곡도 한 곡 끼어 있다. 잘 치기는 어렵지만 잘 쳐도 좋은 점수를 받기는 어려운 곡. 나는 좋아하는 곡이지만…… 얘네 쌤은 뭐 이런 곡을 넣어 뒀대? 한숨을 쉰다. 적당한 악보 하나를 다시 당신에게 내민다.) 내가 좋아하는 곡이 있긴 한데, 콩쿨 나갈 거면 이게 나을 거야. 무난한 걸로 가야 점수 잘 받아.
김래빈:그렇구나. 너한테 부탁하길 잘 한 것 같아. (네가 골라준 악보를 들여다보다가 힐끔 네 눈치를 살핀다.) 네가 좋아하는 곡은 어떤 거야? 난 이거 좋아하거든. (이 곡이 남아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었지. 꽤나 많은 곡을 잃었고…. 우리가 함께 좋아하던 곡도 많이 줄어버려서. 네게 악보 하나를 골라 내민다.)
차소희:(조금 놀란다. 이 곡, 좋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데……. 악보를 보자 이상한 기분이 든다. 머릿속으로 선명히 들리는 예전 나의 연주. 좋아하던 피아니스트의 연주. 시간이 괜찮다면 이것도 연주해달라고 하고 싶은데…… 피아노가 지겨워졌다고는 하지만 아주 싫어진 것은 아니라. 연주하는 것이, 그것으로 일어나는 일들이 지겨워진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 지겹고 싫어진 것은 아니었나 보다. 이 곡을 연주해 달라고 하면 가볍게 한 프레이즈 정도는 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 나도 이 곡 좋아해. 콩쿨 나갈 만한 곡은 아니지만…… 들으면 뭔가, 편해져서. (그러며 웃는다.)
극복 Roll
기준치: 100/50/20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김래빈:(네가 웃는 모습을 빤히 바라본다. 그러고보면 이리로 오고 나서 웃는 건, 처음 보는 것 같다. 그게 괜히 좋아서 같이 슬며시 웃어버린다. 네게 악보를 다시 받아, 손풀기라고 변명하면서 녹음기를 꺼내 버튼을 누르고, 우리가 좋아하는 곡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차소희:(역시 잘한다. 나와는 전혀 다른 해석과 연주 스타일이지만 그 '다름'이 좋다고 해야 하나. 잘 하는 사람은 싫지 않아. 손풀기라는 말은 변명이겠지. 이 곡을 누가 손풀기로 쳐. 그렇지만 어쩐지 기분이 좋다. 맞아, 피아노는, 음악은 누구에게나 다정한 거였지……. 즐거이 듣다 연주가 끝나면 손뼉을 친다. 당신이 녹음기를 끄자 옆으로 다가가 질문한다. 목소리에는 장난기가.) 정말 손풀기 맞아? 거짓말이지. 그거.
김래빈:완전 내 맘대로 쳤으니까 연습이라기엔 좀 그렇다고 생각해. 그러면 손풀기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피아노 의자에 앉아 너를 올려다보며 웃었다. 그리고 웃음기가 가시지는 않았지만 차분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검은 눈동자가 정직하게 너를 비춘다.) 너한테 거짓말 안 해. 정말이야.
차소희:(잠시 당신을 빤히 바라보다가 깔깔 웃는다. 이렇게 웃음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는데, 어쩐지 웃음이 난다. 잠깐 웃다가 정색하고 말한다.) 너, 좀 조심하는 게 좋겠다. 여자애들 착각하기 딱 좋게 말하네. 요즘 애들이 얼마나 무서운데. 귀찮은 일 휘말리지 않으려면 그렇게 말하는 건, 좀. (혼자서 고개를 끄덕인다. 착각할 뻔 했다. 잘생긴 애가 저러면 파괴력이 크구나…….)
차소희, 김래빈, 행운 판정.
차소희:
기준치: 50/25/10
굴림: 67
판정결과: 실패
김래빈:
기준치: 35/17/7
굴림: 41
판정결과: 실패
래빈이 피아노 의자에서 일어나다 삐끗하고, 그걸 피하려던 당신이 옆쪽에 놓여있던 간이책상을 툭 건드렸습니다.
덜컹! 일말의 소음과 함께 간이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악보집들이 바닥에 우수수 쏟아져 섞입니다.
김래빈:아. (우수수 쏟아지는 악보를 망연히 바라보다 쭈그려앉아 주섬주섬 악보를 줍는다.)
차소희:아, 어떡해…… (악보가 쏟아지는 걸 멍하게 쳐다보다 함께 악보를 줍는다. 다 섞이면 찾기 힘들텐데. 진짜 어떡하지? 사고가 정지되고 손만 기계적으로 움직인다.)
낱장의 악보가 발치에 채입니다.
바닥에 엉망으로 흩어진 내용물들을 살피니 래빈이 보여준 악보를 제외하고 나서도 그 수가 꽤 많았네요.
훑어보면 래빈의 이름이 적혀있는 책도 눈에 들어오지만 구매한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포장조차 뜯지 않은 악보집도 더러 보입니다.
차소희, 관찰 판정.
차소희: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67
판정결과: 실패
그 틈에 거꾸로 뒤집혀 있던 낡은 악보집 한 권을 래빈이 얼른 주워 정리합니다.
뒤집혀 있던 탓에 곡명을 읽지는 못했지만… 당신은 악보집의 어귀에 자리하고 있던 어떤 인장을 보았던 것만 같습니다.
아주 찰나였지만 일견 누군가의 자필 사인처럼 보였던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차소희:음...? (처음 보는 사인. 거꾸로 보여서 제대로 읽지 못한 걸까? 그치만……. 모르겠다. 모른 척 하는 게 맞을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순간 정신을 차리고.) 아. 미안해. 이것들은 일단 대충 넣어두자. 점심시간쯤에 정리하는 거 도와줄게. 어떡하지, 진짜…….
김래빈:괜찮아, 내 탓도 있고…. 정리는 천천히 해도 되잖아. (둘이서 한참 부스럭거린 끝에 얼추 정리가 되자 적당히 모아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고 그 아래 수납공간에 악보를 모아넣는다. 일단 눈에서 치워버리고 음악실에 달린 시계를 흘끗 올려다본다.) 정리 도와줘서 고마워.
차소희:진짜 괜찮은 거 맞아? 혼자 정리하기는 많을 것 같은데…… 콩쿨도 있다면서. (당신의 시선을 따라 음악실 시계를 올려다본다. 좀 있으면 조례 시간이긴 한데. 생각이 꼬인다. 결국에는 한숨을 쉬며) ……나중에 정리 혼자서 하기 억울하면 얘기해. 그럼?
김래빈:꼭 얘기할게. (고개를 얌전히 끄덕거린다. 그러더니 분주하게 일어나 활짝 열려있던 커튼을 모두 친 다음, 너와 함께 나와 문을 확실히 잠그며 예의 그 차분한 태도로 입을 연다.) 혹시 해서 말해두는 거지만, 해가 지고 나서는 음악실에 들어오면 안 돼, 소희야.
차소희:음? 왜? (의아한 얼굴을 한다. 진지한 목소리라 더 이해가 안 된다. 애초에 나는 수업 끝나면 바로 집에 가는데.) 뭐, 비밀 집회라도 해?
김래빈:아니. 귀신이 나오거든. 마주치면 큰 일 날거야. (조금도 어조의 변화가 없는, 진지하고 차분한 말투다. 장난기라고는 조금도 없는.)
차소희, 정신력 판정.
차소희: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96
판정결과: 실패
닫히는 문틈 사이로 시선이 날아든 것은 잠깐이었습니다.
암막커튼 바깥으로 빛이 차단되어 삽시간에 어두운 칠흑이 내려앉은 음악실이 유독 기이하게 빛났던 것도 같습니다.
귀신 이야기를 들은 직후여서일까요? 찝찝한 기분이 듭니다.
차소희, 이성 판정.
차소희:
SAN Roll
기준치: 59/29/11
굴림: 59
판정결과: Regular
이성 감소 없음.
당신과 래빈은 교실로 돌아갑니다.
5교시 과학시간
점심 시간이 종료되고 또 다시 식곤증이 학생들의 수면욕을 지배하는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오후 1시 20분이 지나가고 있는 지금은 5교시. 물리 시간입니다.
해가 중천에 떠있고 불어오는 바람의 빛은 투명합니다.
미지근한 공기가 뺨을 건드릴 때마다 어떻게 된 게 졸음만 쏟아집니다.
선생님: 거시 세계를 다루는 이론을 뭐라고 한다? 시간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관찰자나 광원의 속도에 관계 없이 진행중인 빛의 속도는 일정하다고 설명 해줬었지? 따라서 시간과 공간은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고. 어허, 왜 다들 처음 듣는다는 표정을 하고 있어?
차소희:(처음 들으니까요…… 이 수업시간에 깨어있어 본 일이 거의 없다.)
선생님: 적어도 강한 중력이 시공간을 휘게 한다는 이야기는 기억하고 있겠지? 내가 그렇게 강조했는데. 블랙홀은 시공간에 구멍을 뚫는다고 별표까지 달아줬을 거야. 교과서 확인해 봐.
차소희, 정신력 판정.
차소희: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56
판정결과: Regular
선생님의 시선이 당신을 스칩니다. 그러다 대각선 뒤쪽의 졸고있는 학생을 지적하네요.
아슬한 순간이었습니다.
차소희:(헉. 과학 잔소리 많은데. 다행이다. 생각하며 교과서를 뒤지는 척 한다. 아까 전 선생님이 말한 교과서 페이지는 말끔하기만 하다.)
교과서를 보는 척 하다 선생님의 주의가 다시 칠판으로 돌아간 것 같아 고개를 들면, 래빈이 무언가를 열심히 적고 있습니다.
얼마 있지 않아 활짝 펼쳐진 교과서 위에 뜯어진 메모지 조각이 올라옵니다.
쪽지의 내용을 확인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차소희:(갈 곳? 의아한 얼굴로 눈만 굴려 래빈 쪽을 쳐다본다. 시간이야 많은데, 왜 굳이 나한테 이러는 거지. 나 이제 피아노도 안 치고, 같이 다녀봤자 별로 좋을 것도 없을텐데……. 의아하지만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리고 아까 전에 잘못한 것도 있으니까. 펜을 쥐고 꼼지락거리다 고개를 끄덕인다. 못 봤을까봐 교과서 귀퉁이를 뜯어서 'ㅇㅇ' 이라서 적어서 보내기까지 한다.)
차소희, 관찰 판정.
차소희: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38
판정결과: Regular
쪽지의 귀퉁이가 엉성하게 찢겨져 나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선생님께 들킬까봐 어지간히도 급했던 모양이죠.
선생님: 다들 졸고 있는 것 같으니 잠깐 재미있는 이야기 좀 해볼까? 다들 어렸을 적에 시간 여행에 대한 생각을 해본 적 있지?
실제로 과거로의 시간여행의 경우 광속에 가까워질 수록 시간이 느려지니까, 빛보다 빨리 나아가면 시간이 거꾸로 흐를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해.
하지만 빛보다 빠른 물질이 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없지? 2011년에 유럽 입자물리 연구소 CERN에서 초광속입자 해프닝이 있기도 했는데, 궁금한 녀석은 학교 끝나고 찾아보도록 해라.
공부를 제대로 한 녀석들은 눈치를 챘겠지만, 시간과 공간이 속도에 따라 상대적이라는 상대성 이론에 따르면 빛보다 빠르게 나아갈 경우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게 아니라 허수의 방향으로 흘러가버린다. 즉, 과거로 가는 시간 여행을 위해선 다른 방법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소리지.
우주 끈이나 웜홀을 사용한다거나. 하지만 웜홀이 그저 가상의 이론 상태일 뿐인 지금, 시간여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야겠지? 어딘가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미지의 구멍이 생겨나지 않는 이상 말이야.
자, 과연 미래에는 과거로의 시간 여행이 가능할까? 혹여나 그렇게 미래에서 건너온 사람은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까?
선생님은 의미심장한 질문을 던지는 것을 끝으로 샛길로 빠졌던 수업을 재개합니다.
선생님: 다음 시간까지 시간여행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서술해 제출하도록. 숙제다!
뒤늦게 파격적인 숙제의 내용을 공개하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꾸벅꾸벅 졸던 아이들이 잠에서 깨어나 한껏 야유합니다.
차소희:(숙제…… 아마 잊어버리고 안 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응. 백퍼 잊어버릴걸. 그렇지만 적어둘 생각은 없다. 귀찮네.)
(오히려 방과 후에 어딜 들를지가 더 궁금하다. 선생님도 그걸 알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흥미 본위의 숙제를 내는 거겠지만, 음악 하는 애들이 그런 거 써올 시간이 어딨어. 제각기 악기하고 노래부르느라 바쁘지. 음, 근데 방과 후에 들르는 거라면…… 정말 어딜까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오후 수업시간이 흘러갑니다.
방과후
종례가 끝나고, 래빈이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방과후에 동행하기로 했었죠.
김래빈:시간 내줘서 고마워. 감사의 의미로 밥이라도 살게.
차소희:아냐. 나야 남는 게 시간인데 뭘. 그래서, 어디 가는데?
김래빈:서점에 살 게 있어서. 악보집을 살 건데 곡이 괜찮은지 너도 봐줬으면 싶었거든. 그리고 커피 사기로 했었잖아, 괜찮은 카페가 있다고 해서 위치를 봐뒀거든.
차소희:아. 그 커피를 벌써? 콩쿨 끝나고 사 줄 줄 알았는데. (그냥 학교 앞 메가커피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 사다주면 되는 일을 뭘 이렇게까지…… 꼭 나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잖아.) 그 정도야 봐 줄 수 있지. 가자. 그럼.
두 사람은 함께 학교를 나섰습니다.
해 지는 속도가 느린 여름인지라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는 이릇임에도 쨍한 햇빛이 어깨를 데웁니다.
후끈하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로 배경을 일렁이는 아지랑이가 연기처럼 자리합니다.
김래빈:(먼 거리는 아니지만 걷기에는 꽤 더울 것 같다. 버스를 타자고 제안해 정류장으로 향했다.) 있잖아, 아까 과학 시간에 시간 여행 얘기가 나왔는데… 소희 너는 어떻게 생각해?
차소희:시간 여행? 별 생각 없어. (당신의 옆에서 걷다가 그러고 보니 아까 전 그런 얘기가 나왔었지. 이제서야 생각한다.) 뭐, 진짜 된다면 신기하고 재미있긴 하겠지. 그런데 불가능하다며? 과거로 가는 것도, 시간을 초월해서 미래로 날아가는 것도. 그 시간에 연습이나……. 아니. 아무튼. 있으면 재밌긴 하겠다- 정도.
김래빈:만약 된다면 넌 어떻게 하고 싶어? 과거로 간다던가, 미래로 간다던가. 나는 과거로 가볼 것 같아.
차소희:왜? 나는 미래로 갈 거 같은데. 과거를 바꾼다는 거, 좀 무섭지 않아? 나 때문에 만나야 할 사람들이 만나지 못하게 되고, 태어날 사람이 태어나지 않게 되고. 그렇게 되면 살인한 거나 다름없지 않나- 해서. 타임 패러독스니 뭐니 하는 문제들도 있고……. 그러니까 꼭 가야 한다면 미래로 가고 싶어. 미래의 나는 뭘 하고 있나, 궁금하기도 하고 말야.
김래빈:나는 그냥 옛날 그 시절을 한 번 더 보고싶을 것 같아. 잊어버렸으니까 다시 보게 되면 새삼스럽게 좋을 것 같고… 좋았던 기억도 언젠가는 흐려지잖아. (버스 정류장에 멈춰서서 버스가 오는지 도로 저 너머를 보다가, 너를 바라본다. 후덥한 공기를 짧은 바람이 불어와 날리고, 기분좋은 시원함이 잠시 뺨에 닿았다.) 다시 제대로 기억하고 싶어. 막상 그땐 소중한지 잘 모르니까.
차소희:그렇구나…… (어쩐지 눈 앞의 동갑 남자애가 아주 어른처럼 보인다. 좋았던 것을 잊어버리고 기억이 흐려진다, 라. 확실히 그렇지. 그 때는 소중한지 모르는 것들…… 나의 피아노도 그런 걸까. 아직 피아노를 버리지 못해서 소중한지 모르고 있는 걸까? 잘 모르겠다. 저 애에게는 잃어버린 소중한 게 있는 걸까.) 다시 제대로……. 잃어버린 거라도 있어?
김래빈:잃어버린 건 없지만, 나는 할머니께서 키워주셨다 보니까… 어른들께서는 그런 말씀 많이 하시잖아. 옛날이 좋았다고. 그러면서 나는 기억하는 걸 할머니께서는 기억하지 못하시는 경우도 많거든. 그렇다보니까 잊지 않고 제대로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한 것 같아. (생각에 빠진 네 골똘한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 네 질문에 성실하게 대답한다. 버스가 오자 손으로 가리켰다. 어서 타자, 며 버스로 들어서자 시원한 에어컨이 반겨주었다.) 시원하다…. 이따가 내려서는 마실 거라도 사서 가도 될까?
차소희:아. 그런 거구나. 어른들은 그러곤 하니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버스에 타자 살 거 같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더운 건 싫어. 역시.) 좋아. 카페가 가까이 있으면 좋을 텐데.
버스로 몇 정거장 이동하면, 학교 근처에 위치한 상가 거리에 도착합니다.
상가 거리는 이 근방에서 가장 훌륭한 발전이 이루어진 곳으로 특히 인근 고등학교 학생들에게 인기가 좋습니다.
몇 달 전에 비해 돌아다니는 유동객의 수는 눈에 띌 만큼 줄었지만, 그런대로 여전히 붐비는 장소네요.
간만에 나온 거리의 풍경이지만 무언가 드라마틱하게 달라진 부분은 없는 것 같습니다.
당신은 흐릿하게나마 기억을 되살려 상점가에 무엇이 있는지 기억을 더듬어봅니다.
김래빈:이쪽이야. (골목 안으로 두어블록 들어가자, 인적이 조금 드물어진 곳에 조그만 테이크아웃 카페가 들어서있다. 메뉴가 적힌 아기자기한 입간판 앞에 멈춰섰다.) 여기 커피가 맛있대.
차소희:(커피 맛이 다 거기서 거기지. 이런 말을 하려다가 입을 다문다. 문을 열자마자 고소한 향이 나는 게 뭔가 다른 것 같기도 해서.) 나는 아아메만 마시는데 너는 뭐 좋아해? 커피 같은 건 안 마실 거 같은 얼굴인데. (마지막 말은 놀림에 가깝다.)
김래빈:나도 아메리카노 좋아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면서, 한 잔에는 샷을 두 번 추가하고 사이즈업까지 야무지게 한다. 주문하다 아차, 하는 얼굴로 너를 돌아본다.) 너도 큰 걸로 할래?
차소희:어… 응. 나도 라지 사이즈. 샷 추가는 안 해도 되고, 이걸로 계산해주세요. (잠깐 정신을 놓았는지 행동이 한 발 늦다. 말하며 카드를 내민다.)
김래빈:아냐, 내가 살게. (어느새 지갑에서 금액에 맞게 현금을 꺼내 계산하고 있다. 거스름돈을 받아 야무지게 지갑에 수납하고 쿠폰까지 챙겼다.) 연습 도와준 것도 고마운데 시간도 내줬잖아. 괜찮으면 식사도 대접하고 싶은데, 그건 역시 부담스러울까? (재차 은혜를 갚으려 시도.)
차소희:(인상을 살짝 찡그린다. 저녁까지? 그건 좀 부담스러운데. 아무리 예술하는 애들 돈 많다고 해도, 고등학생 용돈은 다 거기서 거기다.) 응. 그건 좀……. 고등학생 용돈이 다 거기서 거긴데, 뭘 밥까지 사. 거기까지는 아니야.
김래빈:(옛날 주머니 사정이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일단 얌전히 납득하기로 했다.) 그래도 생각이 바뀌면 언제든지 얘기해줘. (어떻게든 사주려고 하던 문대 형의 심정을 약간 이해할듯말듯. 커피를 받아 네 것을 내밀었다. 두어모금 빨아마시고 시원해한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묘하게 더 또렷해졌다.)
차소희:뭘 생각이 바뀌면이야? 나도 돈 있어. (조금 자존심이 상한 듯 말한다. 자존심 상하진 않았는데, 이렇게 하지 않으면 물러서지 않을 것 같아서. 당신에게 커피를 받아 마신다. 시원하다…….) 악보는 뭐 살지 정했어? 가서 보고 살 거야?
김래빈:앗, 미안해. (… 그럼 각자 가서 사먹는 건 괜찮은 걸까? 내가 누군가 한 번에 계산하는 식의 식사에 너무 익숙해진 걸까? 약간의 반성.) 응, 가서 한 번 훑어보려고. 그냥도 구경하는 거 좋아하기도 하고. (너와 함께 나란히 서점으로 걸음을 옮겼다.)
차소희:응. (혼자서 뭔가 생각하는 것 같은 당신의 모습이 제법 웃기다. 귀여워서 웃음이 나올 것 같아, 당신에게서 시선을 돌리고 함께 서점으로 향한다.)
서점
자동문 너머로 들어서니 새 책들이 모이고 고여 있는 장소 특유의 결좋은 나무 냄새와 약간의 곰팡내가 섞인 에어컨 냄새가 느껴집니다.
햇빛에 푹 절어 있던 몸이 조금은 되살아 나는 기분이네요.
김래빈:(서점에 들어서자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악보집 코너로 향한다. 뒤적거리더니 찾는 게 없는지 네게 검색대에 다녀오겠다며 인파 사이로 쏙 사라진다.)
차소희:어. 다른 책이나 읽으면서 기다리고 있을게. (다녀오라고 손짓한다.)
책을 구경하던 당신은 문득 주변을 돌아봅니다.
어라? 시간이 좀 지나지 않았나?
래빈은 아직 돌아오지 않은 것 같네요. 왜 안 돌아오는 거지?
서점을 둘러보지만, 대형 서점인지라 운동장처럼 넓고 근방의 교복이 뒤섞인 학생들과 가지각색의 출입객들이 붐비고 있습니다.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요? 조금 옆의 음악 코너? 아니면 문제집 코너?
그도 아니라면 오늘 새로 생긴 과학 숙제를 해결하기 위해 과학 코너에 들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차소희:음.... (과학 코너 쪽으로 걸어가 본다. 아까 전 이야기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는 모양.)
과학 코너
과학 코너에는 다른 코너에 비해 상주하고 있는 사람의 수가 적습니다.
에어컨의 냉기가 속속이 섞여든 책장 틈을 둘러보지만 래빈의 모습은 보이질 않는군요.
좀처럼 구미가 당기거나 흥미로운 책을 발견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던 당신은 부자연스럽게 삐죽 튀어나온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살펴보면 제목은 <전염의 역사>… 질병학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입니다.
페이지를 넘기면 가름끈이 끼워져 있습니다.
차소희:(그 병 때문에 다들 걱정이 많나 보네... 뭐, 연구는 연구자들이 하는 거니까. 아직 고등학생이기도 하고. 대충 읽고는 책을 다시 꽂아 넣는다.)
여기에는 래빈이 없는 것 같네요. 이제 어디를 찾아볼까요?
차소희:(예고 다니는 애가 문제집 코너에 있을 것 같진 않긴 한데, 그래도 문제집 코너 쪽으로 향한다. 악보를 아직 못 찾았나 보다. 생각하면서.)
문제집 코너
시험을 대비하기 위해 새 문제집을 보러 온 학생들이 각 책장마다 두셋 즐비합니다. 과목별 구역으로 나뉘어 있으며 어디를 살펴도 래빈은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문제집 코너를 살피던 당신은 빽빽이 꽂혀있는 문제집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게으른 누군가 구매를 재고하며 아무렇게나 꽂아놓은 책일지도 모르죠.
제목은 <음악이 사람에게 미치는 영향>입니다. 음악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이 뜬금없이 문제집 코너에?
차소희:(유사과학 같다.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다. 믿기 힘들다는 느낌. 그나저나, 문제집 코너에 이런 책을 왜 꽂아둔 거야? 직원에게 잘못 꽂힌 책이 있다고 알려준 이후 다시 악보 코너로 걸어간다.)
음악 코너
음악 코너에 들어서니 자연한 안정감이 느껴집니다. 어쩌면 과거 피아노를 연주하던 시절의 당신에게는 익숙한 장소가 될 수도 있겠네요.
음악코너를 살피던 당신은 다른 악보집이나 책들과 확연한 차이를 보이는 사이즈의 책 한 권을 발견합니다. 또?
누군가 잘못 꽂아두었는지 삐죽 튀어나와 있습니다.
제목은 <빠르고 쉽게 이해하는 재미있는 상대성 이론!>… 이네요.
과학 코너에나 있을 법한 책이 뜬금없이 음악 코너에?
차소희:(과학 숙제에는 도움이 되겠네. 뭐 그런 생각을 한다. 그렇지만 과학 선생님은 시간여행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그런 건 발견되지 않았다고. 미래에서 온 인간이 과거를 바꾸는 일도 이상하긴 하지. 이상한 기분. 그것보다, 책을 대충 꽂아넣고 가는 사람이 왜 이렇게 많아?)
다음 페이지로 넘기면 여러가지 타임 패러독스에 관련된 내용들이 이어집니다.
차소희, 자료조사 판정.
차소희:
자료조사
기준치: 20/10/4
굴림: 48
판정결과: 실패
<할아버지 패러독스>와 관련된 대목을 발견합니다.
차소희:(어려운 얘기... 눈살을 살짝 찌푸린다. 읽어도 모르겠지만 적으면 과학 선생이 좋아할 것 같긴 하네. 머리속 한 켠에 기억해 둔다.)
책을 덮고 음악 코너에서 나서면, 계산대 쪽에서 누군가 손을 번쩍 들고 다가옵니다. 래빈이네요.
책을 구매한 모양인지 악보와 문제집 몇 권을 들고 있습니다.
차소희:(악보 뭐 고를지 질문한다며? 어이가 없는 표정이 된다.) 악보 뭐 고를지 물어본다며?
김래빈:응? 응. 물어보기 전에 사야지. (그새 보여줄 악보를 표시해둔 모양인지 악보집 사이로 몇 장 접힌 책장이 삐죽 튀어나와있다.) 옆쪽에 프렌차이즈 카페가 있는데, 거기 앉아서 볼래? 슬슬 배도 좀 고픈 것 같고… 케이크나 허니브레드 같은 거 괜찮으면 같이 먹으러 가줄 수 있을까?
차소희:아. (완전히 착각하고 있었다. 뭘 살지 질문하는 줄. 그런데 이건 완전 데이트 신청 아니야? 뭔가 계속 말려드는 것 같아 억울하다….) 그래. 가자. (그렇다고 해서 거절할 마음은 없지만.)
김래빈:(네 표정을 살피며 눈치를 보다 수락하자 안색이 밝아진다.) 고마워! 케이크는 어떤 거 좋아해? 나는 고구마 케이크를 좋아하는데 카페엔 잘 없더라.
차소희:아. 나는 아무거나 잘 먹어. 고구마 케이크라면 스타벅스에 요새 자주 보이던데, 거기 가도 괜찮을 것 같고. 근처에 스타벅스가 있던가? (기억을 더듬어 본다. 여기와는 거리가 조금 있었던 거 같은데.)
김래빈:(서점에서 나서자 느껴지는 열기에 손에 든 아메리카노를 쭉 마신다. 큰 사이즈지만 1/3밖에는 남지 않았다….) 아니면 여기 위층에 투썸플레이스 있는 걸로 아는데, 거기도 좋을 것 같아. 거기 케이크가 맛있으니까. (허니브레드를 먹고싶다고 한 게 아니라 다행이다. 어디 파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안 먹은지도 꽤 됐지..)
차소희:아. 거기 케이크 맛있지. (그러고 보니 카페에서 케이크를 안 먹은지도 오래되었다는 느낌이 든다. 진짜 오랜만이네. 그것도 친구랑 놀러가는 건 특히. 고등학교 진학하고 나서는 다들 바빠서 시간이 없었다.) 근데 거기 고구마 케이크를 아직까지 하던가? 나는 거기 가면 항상 치즈케이크 먹으니까 괜찮긴 한데. (좋아하는 걸 먹는 게 낫지 않나, 하는 생각을. 이 쪽은 아메리카노를 거의 다 마셨다.)
김래빈:다른 케이크도 좋아해. 고구마 케이크는, 뭐랄까. 아메리카노 찾듯이 익숙하게 찾게 되는 그런 느낌이라서 다른 것도 괜찮아. 할머니께서 좋아하셔서, 어릴 때부터 자주 먹었거든. 사실 어릴 땐 고구마 케이크만 매번 사오시니까 다른 케이크를 먹을 일이 있으면 엄청 신나했는데, 좀 크니까 고구마 케이크가 자꾸 생각나더라고. (투썸 플레이스로 향하며 아메리카노를 마저 마셨다. 카페에 들어서자 다시 시원해진다.)
차소희:아하. 그렇구나……. 어른들은 그런 거 좋아하시지. 나도 엄마가 치즈케이크 좋아해서 어릴 때 자주 먹었거든. 그래서 자주 찾는 것 같기도. (시원한 카페에 들어서서 아무 자리나 골라 앉는다.)
김래빈:(티라미수와 치즈케이크,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키고 조금 기다리자 금방 음식이 나왔다. 아직 저녁시간이 지나지 않은 한산한 오후 시간이라 그런 모양이다. 음식을 가지고 다시 카페에 착석한다.) 혹시 일찍 들어가야 해? 나랑 같이 한 군데만 더 들러줄 수 있을까?
차소희:응? 아주 일찍 들어가야 하는 건 아닌데…… 어딜 가려고? (아메리카노를 쪼롭 빨아마신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딱히 갈 만한 데가 없어서 의아한 얼굴이다.)
김래빈:상가 말고, 조금 떨어진 곳에 악기상이 하나 있거든. 꼭 들러야 하는데, 네가 같이 가주면 좋을 것 같아. (공손하게 고개를 약간 숙인다. 양 무릎에 얌전히 손을 올리고 과하게 정중해 어쩐지 거절하기 힘든 부담스러운 기세다.)
차소희:(조금 부담스러워서 눈길을 피한다. 내가 뭐라고 이렇게 공손하게? 이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악기상이라니. 관심이 없을 수가 없다. 꼭 들러야 한다는 것도 뭔가 수상하고.) 같이 가는 거야 어렵지 않은데……. (곤란한 얼굴로 시선을 피하다) 알겠어. 가자.
김래빈:정말 고마워! (안색이 확 밝아지고, 한시름 놓았다는 듯이 안도한 기색이다. 그제야 밝은 얼굴로 케이크를 한 입 떠먹었다. 응? 이런 맛이던가? 연신 갸웃대다 일단은 마저 먹는다.)
차소희:(갸웃대는 당신이 의아하다…. 티라미수 맛이 그렇게 신기한가? 이상한 애다. 안 먹어봤을 거 같진 않는데. 얼굴을 관찰하다 보니 괜히 제 얼굴에 열이 몰리는 거 같아 얼굴에 손부채질을 한다. 이상한 기분. 치즈케이크를 한 입 퍼먹는다. 음. 딱히 이상한 맛은 아닌데.)
둘이서 케이크를 하나씩 해치우고 나면, 래빈의 안내로 어느 골목길로 향하게 됩니다.
주변을 살피면 양옆으로 붉은 벽돌이 고루 쌓여 있고 그 표면을 담쟁이 넝쿨과 장미꽃이 똬리 틀고 있습니다.
요 근처에 이런 길이 있었는지… 금시초문입니다.
이곳은 하루가 다르게 바삐 변화하는 도시입니다.
도로 위에는 어제 보지 못했던 차량이 오늘의 배기음을 터뜨리며 지나다니고, 몇 달 새에 하늘을 찌를듯 드높게 건축된 신설 빌딩이 세워지는 것이 예사인 곳.
으레 생기는 변화를 너무나도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여야만 내일에 적응할 수 있는 곳.
그런 곳이니까요.
번화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장소 하나가 고스란히 남겨진 듯한 풍경은 꽤 낯설지도 모릅니다.
점점 더 좁아지는 골목을 나아가다 보면 머지 않아 그 끝에 당도합니다.
두 사람의 발걸음은 귀퉁이에 세워진 다 낡은 악기상 앞에 머무릅니다.
쿰쿰한 나무썩은내, 비릿한 풀냄새와 한층 짙어진 여름의 오존 냄새가 머리맡을 맴돕니다.
페인트칠이 벗겨진 흰 울타리가 빙 둘러쳐진 악기상, 기스 투성이 전면유리창 너머로 갖가지 악기들이 모습을 뽐내고 있습니다.
당신이 무어라고 입을 열 새도 없이 래빈은 악기상의 출입구 문을 열고 들어섭니다.
딸랑. 계절의 구색을 맞추듯 청명한 현관벨소리가 귓전을 때립니다.
악기상
빛이 바랜 카운터 좌석에 앉아 있던 악기상의 주인은 두 사람이 들어오는 것을 흘끗 확인하고 꾸벅꾸벅 졸기 시작합니다.
교복 차림새의 학생 두 명이 무언가를 살 것 처럼 보이지는 않았나봐요.
목재 구조의 악기상 내부는 흐릿하나마 찝찔한 먼지 냄새가 납니다.
살피기에는 벽면 가득 들어찬 거대한 책장이 인상적이고, 악기상의 메인이라 할 수 있는 갖가지 악기들은 진열대 위에 놓여 있거나, 벽에 걸려있거나 합니다.
악기만큼은 애지중지 관리했는지 하나같이 먼지가 쌓이지 않은데다 광택이 돕니다.
래빈은 무언가를 찾고 있는 눈치입니다. 악기들 사이를 서성이고 있습니다.
차소희:(오래된 악기상이라. 이런 곳에 악기상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책장이나 카운터에는 별로 인상적인 것이 없는지, 역시 악기들 쪽을 가장 먼저 살핀다. 바이올린 류를 보다가 피아노 쪽으로 걸어간다.)
현악기, 금관악기, 목관악기, 타악기… 타현악기인 피아노까지. 이 허름한 악기상에 어울리지 않을만큼 아름답고 반짝이는 악기들이 그 종류를 가리지 않고 자리합니다.
창측 한켠에는 들여온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진열된 다른 악기들보다도 아름답고 깨끗한 피아노 한 대가 놓여 있습니다.
차소희:(피아노 뚜껑을 한번 쓸어본다. 여기서 연주를 하고 싶은 마음도, 딱히 악기상 주인 아저씨한테 피아노를 쳐보게 해 달라고 요청할 마음도 없다. 그런데도 왠지 모르게 반짝이는 흑건과 백건을 보면 심장이 뛴단 말이지. 오늘 진짜 이상하다. 피아노에서 멀리 떨어지는 게 낫겠다 싶어 책장 쪽으로 향한다.)
셀 수 없이 많은 악보집들이 책장 가득 어깨과 어깨를 맞댄 채 꽂혀 있습니다.
어느 한 권 빠짐 없이 세월의 흔적이 누렇게 껴있습니다.
걷어내지 못한 먼지가 얕게 쌓여 있기도 하고, 모서리가 찢어진 악보집이 보이기도 합니다.
아무래도 종이는 관리하기 힘드니까요.
차소희:(몇 권 꺼내 본다. 이 쪽은 쇼팽 발라드, 그 아래는 바흐 평균율…… 피아노 기본인 체르니와 하농, 바이올린 시작인 스즈키 악보집도 보인다. 와. 얼마동안 안 팔린 거야? 딱히 악보집을 살 마음은 없지만. 도대체 얼마나 오래된 걸까. 악보를 다시 원래 자리에 꽂아두고 카운터 쪽으로 발을 옮긴다.)
팔꿈치를 올린채 턱을 괴고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악기상 주인의 모습이 보입니다.
카운터 위에는 낡아빠진 아날로그 시계라디오가 올라와 있고, 그 옆에 읽다만 신문이 놓여 있네요.
차소희:(읽다 만 신문에 눈이 간다. 아저씨한테 얼마나 오래됐는지 여쭤보고 싶었는데, 딱히 잘 자는 사람 깨우고 싶지는 않다.)
잘 알려진 신문사의 주간 신문입니다만, …자세히 살펴보면 최신호가 아니라 몇 주 전에 발행된 신문입니다.
차소희, 지능 판정.
차소희: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기사 날짜를 재차 살피니 이 신문은 3주 전에 인쇄된 호입니다.
'지난주'가 덧붙어 있는 것을 미루어 유추하건대 그 매혹적이라는 B씨의 연주는 대략 한 달 전에 콘서트로 진행되었던 모양이에요.
어쩐지 묘한 기분이 듭니다.
혹은 위화감이거나 어떤 감이 작용하며 드는 느낌일 지도 모르고요.
한 달 전이라면… 지금 유행 중인 정체불명의 전염병이 최초로 전파되었던 시기와 맞아 떨어집니다.
게다가 콘서트가 있었던 예술의 전당 위치가 A시라고요?
A시라면 분명….
유행성 전염병이 시작된 곳입니다.
차소희:(조금, 소름이 끼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렇지만 이런 생각을 해봤자 평범한 음모론으로 취급받겠지. 지금 세계를 뒤덮은 유행성 전염병이 전염되는 경로가 음악이라니. 말도 안 된다. 애초에 병은 이런 경로로 전염되지 않으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조금, 소름돋긴 하네. 에어컨 때문인지 팔에 살짝 올라온 닭살을 문지르며 라디오를 본다.)
척 보기에도 만들어진지 기십 년은 되어 보이는 오래된 라디오. 노이즈 낀 저음질의 클래식이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차소희:(아는 곡인 것 같은데, 무슨 노래더라. 특별할 건 없어 보이는 라디오에서 곧 눈을 뗀다. 아날로그 시계에 시선이 멈춘다.)
골동품 가게에서 주워올 법한 연식의 오래된 아날로그 시계입니다.
시계약은 꼬박꼬박 잘 갈아주고 있는 모양인지 세 개의 침은 별 무리없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김래빈:소희야.
차소희:응. 볼 일은 다 봤어? (당신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김래빈:으응. 아무래도 찾는 게 지금 여기 없나 봐. 팔리지는 않았을텐데, 이상하네…. (조금 시무룩한 기색이다. 의아함이 얼굴에 가득하다.)
악기상 문을 열고 나오니 어느덧 땅거미가 지고 있는 시간입니다.
귀갓길과 광장
짙은 땅거미가 아스팔트와 돌바닥을 기기 시작한 저녁과 밤, 그 사이의 애매한 시간.
소등되어 있던 가로등의 불빛이 하나씩 점등하며 온전히 어두워지진 않은 길을 비춥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이후 도시는 저녁시간대 특유의 활기를 잃은지 오랩니다.
악기상에서 나온 두 사람은 귀갓길에 광장에 놓인 낡은 피아노 한 대를 발견하게 됩니다.
래빈은 마치 홀린 사람처럼 피아노를 향해 다가섭니다.
낡디 낡아 의자에 앉는 사람도, 건반에 손을 대는 사람도, 하다못해 눈길을 주는 사람도 없이 분수대 맞은 편에 그저 장식물처럼 배치되어 있는 나무 피아노입니다.
김래빈:이 피아노가 여기 있었구나…. (손끝으로 건반을 쓸어내린다. 어쩐지 애틋한 기색이다.)
차소희, 정신력 판정.
차소희: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20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세상의 오류와 같은 현상, 다시 한 번 어쩐지 모를 데자뷰 현상에 사로잡힙니다.
이 장면, 어디선가 분명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꿈에서일까요?
차소희, 이성 판정.
차소희:
SAN Roll
기준치: 59/29/11
굴림: 17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이성 감소 없음.
차소희:(데자뷰라니. 과거에 이런 일을 겪은 적이 있던가? 이 낡은 피아노에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어쩐지 그리운 느낌이 들어서……. 멍하게 서서 그 모습을 본다. 이상하지. 아주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던 것 같아. 피아노를 치던 과거를 떠올린다. 즐거웠지. 그렇지만 지금은? 피아노를 치지 않는 지금은… 즐거운가? 피아노를 치면 다시 즐거워질까? 가볍게 뭐라도 연주해보고 싶은 기분이 든다. 지금이라면 누가 시키지 않아도, 콩쿨이 없더라도, 단지 즐거움만으로 연주할 수 있을 것 같아.)
극복 Roll
기준치: 100/50/20
굴림: 88
판정결과: Regular
어쩐지, 건반 위에 손가락을 올려두는 일이 더는 두렵지 않을 것 같습니다.
김래빈:(피아노에 앉아 뚜껑을 열고, 녹음기를 꺼내 켜서 올려둔다. 건반 위에 손을 올리고, 연주를 시작한다.)
래빈이 연주를 시작하면 잰걸음을 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사람들의 이목이 광장의 피아노와 래빈에게 집중됩니다.
휴대폰을 들어 래빈이 연주하는 것을 촬영하거나 동영상으로 남기는 행인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보입니다.
그런 래빈의 연주를 바라보는 당신의 심정은 어떤가요?
당신도 언젠가 박수 갈채를 받으며 무대에 올랐던 적이 있을 터입니다.
해가 온전히 졌는데도 목구멍은 뜨겁고 살갗은 익어버릴듯 따갑습니다.
가로등의 적적한 불빛이 마치 스포트라이트처럼 광장을 밝힙니다.
그제야 깨닫게 된 것이 있습니다.
허름하고 볼품 없던 낡아 빠진 피아노일지라도 그 정도의 연약한 빛을 반사할 수는 있는 모양입니다….
차소희:(날씨는 여전히 덥고 습하다. 악기에게는 최악의 컨디션이지. 그렇지만 이런 날에도, 이렇게 낡은 피아노에서도 이런 반짝거리는 소리가 날 수 있다. 이 악기가 자아내는 소리만으로 행복할 수 있는 때가 있었다. 박수갈채가 없어도, 더 큰 곳으로 나아가지 못해도, 단순히 내 손으로 이런 아름다움을 자아낼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즐거웠던 때가 있었다. 누구에게 들려주지 않아도, 나에게 들려주기 위해 연주를 하던 때가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피아노가 너무 익숙해서 실력이 늘고 연습을 하는 그 모든 일이 지겨웠던 게 아니라, 서운했던 거라고. 더 넓은 무대로, 더 넓은 곳으로 나아가지 못했던 게 속상했던 거라고. 즐거움은 원래 있던 자리에 그대로 있었고, 외면하고 있었을 뿐이라는 사실을……. 이 연주가 끝나면 나도, 해볼까? 눈을 내리깐다. 고민되는 눈치.)
김래빈:(연주를 끝내자 일어서서 구경하던 사람들에게 꾸벅 인사를 한다. 가벼운 박수가 터져나온다. 익숙하게 사람들의 환호를 받고는 너를 돌아본다. 우두커니 서있는 너에게 서둘러 다가왔다.) 소희야.
차소희:나도 쳐 볼래. (말이 급하게 나왔다. 마법에 걸려 있다가 풀려난 것처럼. 연주하고 싶다는 느낌이 들었다. 3개월이나 연습하지 않아서 손이 굳었겠지만, 그래도 지금 확인하고 싶어.) 지금. 나도. ……들어줄 수 있어? (반짝이는 눈. 조급한 마음은 연주를 망친다지만 그래도.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느낌이 들어서.)
김래빈:… ! 응! (네 말에 놀란 듯 하더니 더없이 활짝 웃었다. 너와 피아노 사이를 막고있던 몸을 서둘러 비킨다.)
차소희:(즐거울까? 이전처럼 즐겁고 행복할 수 있을까? 눈을 내리깔고, 건반에 손을 올린다. 모차르트의 반짝반짝 작은 별 변주곡. 머릿속에 생각나는 곡은 그것뿐이다. 그러면 그것을 연주하면 된다. 즐겁게. 이전처럼…….)
오랜만이지만 당신의 손가락은 당신의 뜻대로 자유자재로 움직입니다.
차소희:(피아노는 이렇게 즐거운 거였지. 생각한다. 손이 굳어서 완전히 자유롭게 움직이지는 않지만, 그래도 원하는 만큼은 연주할 수 있다. 반짝반짝 작은별의 반짝이는 음색. 밤거리를 반짝거리는 별빛같은 음색이 메운다. 부드럽게 이어지는 스타카토의 속주. 몇 개 키를 잘못 쳐도 괜찮다. 완벽하지 않아도, 많은 사람이 들어주지 않아도. 일단 내가 즐겁잖아. 완전 엉망인데…… 그래도 즐거워. 순식간에 연주가 끝난다. 즐거워라……. 너무 즐거워서 어쩐지 울고 싶은 기분이야.)
김래빈:(네 연주가 끝나자 먼저 박수를 친다. 몇 번쯤 틀렸지만, 보통의 반짝반짝 작은 별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알아차리지 못했을 사소하고 작은 실수였다. 네 연주는 충분히 훌륭했다. 무엇보다 연주자의 즐거움이 무척이나 잘 전해졌으니까.)
래빈을 따라 몇몇 사람이 웃으며 박수를 치는 것이 들립니다.
차소희:(조금 상기된 얼굴로 래빈에게 다가간다. 박수소리도 들리지만, 이 즐거움을, 기쁨을 당신에게 전하고 싶었다.) 역시…… 즐거웠어. 연주 괜찮았지? 그치?
김래빈:응. 듣기 좋았어, 소희야. (환하게 웃으며 네 손을 덥석 잡는다.) 네가 계속 피아노를 전공하거나 하지 않더라도 좋아. 네가 즐겁다면.
부디 이 즐거움을 잊지 말아줘, 소희야.
차소희:(손이 잡히자 깜짝 놀란다. 갑자기? 손을? 이렇게? 얼굴이 더 빨개져서는 어쩔줄을 모른다. 피아노를 치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서운해서 그랬다는 걸 말해주고 싶지만… 그건 더 부끄럽다. 그것보다, 이 손 좀…!) 저기, 래빈아? 김래빈? 손 좀, 놔 줄래…?
둘이서 그렇게 손을 잡고 있자면, 주변에서 지켜보며 웅성거리는 듯한 기척이 납니다.
조금 창피할지도 모르겠네요. 도망칠까요?
차소희:(아무래도 연인으로 오해받는 거 같은데, 도망치고 싶다. 진짜로. 냅다 잡힌 손을 마주잡고 역 쪽으로 달려간다.)
둘이서 그렇게 한참을 뛰어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당신이 타야하는 버스가 다가오는 것이 보입니다.
다급히 달려가는 당신의 뒤로, 래빈이 손을 크게 흔들며 인사합니다.
김래빈:내일 학교에서 봐!
차소희:응! 내일 봐! (냅다 인사하고 버스에 올라탄다. 얼굴이 얼마나 빨개져있을지 생각하니 조금 부끄러운 기분.)
며칠 뒤 아침
그로부터 며칠 뒤, 아침.
숨통을 불사르는 듯한 무더위와 함께 잠에서 깨어나면 휴대폰에 맞춰두었던 알람이 당신을 보채고 있습니다.
삐비비빅. 삐비비빅. 삐비비빅.
정신사나운 벨소리는 한참이고 이어집니다.
오전 댓바람부터 머리가 띵한 것이… 밤새 열대야에 시달렸는지도 모릅니다.
등교 준비를 끝마치고 집 바깥으로 나서기 직전 당신은 끄지 않은 채로 잊고 있었던 TV에서 흘러나오는 뉴스 소리를 듣게 됩니다.
퍽 익숙한 아나운서의 목소리네요.
정체불명의 전염성 질병에 대한 속보를 다루기 위해 신설 편성되었다던 그 코너임이 분명합니다.
차소희, 듣기 판정.
차소희:
듣기
기준치: 70/35/14
굴림: 63
판정결과: Regular
"…발표된 통계에 따르면, 정체불명의 전염성 열병에 감염된 환자의 수가 전세계 인구의 25%를 넘어섰다고 합니다. 시민들의 불안감은 날로 달로 급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최근 전세계 곳곳에서 공통적인 기현상이 발생, 목격되고 있습니다. 증언은 일체 미열에 시달리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서 비롯되었는데요, 환자들은 하나같이 여름철의 짙은 오존 냄새에 대한 불만을 터뜨리면서도 '밤 하늘에 별들이 수도 없이 많이 떠있는 것이 기이하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다고 합니다. 모 대학병원 의료진은 질병 감염에 따른 환각 증세의 가능성을… 다음 속보입니다…."
학교로 향하면 래빈의 자리가 비어 있습니다.
차소희:(의아한 얼굴로 래빈의 자리를 쳐다본다. 친해진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혹은 나 자신만 친하다고 생각하는 것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안 나오니까 신경 쓰이네. 래빈과 자주 말을 섞곤 하던 c반 남자애에게 다가가 질문한다.) 김래빈 오늘 레슨날이야? (냅다 이렇게 물으면 이상하게 여기려나. 말을 하고 나서 생각이 나는 건 뭐람.)
C반 학생: 응? 김래빈? 글쎄… 레슨 얘기 하는 건 못 들어봤는데.
차소희:그래? 매일 아침 일찍 나오길래. (왜 신경쓰는지 궁금하면 어떡하지. 조금 부끄럽지만 뻔뻔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C반 학생: 그러게, 왜 아직 안 왔지? 걔 맨날 오면 있던데.
남학생은 이내 관심을 잃었는지, 아직 제출하지 않은 핸드폰을 만집니다.
차소희:(괜히 신경쓰인단 말이지. 레슨 가는 날도 아니고, 늦잠 자는 성격으로는 안 보이던데. 왜 학교에 안 나온 거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오만 생각이 다 든다. 연락 좀 해 주면 안 되나? 생각하다가 래빈에게 핸드폰 번호를 가르쳐주지 않았다는 사실을 떠올린다. …그래도 카톡은 알 거 아냐! 짜증스럽게 생각했다가 제가 신경쓸 바 아니라는 생각에 이윽고 고개를 젓는다.)
래빈은 결국 조례시간이 끝날 때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차소희:(결국 아침 조례를 마치고 나가는 C반 담임을 붙잡고 질문한다.) 쌤. 김래빈…… (뭐라고 질문해야 하지? 순간 멍해져 입을 다물었다.) 오늘 학교 안 온대요? (나온 건 초등학생 수준의 어휘. 좀 부끄럽다.)
담임 선생님: 김래빈? 래빈이… 래빈이도 유행하는 전염성 열병 때문에 병결일 거다.
차소희:아. 그렇구나…… 애들 많이 빠졌네요. (고개를 끄덕이고 제 자리로 돌아간다. 얼굴이 괜히 빨개져 있다.)
그러고보니 두 반이 묶인 뒤로부터 서넛의 아이들이 병결 처리 되었습니다.
메꿔두었던 책상은 다시금 주인을 잃고 방치되길 반복합니다.
당신은 자꾸만 신경이 쓰이고 가슴이 조일 듯 답답해집니다.
지난 며칠간 당신과 래빈은 질릴만치 붙어 다니며 시간을 공유했습니다.
그래서일지 몰라요.
그게 아니라면 스스로에게 어떻게 설명해야할지 잘 모르겠습니다.
방과후
하교를 알리는 묵직한 종례음과 함께, 번쩍! 마치 스위치를 올리듯 분산되어 있던 정신이 한 자리에서 맞붙었습니다.
뒤늦게 주변을 둘러보면 책가방을 싼 아이들이 교실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모습이 들어옵니다.
어느틈에 종례가 이루어졌는지 모르겠습니다.
오늘 하루종일 좀처럼 수업에 집중하지 못했습니다.
학교가 파했으니 집으로 귀가해야겠죠.
차소희:(집으로 가긴 해야겠는데, 오늘은 뭐하지. 이 생각부터 든다. 집에 가서, 뭘 하지? 며칠 전에 피아노 쳤을 때, 정말 재밌었는데… 피아노 연습할까. 멍하게 생각하며 천천히 가방을 싼다.)
가방을 싸서 자리에서 일어선 당신은 교실 바깥으로 나가기 직전, 어쩐지 모를 기묘한 이끌림에 힘입어 래빈의 책상 쪽으로 시선을 기울입니다.
때마침 덜 닫힌 창문 가장자리에 불어온 오후의 설익은 바람에 가슴이 뻐근해졌습니다.
아무것도 올라오지 않은 건조한 1인용의 책걸상. 비어 있는 가방 걸이, 사물함 아래 가지런히 모여있는 교과서… 가장자리에 [C반, 김래빈]라고 적혀있는 코팅된 시간표까지.
기스 하나 남아 있지 않은 책상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전에 없던 기이한 감각마저 솟아나는 것입니다.
어제는 분명 이 자리에 책상 주인이 앉아 있었는데, 오늘은 하루종일 비어 있었습니다.
그 덧없는 사실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던 그때.
차소희, 관찰 판정.
차소희: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60
판정결과: Regular
널빤지처럼 납작하고 어두운 책상 사물함 속, 켜켜이 정돈된 교과서 사이로부터 빼꼼 튀어나와 있는 찢어진 작은 종잇조각을 발견합니다.
잘 닦인 도자기처럼 맨질거리는 종이를 손에 쥔 당신은 전에 없던 확신을 느낄 지도 모릅니다.
이 종이는 마치 단서처럼, 단조롭고 평화롭기 짝이 없는 교실의 풍경 속 우뚝 솟아난 돌부리처럼 당신의 눈에 걸리고 말았으니까.
마치 결국에는 이 쪽지를 발견할 줄 알았다는 것처럼 그 자리에 놓여 있었으니까.
그래서 당신은 기꺼이 걸려 넘어져버리고 말았으니까.
차소희:(쪽지를 펼쳐서 내용을 읽어본다.)
어떤 위치를 가리키는 주소와 약도가 그려져있습니다.
눈에 익은 글씨체만으로도 머리통에 자연스레 그려지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이 장소는 의심할 여지 없이 며칠 전 래빈과 함께 방문했던 그 악기상이 틀림 없습니다.
차소희:(이 주소가 가리키는 건… 그 악기상에 정말 뭔가 있는 건가? 우연에 우연이 겹쳐서 무언가의 흐름을 만들어낸 느낌이다. 집에 가기 전에 그 악기상으로 가 보기로 한다.)
끊임없이 기억을 더듬거나 헤매다보면 당신은 일전에 함께 방문했던 악기상 앞에 도달합니다.
악기상 출입구에는 희끄무레하게 바래어 페인트칠이 벗겨진 '임시 휴업' 팻말이 걸려 있습니다.
당신은 새파란 싹이 이름 모를 들꽃이나 잡초들과 뒤섞여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는 울타리 근처를 서성입니다.
뭔가 더 없을까, 하고 쪽지를 다시 살펴보면, 귀퉁이에 무언가 더 적혀있습니다.
차소희:……반드시 돌아와야 할 장소……. (입술을 깨문다. 그런 게 뭐가 있을까. 교복 주머니를 뒤져보면 명찰이 있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교복 명찰이 그런, 소중한 것이 될 수 있을까. 그렇지만 그것 외에는 잘 모르겠다. 악기상 울타리 쪽을 더 살펴본다.)
미련을 떨치지 못한 당신의 눈에 들어온 것은 악기상 바깥쪽의 자그맣게 무너진 울타리입니다.
그 사이로 어떤 계절의 매미 우는 소리가 이어집니다.
좁다란 공간은 마치 언젠가의 비밀스러운 길이 닦였다가 무산된 것 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틈새를 들여다 보거나 몸을 구겨본다면 간신히 이동할 수 있을법한 샛길이 보이네요.
차소희:(몸을 움츠리고 샛길 사이로 들어간다.)
비밀의 장소로 인도하는양 샛길을 타고 악기상 건물 외벽의 바깥 쪽을 타고 둘러 이동하다 보면, 당신은 나무가 부자연스럽게 우거진 공터를 발견합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풀벌레 우는 소리만 선명합니다.
이곳에 사람의 흔적은 거의 느껴지지 않습니다.
다만… 메마른 흙바닥의 정가운데 뻥 뚫린 싱크홀이 나있는 것만큼은 예삿 일이 아닌 것 같군요.
구멍의 가장자리는 마치 녹은 것처럼 보이며, 비정상적으로 일렁이고 있습니다.
이론적으로 존재하는 웜홀이라는 미지의 공간이 발치 아래 투영된 듯 합니다.
차소희, 이성 판정.
차소희:
SAN Roll
기준치: 59/29/11
굴림: 9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이성 1 감소.
이 구멍은 곧 시간의 왜곡. 3년 후의 미래와 그 미래의 과거 격이 되는 3년 전의 현재를 잇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38도를 웃도는 축축한 여름임에도 모골이 송연해집니다.
당신은 유사 이전의 세상에 인간이 최초로 빚어졌을 당시 하나의 재료처럼 장기 곳곳에 새겨져 있었던 본능으로 말미암아 어떤 메시지를 전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이 구멍에 뛰어들어야 해!
당신은 마치 정해진 운명처럼 이곳에 도착했습니다.
어쩌면 결국 이곳에 다다르기 위해 스스로 모르는 사이 오래도록 방황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구덩이를 살피면 마치 하늘을 반사한 물이라도 투영하듯 희미한 빛이 텅 빈 공간을 떠돌고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깊어 보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근방에선 강렬한 여름의 오존 냄새가 풍깁니다.
비릿하기도 하면서 싱그럽기도 한 특유의….
시간의 왜곡에 뛰어들기를 결정했다면 더 지체할 이유는 없습니다.
차소희:(이게 뭔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뛰어들어야겠다는 느낌이 들었다면 지체할 필요는 없다. 느낌 따라 행동하는 건 위험하다지만, 그래도, 그래도…… 해야만 한다는 기분이 들었다. 구멍에 뛰어든다.)
언젠가의 과거에서 래빈이 그러했듯 모든 준비를 끝마친 당신이 구멍 속으로 몸을 내던집니다.
찰나에 당신은 온 몸을 거스를듯 피부를 긁어대는 어떤 비인간적인 손길을 느낍니다.
전에 느껴본 적 없던 외계의 에너지가 강압적으로 몸을 잡아 당기는 듯한 감각이었습니다.
…어떤 미래?
…깜빡. 깜빡, 깜빡.
소용돌이치는 왜곡 속을 맨발로 건너온 듯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맞게 도착한 걸까요?
정신을 차리고 주변을 둘러보면 당신은 꽤 깊은 구덩이 안에 있습니다.
깊은 구멍 안에 머물고 있는 탓에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면 꼭 천장같은 푸른 색의 하늘이 원형으로 오려져 있습니다.
차소희:(멍… 위를 올려다본다. 이거, 올라가야 하는 거겠지…? 올라가기 힘들어 보이긴 한데.)
차소희, 오르기 혹은 근력 판정.
차소희:
근력
기준치: 50/25/10
굴림: 35
판정결과: Regular
벽을 잡고 올라가려 시도해보지만, 손톱에 흙이 파고드는 감각과 함께 구멍 속으로 나동그라집니다.
차소희, 체력 1 감소.
차소희:(포기하지 않고 다시 올라간다.)
근력
기준치: 50/25/10
굴림: 77
판정결과: 실패
차소희, 오르기 혹은 근력 판정.
차소희:(한번 더....)
차소희, 오르기 혹은 근력 판정.
차소희:
근력
기준치: 50/25/10
굴림: 55
판정결과: 실패
(아오. 내가 올라가고 만다.)
극복 Roll
기준치: 100/50/20
굴림: 75
판정결과: Regular
당신은 아둥바둥 발버둥쳐 간신히 구덩이를 빠져나왔습니다.
차소희, 체력 2 감소.
근처를 살피면 구덩이에 뛰어들기 전에 보았던 그 공터입니다.
장소는 그대로인데 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사뭇 다릅니다.
이리저리 우거져있던 나무가 바싹 말라 타고 남은 잿더미처럼 바닥을 장악하고 있고, 맞은 편에 보이는 악기상의 벽면은 부식되어 이질적인 감상을 더합니다.
오랜 세월동안 전혀 관리되지 않은 것 처럼 보이는군요.
공터에서 빠져나오면 악기상 입구에 다다릅니다.
길게 뻗은 아스팔트 도로나 굴곡진 모퉁이를 돌아보아도 지나다니는 사람 하나 발견할 수 없습니다.
공간 자체가 마치 노이즈낀 흑백 필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길로, 어떤 장소로 향하든 일말의 생명력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그저 전깃줄 위에 앉아 지저귀는 새들의 목소리나 나무에 달라붙어 노래하는 매미의 우짖음만이 공허한 하늘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악기상을 살피면 녹슨 초인종이 달린 문은 걸쇠가 고장나 살짝 열려 있습니다.
직전에 보았던 '임시 휴업'팻말은 문간에 그대로 걸려 있습니다.
'임시', '휴업', 하고 반으로 쪼개져 덜렁거리는 탓에 다소 음산한 기운을 더하고 있습니다.
닦지 않아 희뿌연 통유리 너머로 진열된 악기는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저 다 낡아가는 피아노 한 대만이 전시되어 있을 따름입니다.
차소희, 지능 혹은 관찰 판정.
차소희:
관찰력
기준치: 60/30/12
굴림: 13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어쩐지 눈에 익은 피아노에 마음을 사로잡혔습니다.
자세히 살피지 않아도 '아' 싶은 구석이 있는 모양새인 겁니다.
이 피아노는… 며칠 전 래빈과 함께 광장을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보았던 예의 그 피아노입니다.
다 낡아 볼품 없어진 악기에 싸구려 페인트 칠을 해 디스플레이용 구색만을 갖추고 있었던 그 피아노.
당신이 알기로 이 피아노는 분명 광장에 배치되어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악기상이 출처였던 모양입니다.
이후 길거리를 재차 둘러보지만 역시나 사람은 커녕 개미 한마리 보이지 않는 공간입니다.
휴대폰 액정을 확인하면 시계도 캘린더도 먹통입니다.
악기상을 둘러보는 수밖에 없겠네요.
차소희:(눈살을 찌푸리며 악기상 문을 연다.)
악기상
들어서면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맞은편에 자리하고 있는 카운터입니다.
좌석에 앉아 악기상을 지키고 있던 가게 주인은 온데간데 없습니다.
목재 구조의 악기상 내부는 텁텁하고 간지러운 먼지 냄새가 납니다.
어디에서도 악기는 찾아볼 수 없지만 벽면 가득 들어찬 거대한 책장은 그대로네요.
차소희:(일단 카운터를 둘러본다. 가까운 곳부터 찾아보기.)
쓸쓸한 카운터 위에는 다소 눈에 익은 물건들이 주인을 잃고 방치되어 있습니다.
아날로그 시계라디오에 먼지가 그득 쌓여 있습니다.
차소희:(일단 시간부터 확인해야겠지. 아날로그 시계를 쳐다본다.)
먼지 쌓인 아날로그 시계를 들여다봅니다.
약이 거의 다 되어가는 모양인지 세 개의 침이 얼마 남지 않은 수명을 그러모아 간신히 뜀박질 하고 있습니다.
하나 부자연스러운 점은 바늘들이 하나같이 거꾸로 돌아가고 있다는 점입니다.
본래 공전해야 할 궤도를 떠나지 못한 채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일련의 반복된 패턴에 기이한 느낌이 듭니다.
차소희, 이성 판정.
차소희:
SAN Roll
기준치: 58/29/11
굴림: 74
판정결과: 실패
이성 1 감소.
차소희:(이게 뭐지? … 멍청한 얼굴로 시계를 쳐다보다 라디오로 시선을 돌린다.)
치직… 치지지직… 완전히 고장나버렸는지 탁한 백색소음을 흩뿌리고 있습니다.
주파를 맞춰보고 툭툭 두드려도 보지만 고쳐질 기미는 보이지 않습니다.
차소희, 기계수리 판정.
차소희:
기계수리
기준치: 25/12/5
굴림: 99
판정결과: 대실패
기계수리
기준치: 25/12/5
굴림: 14
판정결과: Regular
라디오에서 눈을 돌리면 그제야 희미한 진행자의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칙, 치지직… 괴 전염병으로 인한 고열에 시달리다 사망한 인구가 전체 인류의 70%에 육박했습니다. 사회는 완전히 마비되었습니다… 치직, …그 누구도 미래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이대로 인류는 역사에서 잊혀지게 될 것입니다. 한편 그간 주목받지 못했던 오컬트 학자들이 내놓은 새로운 가설이 이목을 끌고 있습니다. 전염병이 어떤 경로로 감염되어 인체에 해를 끼치는지, 보편적이지 않은 경로로 추적을 이어오던 그들은 전 지구를 장악한 미지의 전염병이 사실은 어떤 저주이며, 감염 경로가 특이하게도 '음악'일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만약 어떤 저주받은 곡으로 인하여 전염병이 창궐하였다면, 이 광기어린 저주를 세상에 퍼뜨린 원인이 되는 곡의 악보를 태우는 방법만이 존속과 멸망을 결정지을 유일한 수단이라고… 치직…"
차소희:(음악? 며칠 전에 떠올렸던 음모론을 생각한다. 그게 진짜였단 말이야?! 그런데, 그 악보는 지금 어디에 있는데? 나는 뭘 해야 하고? 당황하여 뒤로 물러선다. 심호흡을 하고 나가려는데 책장이 눈에 밟힌다. 책장을 관찰한다.)
도둑 맞았는지 듬성듬성 비어있긴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셀 수 없이 많은 악보집들이 책장 가득 꽂혀 있습니다.
걷어내지 못한 먼지는 더욱 무거워졌고, 제대로 자리잡지 못해 절반쯤 튀어나와 있는 책자도 여럿 보입니다.
불현듯 떠올립니다.
피아노를 그만둔 뒤 악보를 어떻게 관리해왔더라, 하고.
그래서 더 살필 만한 건 없나? 살피면 책장 모서리에 전에 보지 못했던 달력하나가 박힌 못 위로 장식물처럼 걸려 있음을 발견합니다.
차소희:(달력? 달력에 시선이 간다. 올해는……)
달력은 7월에 펼쳐져 있습니다.
덩그러니 매달려 있는 몸통만한 달력을 쳐다보던 당신은 달력 어귀에 적혀있던 올해의 년도를 발견합니다.
그곳에는 큼지막한 네 개의 숫자로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2024년.
차소희, 지능 판정.
차소희: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72
판정결과: 실패
세상의 오류를 알리듯 거꾸로 돌아가는 아날로그 시계와, 당신이 살던 현재로부터 조금 동떨어진 세월의 흐름을 가리키는 달력.
길거리에는 사람 하나 오가지 않고 시야는 마치 흑백필름을 끼워 넣은 것처럼 생기 없었습니다.
미지의 구멍, 그곳에 마치 운명같은 이끌림을 얻어 겁없이 뛰어든 당신.
눈치챕니다. 이곳은 전에 살던 2021년의 시간선이 아닙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을 겪은 당신, 이성 판정.
차소희:
SAN Roll
기준치: 57/28/11
굴림: 82
판정결과: 실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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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 3 감소.
차소희:(조금 놀라긴 했지만, 아니, 사실은 많이 놀라서 도망치듯 악기상 바깥으로 빠져나온다. 이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악기상을 열고 나오면, 끝없는 열기에 데워진 아스팔트가 일렁이는 건너편 골목에서 누군가의 인영이 다가오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 실루엣을 바라보고 있자면 얼마 지나지 않아 익숙한 목소리가 당신을 반깁니다.
김래빈:한참 찾았어, 소희야. 몸은 괜찮아?
래빈입니다.
차소희:……몸? (의아한 얼굴을 하다 순간 깨닫는다. 이 김래빈이 찾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미래의 차소희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눈만 깜박인다.)
대답을 바라고 건넨 말은 아니었는지
김래빈:있잖아, 소희야. 내가… 과거로 가서 너를 만나고 올게. 생각해봤는데, 문제 없을 것 같아. 네가 정말 피아노 치는 것을 싫어했더라면 이 악기상에 찾아오지도 않았을 것 같아.
혼잣말을 덧붙입니다.
래빈의 품에는 악보가 들려 있습니다.
이른 아침의 교실, 책상 위에 올라와있던 래빈의 가방 사이에서 보았던 그 악보집이 틀림 없습니다.
이 악보는 <여름의 유령>악보입니다.
그 말을 남긴 래빈은 마치 모든 결정과 준비를 끝마친 사람처럼, 미련 없이 당신을 지나쳐 악보를 들고 깊고 커다란 구멍에 뛰어듭니다.
차소희:네가 그걸… 어떻게…… (어떻게 알았어? 하고 질문하려 했지만, 그는 사라져버린다. 그가 있던 자리를, 자신이 기어올라온 구멍을 멍하게 쳐다본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습니다.
당신이 다시 정신을 차리면 2023년에 묶여있던 몸은 다시금 2021년의 악기상 앞에 서있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래빈은 보이지 않고, 한가로운 골목길을 누비는 어린 아이들이 종종 눈에 들어옵니다.
주머니의 명찰을 확인해 보면, 두 동강이 나 있습니다. 멀쩡했는데요.
악기상 유리창 너머의 아날로그 시계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정갈하게 돌아갑니다.
휴대폰 캘린더를 펼쳐 살펴도 달력은 올바른 날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꿈이라도 꾼 걸까요?
단지 꿈이라는 한 단어로 축약하기에 보고 듣고 겪었던 모든 것들이 지나치게 현실적이었습니다.
차소희:(인상을 찡그린다. 꿈은, 아니었을 텐데. 그런데도 차라리 꿈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이게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두동강 난 명찰을 쳐다본다. 매미 우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온다. 그럼,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지능
기준치: 70/35/14
굴림: 69
판정결과: Regular
문득 당신의 머릿속을 스치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광기어린 저주를 세상에 퍼뜨린 원인이 되는 곡의 악보를 태우는 방법만이 존속과 멸망을 결정지을 유일한 수단'
차소희:(악보를, 태워야 해. 그 악보를……. 그 악보, 래빈이 가지고 있었던 그 악보는…… 생각해야 해. 기억을 되짚어 보면 한 가지 떠오르는 게 있다. 래빈이 악보를 쓸어담아 학교 음악실 의자에 대충 넣던 장면. 그 안에 있을까? 그 안에 '그 악보'가 있든 없든, 일단 찾으러 가 보긴 해야 한다.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한다.)
밤의 음악실
어느덧 저녁이 쏟아지고 밤으로 물들 시간이 찾아왔습니다.
학교로 향하는 내내 무거운 습기가 발목을 잡는듯 합니다.
한밤중의 여름은 습하니까요.
매년 이맘때쯤 장마전선이 북상하고는 했으니, 시간이 부지런히 흐른다면 며칠 안 있어 많은 비가 쏟아질 터입니다.
당신은 목적지로 향하던 도중 몇가지 기현상을 목격할 수 있습니다.
전봇대를 붙잡은채 119에 고열의 두통을 호소하다 잠들듯 바닥에 쓰러진 환자의 주위를 지나가던 사람이 일으켜 세우는 한편, 급히 출동하던 앰뷸런스가 어느 사거리에서 승용차와 부딪히는 등의 사고가 잇따라 발생합니다.
불가해하기 짝이 없는 세상의 불균형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왜 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을까요?
하늘을 올려다보면 소름끼칠만큼 많은 별의 형상이 아른거립니다.
학교에 도착해 음악실로 향하면 정해져 있는 수순처럼 열려 있는 문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닫히지 않은 창문 틈새로 불어오는 바람의 유영에 빼곡히 덮인 커튼이 의지를 가진 생물처럼 하늘댑니다.
차소희:(소름끼쳐……. 일단 음악실의 불을 켜고 음악실 안으로 들어간다. 두려움 같은 거, 잘 가지지 않는데 어쩐지 소름이 돋는다. 냅다 달려가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연다.)
피아노 의자 뚜껑을 열면 수납서랍 한구석에 보관되어 있는 오래된 낡은 악보집 하나가 눈에 띕니다.
차소희, 교육 판정.
차소희:
교육
기준치: 50/25/10
굴림: 18
판정결과: 어려운 성공
당신은 악보의 제목을 읽어냅니다.
<겨울이 흘린 눈물>입니다.
당신은 낡아빠진 악보집 어귀에 자리하고 있는 어떤 징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차소희, 정신력 판정.
차소희:
정신
기준치: 70/35/14
굴림: 7
판정결과: 극단적 성공
그래요, 그 때, 쏟았던 악보집들 사이에 미운오리새끼처럼 섞여있던 그 악보집에도 이런 그림이 박혀 있었습니다.
조악하게 본떠 넣은 듯 형편 없는 문양은 은은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차소희:이걸, 불태워야 한다고 했었지…… (어떻게 불태우면 좋을까. 생각하다 학교 소각장에 생각이 미친다. 소각장에 가면 태울 수 있겠지? 편의점에 가서 라이터를 사야 하나? 바보같은 생각을 하다 일단 음악실 밖으로 향한다.)
서둘러 음악실 밖으로 나서는 당신을 강한 힘이 잡아챕니다.
김래빈:차소희!!!
내가 밤에는 음악실에 오지 말라고 했잖아!
얼굴을 확인하면 아니나다를까 결석했던 래빈입니다.
그답지 않게 매서운 불호령이 떨어집니다만, 그조차도 당신이 들고 있는 악보집을 확인하거든 빠르게 누그러듭니다.
얼굴에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합니다.
그런데…… 당신의 팔을 잡은 손이 너무 뜨겁습니다. 정상체온은 진작에 넘은 것 같아요.
래빈의 몸은 불 위에 올려둔 물처럼 펄펄 끓고 있습니다.
이 상태로 쭉 당신을 찾아 헤매고 있던 걸까요?
차소희:너 아프다며?! (체온을 확인하고 더 놀란다.) 아니, 지금도 아프잖아. 안 쉬고 뭐하는 거야? (화는 이 쪽이 내야 하는데 왜 적반하장으로 구는지. 화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본다.)
김래빈:위험하다고 했잖아. 꼭 이 밤에 여길 와야했어? (너를 음악실에서 멀리로 데려가며 타이른다.) 안 그래도 찾아가려고 했어.
할 얘기가 있었거든…. 컨디션이 조금 안 좋아서, 늦었지만….
차소희:유령이 나온다는 말을 누가 믿어. 내가 앤 줄 알아? (짜증스럽게 소리친다. 아픈 애한테 이렇게 화내면 안 되는데. 그래도. 아프다는 말에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질문한다.) …할 얘기란 게 뭐야?
김래빈:일단 여기서 벗어나서 얘기하자. (불안한 눈치로 음악실을 힐끔 쳐다본다.) 집에 데려다줄게.
차소희:(얘 왜 이래. 의아한 듯 그를 쳐다보다 말한다.) 소각장에서 할 거 있어. 소각장 들렀다 가자. ……너 라이터 있어?
김래빈:
기준치: 35/17/7
굴림: 24
판정결과: Regular
아, 응. 꼭 라이터여야 하는 게 아니라면. (주섬주섬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낸다.)
차소희:(담배 피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데 주머니에서 성냥이 나온 게 신기한 듯 당신을 바라본다. 주머니에서 라이터도 아니고 성냥이 나오다니, 얘도 참 특이하다. 이런 생각을. 원래 성냥 같은 게 고등학생이 들고다니는 물건은 아니니까. 들고 있는 악보집을 흔들며 말했다.) 이거, 태워야 한대. 학교 소각장이면 불장난 쳐도 안 들키지 않을까 싶어서.
김래빈:음, 소각장이 안전하긴 할 것 같아. (라이터는 오해받을 수 있다며 다같이 샀던 성냥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무심결에 네 손을 잡고 소각장으로 발을 떼었다. 열이 끓어 정신이 없는 순간, 이런저런 생각보다도 앞선 것은 습관이었다.)
차소희:(……어, 엇? 당황스러워서 굳는다. 손을 잡아오는 행동이 너무나도 자연스러워서 한 번, 한여름 달궈진 아스팔트 길처럼 뜨거운 체온에 한 번 놀랐다. 엉겁결에 손을 잡힌 채 끌려가긴 하는데, 얘 진짜 뭐야? 여자애들이 오해하기 딱 좋은 행동들이다. 나중에 이것에 대해서는 한번 말해야겠다. 그리 생각하며 걷는다. 소각장에 도착해 바닥에 악보들을 놓고 손을 내민다.) 줘. 성냥.
김래빈:(얌전히 네게 성냥을 건네준다.) 있잖아, 소희야.
차소희:응? (성냥에 불을 붙인다. 불이 강한 빛을 내며 화르륵 타올랐다가 줄어든다. 어느덧 적당한 크기로 줄어든 불꽃에 성냥을 악보에 던졌다. 피아노 치는 사람의 손은 소중하니까, 뜨거운 거 오래 쥐고 있으면 안 돼.)
김래빈:(악보에 불이 붙는다. 타들어가는 걸 가만히 바라보다 네게로 시선을 돌렸다.) 뜬금 없을지도 모르지만… 과학 숙제 이야기야. 선생님이 미래에서 건너온 사람이 과거의 역사를 바꿀 수 있을지에 대해 물어보셨잖아.
넌 어떻게 생각해?
차소희:(갑작스러운 질문에 당신을 빤히 본다. 과학 숙제라. 솔직히 말하자면 잊고 있었다. 선생님이 그런 말을 하셨던가. 몰라, 그렇지만 얘가 말했으니 맞겠지. 나보다는 수업 열심히 들으니까.) 음,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어떻게 될까 궁금하긴 해. 미래에서 온 사람이 과거의 역사를 바꾸면, 그 사람이 이제껏 살아온 역사는 어떻게 될까. 그런 것 있잖아. 지구 반대편에서 분 나비의 날개짓이 폭풍을 일으킨다는 거. 일단 그 사람이 과거로 넘어온 시점부터 이미 세계의 미래는 그 사람이 알던 미래와 달라질 거라고 생각해. 당연히 바뀌게 되는 거야.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되느냐'의 문제라면, 역시 잘 모르겠어. 그치만 있잖아…… (잠시 생각하더니)
그래도 되니까 그럴 수 있게 만들어놓은 것 아니겠어? (웃는다.) 신이 선악과를 굳이 만든 이유가 뭐겠어…….
(말을 마치지 못하고 쪼그려 앉는다. 타들어가는 악보를 바라보다가 중얼거린다.) 근데, 그게 중요할까? 난 잘 모르겠다. 오히려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묻고 싶은데. 바꿀 수 있나? 바꿔도 되나? 에 대해서.
김래빈:(네 옆에 웅크려앉아, 무릎에 팔을 접어 얹고 그 위로 고개를 올려 너를 바라본다. 희미한 웃음이 얼굴에 번져있다.) 나는… 만약 미래가 바뀐다면, 굳이 만든 선악과에 누군가 손을 댄다면 말이야.
그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생각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만이, 미래를 바꿀 수 있어.
그렇게 속삭이는 래빈의 목소리는 확신에 차있습니다.
꼭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는 것이 아닌, 세상의 진리를 설파하는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차소희:그렇겠지. 어차피 미래는 영원히 오지 않는 거니까. (툭 내뱉는다. 사람이 과거나 미래를 살 수는 없다. 과거나 미래의 사람이 이 시간에 오더라도 그는 이 시간을 살아가게 되는 거니까. 과거는 지나간 것, 미래는 앞으로 닥칠 것. 시간의 작용이 그 사람에게만 다를 리는 없으니까, 모두가 현재를 살아가는 인간인 것이다. 그렇지만 당신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어쩐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묘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본다. 어쩌면…… 나 얘를 좋아하는 걸지도. 불꽃의 색깔이 붉어서 다행이다. 그런 생각을.) 그래. 네가 그렇다면 그렇겠지.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야…… (고개를 숙인다. 별이 많은 하늘도, 열병도 지금은 보고 싶지 않다. 한없이 부끄러워져서 마지막 목소리는 거의 웅얼대는 톤.)
한참을 침묵하던 래빈이 다시 한 번 입을 엽니다.
그리고 묻습니다.
김래빈:소희야. 혹시, … 피아노를, 음악을 다시… 해볼 생각은 없어?
차소희:해야지. ……어차피 할 줄 아는 건 이것밖에 없어. (또 본심이 아닌 말을. 그렇지만 어째서일까, 당신이라면 진심을 알아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김래빈:나는 네가 꼭 음악을 했으면 좋겠어. (웃지 않는, 예의 그 진지한 얼굴에서는 어떤 믿음이 반듯하게 드러난다.) 너는 정말 좋은 음악을 할 수 있으니까. 네 연주, 정말 좋았어. 정말로.
차소희:(눈을 동그랗게 뜨고 당신을 바라보다 고개를 푹 숙인다. 어떤 진심은 가끔 너무 올곧아서 마주하고 싶지 않을 때가 있다. 부끄러워…… 하지만 무릎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린 말은.) 나도 알아.
김래빈:(네 반응에 작게 미소짓고는 부스럭부스럭 메고있던 가방에서 악보집을 하나 꺼냈다. 그리고 네게 건넨다.)
그가 건네준 악보집은 낡고, 오래되었고, 허름하며, 손때 묻었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보물을 건네받는 듯한 착각이 듭니다.
래빈은 곧 쓰러질 것 같은 창백한 안색을 하고서 끊길 것 같은 목소리를 쥐어 짜내 한 가지 부탁을 남깁니다.
그 모습이 마치 한계에 다다른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김래빈:부탁이 있어, 소희야. 지금은 늦었으니까… 내일 오후 6시에 피아노가 놓여있는 그 광장에서, 이 악보를 연주해 줄래?
꼭 그 광장이어야 해.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가장 유동인구가 많을 시간에, 반드시. 반드시 이 곡을 연주해 줘. 부탁해, 소희야. (평소처럼 해줄 수 있을까? 하고 의사를 묻는 게 아닌, 일방적이고 또 절박한 부탁이다.)
차소희:그거야 어렵지 않지만…… (악보를 받아 읽어본다. 이제 다 타서 재만 남은 불의 희미한 불빛에 의지해 읽은 악보는, 아예 처음 보는 것이다. 이전에 들어보지 못한 선율이 머릿속에서 흐른다. 마른침을 삼키고 질문한다.) 보러 올 거야?
김래빈:그건 잘 모르겠어. 하지만, 소희야.
그게 언제든, 언젠가는 난 널 꼭 만나러 갈 거야.
네 음악을 들으러 갈게.
그 일이 날 행복하게 하거든. 불러주지 않아도, 꼭 갈게.
사람은 살아가는 존재가 아닌 죽어가는 존재라지만, 세상에 절망과 꺾인 의지만이 잔재한다면… 너와 내가 이렇게 무사히 만날 수는 없었을 거라고 생각해.
눈 앞에 놓인 골목의 폭이 서로 다를 뿐이지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누구에게나 주어져 있지 않을까?
김래빈:그래서… 사람들은 선택을 번복하고 버텨내는 거라고 생각해. 언젠가 좌절하지 않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몇 달 몇 년을 웅크리고서 오래도록.
꼭이야.
그 말을 남긴 래빈은 등을 돌려 사라집니다.
사라지는 그를 잡아 세울 수 없습니다.
말로 설명할 수 없겠지만 비유하자면 그런 것입니다.
무지개를 손으로 잡을 수 없고 햇빛의 뜨거움을 유리병 속에 담지는 못하는 것과 같은.
마지막 날
비가 퍼부을듯 빽빽한 수증기가 마른 길바닥을 차지하고 있는 시간입니다.
날씨 탓일까요? 오늘의 해는 일찍이 시들 요량인가봅니다.
하늘을 켜켜이 감싼 먹구름이 기묘하게 반짝이는 것만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당신은 래빈의 부탁을 들어주나요?
차소희:(광장에 놓여있을 피아노를 치기 위해 이동중이다. 버스 안은 왁자한 소리가 가득 차 있다. 완벽한 연주가 아니더라도 그 애가 내 피아노 소리를 들어줬으면 했는데, 역시 안 오겠지…… 조금 외롭겠지만 그 애가 듣지 않아도 괜찮다. 연주할 수 있다. 설령 그 누구도 들어주지 않더라도.)
(넓은 무대가 아니라도 괜찮아. 그러니까, 연주하자.)
광장으로 나왔다면 주변을 살필 수 있습니다.
평소보다 적은 수이긴 합니다만, 그럼에도 이 광장은 요 근방에서 유동객이 많은 장소로 손꼽히는 장소입니다.
중앙에 마련된 분수대 앞에 놓여 있는 낡아빠진 피아노가 눈에 들어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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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의 이목을 끌기 위해 페인트 칠을 해두었지만 좀처럼 눈길을 사로잡지는 못하는 낡고 오래된 악기가 꼭 고물처럼 보입니다.
점점 더 무채색해지며, 점점 더 다채로워지는 모순적인 세계에 도태되어 있습니다.
그 허름한 피아노에 다가서는 것은 오로지 당신, 당신 뿐이겠죠.
당신이 연주를 감행하기로 마음 먹었다면 피아노 의자에 앉을 차례입니다.
주변을 둘러보지만 래빈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시간은 점점 6시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차소희:(피아노 의자에 앉는다. 그 애가 들어줬으면 좋겠지만, 내 연주는 그 애만을 위한 건 아니야. 숨을 한번 크게 들이쉬고 내뱉는다. 나는…… 어찌됐든 이 곡을 연주할거야.)
END1. Da Capo!
당신은 시간의 풍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악보대 위에 셀 수 없이 많은 나이를 먹고 자란 곡을 올려둡니다.
음표를 빼곡히 채워 넣은 악보는 종이가 어찌나 얇고 덧없는지 바람 한 점에도 부서질 것처럼 가녀립니다.
이 악보의 어느 구석이 그렇게나 특별한지 알 수 없는 일입니다.
하지만 래빈은 당신에게 간곡히 부탁했었죠.
언젠가 당신이 최초로 건반에 손을 올려놓았을 때처럼 어깨 끝을 살짝 떨면서.
차가운 공기 한 품 찾아볼 수 없는 습하고 무더운 여름의 정가운데서 마침내 건반에 손을 올려둡니다.
잊고 살던 서늘한 냉기가 백건과 흑건 위에 자리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깨를 익힐듯 강렬하던 더위가 한풀 꺾입니다.
추억으로 남길 뻔했던 감각들이 되살아남을 느낀 것은 그 때였습니다.
하지만 이대로도 괜찮나요?
모든 것을 포기하고 한 번 연주를 그만 두었던 당신이 과연 피아노를 연주할 수 있을까요?
어쩌면 모든 의지를 잃고 주저앉아 있었을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도망치듯 반대로 뛰어 가능한 먼 곳으로 숨었던 당신은 굳어버린 손가락으로 다시 누군가의 발걸음을 멈춰 세울만한 연주를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이어나갈 수 있을까요?
그럼요. 이어나갈 수 있습니다.
세상에 절망과 꺾인 의지만이 잔재한다면 한 번 좌절했던 당신이 이렇게 무사히 피아노 앞에 앉게 될 수 있었을 리 만무합니다.
눈 앞에 놓인 골목의 폭이 서로 다를 뿐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누구에게나, 언제나, 주어져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언젠가 좌절하지 않는 때가 오기를 기다리며 선택을 번복하고 버텨내는 겁니다!
차소희:(……믿을 수 없어도, 믿지 않으면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 나는 내 감정에서 도망쳐 숨었어. 좋아하는 마음을 외면하고 이대로도 괜찮다고 생각했어. 세상이 지루하다고 여겼어. 그러나 더 이상은 외면할 수 없어. 그러고 싶지도 않고, 그래서도 안 돼. 그러니, 조금 긴장된 손을 피아노 건반 위에 올린다.)
피아노 Roll
기준치: 87/43/17
굴림: 63
판정결과: Regular
연주가 시작되자 바쁘게 거리를 활보하고, 때로는 흐릿한 풍경에서 벗어날듯 지나치던 사람들의 시선이 점차 광장에 모이기 시작합니다.
기이하게 물들었던 별빛 하늘이 풍향을 따라 꽃가루처럼 걷히고 가슴 위에 얹힌 듯 반죽되어 있던 아픔과 좌절이 단 하나의 점이 되어 흔적을 달리합니다.
곡이 끝맺음과 동시에 건반에서 손가락이 떨어지면, 그 주변을 둘러싸고 있던 많은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날립니다.
뉘엿뉘엿 져가던 하늘에 수놓였던 수억 개의 별들이, 세계를 숙주삼아 성장하던 색채의 무리가 모두 걷혔음을 깨닫습니다.
모든 인파가 흩어지고 나서야 주위를 둘러보지만 그 어느 구석에서도 래빈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많은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쩌면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같은 자리에 앉아 기다렸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
래빈의 전학 소식을 듣게 된 것은 돌아온 월요일의 아침에서였습니다.
당신은 어쩌면 사라져버린 그를 수소문했을수도 있고, 그를 만나기 전의 평범했던 하루처럼 모든 사건을 잊은 채 나날을 이어나가고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던 고열의 전염병 사태가 완전히 종식되고, 혼란했던 세계는 평화를 되찾습니다.
고열에 시달려 병결했던 아이들도 모두 학교로 돌아왔습니다.
울다 지친 매미가 늦여름의 끝에서 기나긴 생의 종지부를 찍습니다.
시간은 부지런히 흐르고 계절이 순환합니다.
10대의 끝, 졸업식을 하루 앞둔 당신은 책상 사물함 깊숙한 곳에서 반과 반으로 접힌 쪽지 하나를 발견합니다.
눈에 익은 글씨를 확인하면 틀림 없이 래빈의 글씨체입니다.
접힌 자국만이 선명하고 흐릿하게 번진 연필 자국은….
[ 2024년 여름의 악기상에서 다시 만나자. ]
반짝, 하고. 마치 빛을 받은 유령의 신호처럼.
END1. Da capo!, 처음으로 돌아가.
김래빈, 생환
차소희, 생환
현재를 살아가던 당신의 개입과 선택으로 인해 모든 미래가 바뀌었습니다.
래빈과의 두번째 첫만남이 2024년에 이루어집니다.
손실되었던 모든 이성치와 체력을 회복합니다.

핸드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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