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검사니 전력 60분 537회 주제 「겨울비」 사용.
“있지, 삿쨩이라고 불러도 돼?”
히메츠루는 당연하다는 듯 소파 자리를 양보했다. 뜬금없는 부탁을 뱉는 목소리에는 애정이 묻어 있었다. 사람의 깊이가 들여다보이는 음색이라고, 후지와라노 사츠키는 생각했다.
“뭐 마실래요.”
그러나 그 목소리가, 그 배려가 그에게 대답할 이유가 되는 것은 아니다. 제 자리에 단정한 디자인의 백팩을 내려놓고, 사츠키는 히메츠루를 빤히 쳐다보았다. 히메츠루도 이제는 이런 사츠키의 태도에 익숙해져 있었다.
“네가 사려고?”
“얻어먹고만 다니지 말랬어요.”
히메츠루는 사츠키를 가만 바라보았다. 잠시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다 흘리듯이 중얼거렸다.
“내가 너에게 무언가를 사 줄 기회가 많지 않다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어.”
“그거야말로 제 알 바 아닌 일이네요.”
목소리는 담담했다. 선을 긋는다기보다는 단순 궁금하지 않다는 투였다. 그게 꼭 누군가를 떠오르게 했다. 히메츠루는 사니와 아케미를 사랑한 이후부터 이토록 사소한 것에서도 누군가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지난 십칠 년 동안 잠잠해진 줄 알았는데, 재회한 이후에는 첫사랑을 다시 앓는 것처럼 시시각각 아케미와의 추억이 떠오르곤 했다.
사츠키는 히메츠루의 눈이 깊어지는 것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히메츠루의 행동은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꿈에서 그를 보지 않았더라도 알 수 있었을 테다.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사람은 이 세계 존재하는 모든 것에서 그리워하는 존재를 보니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전생의 제가 그리도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던가, 그런 의문을 품을 만도 하지만 후지와라노 사츠키는 그 따위 것 궁금하지도 않았다.
뭐든 상관없다.
어차피 ‘후지와라노 사츠키’를 향한 것도 아니니.
“……커피만 아니면, 뭐든 좋아.”
“커피를 못 마셔요?”
“쓴 걸 싫어해.”
“어른이면서, 신기하네요.”
말 그대로의 감상이었다. 아무리 분령이라 하여도 히메츠루 이치몬지라는 칼은 적어도 400년 이상 묵은 칼이다. 이 히메츠루는 인간으로 살아간 세월도 길다. 단맛 쓴맛 모두 봤을 것이다. 사츠키는 불편한 기색의 히메츠루를 바라보며 꿈에서 본 자신의 전생을 생각한다. 모리 아키라, 즉 전생의 사츠키는 히메츠루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경험하게 해주고 싶어했다. 그것을 사랑이라고 여겼다.
“……그러는 너는?”
히메츠루가 불퉁하게 묻는다. 상황이 마음에 차지는 않아 보이나, 빈정거리거나 공격적인 투는 아니었다. 오히려 투정 부리는 듯한 목소리.
투정 부려야 할 사람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닌가.
삐딱하게 생각하면서도 후지와라노 사츠키는 대답한다.
“상관 없어요.”
“응?”
“상관 없어요. 쓰든, 달든.”
사츠키는 순식간에 아득해진 표정을 바라본다. 이런 표정, 많이 봐 왔다. 이런 말을 들은 대부분의 어른에게는 설명을 해야 했지만, 히메츠루에게만은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해명하는 대신 사츠키는 핸드폰 액정을 눌러 주문을 마쳤다. 속으로는 비소를 머금은 채였다. 기대하고 싶지 않은데, 기대하게 되는 자신에 대한 비소. 이 남자, 혹시 나를 봐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
“……아케미는,”
“네에.”
“미식을 추구했어.”
“그렇군요.”
“너도 그런 거야?”
고개를 갸웃. 그가 아는 아케미는 그러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엿보이는 눈동자. 사츠키는 무표정한 얼굴로 히메츠루를 바라본다.
“무슨 말씀인지, 이해가 안 가는데요.”
“미식보다는 다른 쪽을 추구하나, 해서.”
“틀렸어요.”
얼굴에 떠오른 불안을 사츠키는 쉬이 알아차린다. 꿈에서도 그렇지만, 히메츠루는 감정을 숨기지 않는 남자다. 다른 사람 앞에서도 그럴까. 실없는 생각을.
“설명해야 하나요?”
“……설명할 필요는 없지만.”
히메츠루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집요한 시선으로 사츠키의 눈동자를 꿰뚫듯 바라보면서, 첫사랑에게 말을 거는 소년처럼 수줍게 말한다.
“알려주면, 기쁠 것 같아.”
후지와라노 사츠키는 눈을 질끈 감는다.
잠시간의 정적이 흐르고, “사이렌 오더로 주문하신 츠키 고객님”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다. 히메츠루 이치몬지가 일어나 음료를 가져온다. 당연한 것처럼 ‘아이스 커피’를 제 앞에, ‘시그니처 초콜릿’을 사츠키의 앞에 둔다.
“반대예요.”
“응?”
“커피가 제 것, 핫초코가 히메츠루 씨 것.”
히메츠루가 눈을 깜박인다. 사츠키가 가져온 쟁반의 방향을 바꾼다. 커피를 제 앞에 둔 후지와라노 사츠키가 말한다.
“취향이랄 게 없어요. 모든 것은 저마다의 장단이 있으니까. 무엇 하나가 특별히 좋거나 싫지 않으니, 상관없는 거예요.”
“헤에… 그렇구나.”
히메츠루가 고개를 끄덕이며 핫초코를 들어 올린다. 차갑게 식은 사츠키의 커피와는 달리 핫초코에서는 김이 피어오른다. 그리고 문득, 사츠키는 발견한다.
이 처연한 미인에게, 이런 부드럽고 고요한 분위기도 제법 어울리지 않는가?
후지와라노 사츠키는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오를 것 같아 아이스 커피를 벌컥벌컥 들이마신다. 히메츠루는 그런 모습마저 귀엽다는 듯 본다. 안돼. 위험해. 이 남자에 대해 더 알게 되면…….
정말로, 사랑해 버릴지도 몰라.
히메츠루는 눈앞 소녀의 속내도 모르고 말한다.
“있지.”
“네.”
목소리의 떨림을 눈치채지 못했으면 좋겠다고. 사츠키는 그렇게 바란다. 입술을 짓씹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이 마음의 떨림이 들킬 것만 같아서…….
“사츠키. 정말로, 삿쨩이라고 부르면 안 돼?”
“……마음대로 하세요.”
얼굴을 마주하고도 무표정을 유지할 자신이 없어 고개를 돌렸다. 날이 따뜻해졌다 싶더니 바깥에는 눈이 아닌 비가 내리고 있다. 히메츠루에게 고개를 돌리자 그가 빙긋이 웃는다.
“돌아갈 때 우산, 씌워줘도 돼?”
쿵. 쿵.
점점 빨라지는 박자로 심장 소리가 울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