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유키] 빨간 구두와 함께 춤을! #5
그림은 저녁 시간이 다 되어서야 낡은 기숙사로 돌아왔다. 팔에는 유키가 본 회청색 자습서가 끼워져 있는 채였다. 그 자습서를 보자마자 유키는 온 몸에서 힘이 빠지는 것을 느꼈다. 아즐과의 대화에서 그림이 아즐과 계약을 했다는 정보는 이미 얻었지만, 새삼스럽게 그 증거를 보게 되자 절망적인 기분이 된 탓이다.
“하아, 정말 지쳤다구⋯⋯. 유키! 오늘 저녁 뭐냐구!”
낡은 기숙사의 식당에 망연하게 앉아 있는 유키를 보고선 그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유키는 의아한 그림의 표정을 잠깐 쳐다보다, 쪼그려 앉아 그림과 눈을 맞췄다.
“그림. 나한테 뭐 할 말 없어?”
그림은 바보 같은 표정으로 유키를 바라볼 뿐이었다. 뭔가 잊은 게 있나 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유키에게까지 들렸다. 유키가 그림이 체결한 계약에 대해 알게 되었다는 사실은 꿈에도 상상 못하는 것 같았다.
“다녀왔습니다⋯⋯.?”
“그거 말구.”
“훔⋯⋯. 아! 유키는 오늘 혼자 공부 잘했냐구! 역시 이 몸이 없으니 힘들었지!”
그 말을 듣자마자 유키는 맥이 빠져 한숨을 푹 쉬었다. 그림이 순순히 말해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배신감을 느끼고 화를 낼 힘도 없었다.
‘그래도 이런 중요한 건 말해줘야 도와줄 수 있는데.’
그림을 설득해 볼까, 잠깐 고민하던 유키는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림이 도와달라 하지 않았는데 비밀로 하는 일을 들추고 억지로 도움을 줘 봤자 고마워하지도 않을 게 뻔했다. 유키는 그냥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저녁 메뉴는 카레야.”
“우와! 맛있겠다구!”
“어제의 소고기 스튜에 카레가루를 더한 것 뿐이지만⋯⋯ 그림, 나 좀 쉴 테니까 저녁은 좀 있다가 먹자.”
“어디 피곤하냐구!”
“그냥 좀. 피곤하네.”
유키는 비척거리며 식당에서 나가버렸다. 졸지에 식당에 혼자 남게 된 그림이 방문 바깥에서 두 파트너의 대화를 엿듣고 있던 고스트들에게 질문했다.
“고스트들아. 유키 왜 저러는지 아냐구? 어디 아픈 거냐구!”
“오늘 좀 늦게 들어오긴 했는데⋯⋯ 뭔가 고민이라도 있는 게 아닐까? 그림 도령이 물어보렴!”
“알겠다구~! 밥 먹으면서 질문해 볼 거라구!”
간단히 넓은 그릇에 밥을 퍼 둔 그림은 자신과 유키의 방으로 달려갔다. 유키는 졸리기라도 한 건지 벌써 잠옷으로 갈아입은 이후였다. 침대에 엎어져 있는 모습이 피곤해 보이기도, 조금 우울해 보이기도 했다.
“유키! 밥 먹⋯⋯ 무슨 일 있냐구!”
트위스티드 원더랜드에 온 이후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모습이었다. 유키는 반드시 집에 돌아갈 것이라고 다짐하기나 했지 이렇게 우울해하는 얼굴은 그림에게도 보여준 적 없었다. 그림이 깜짝 놀라 침대 위로 올라섰다. 침대에 얼굴을 묻은 유키의 머리맡에 앉아 걱정스러운 눈길로 유키를 쳐다보았다. 유키는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웅얼거렸다.
“그림. 나한테 뭐 거짓말 한 것 없어?”
“어, 없다구! 이 몸이 뭐하러 부하한테 거짓말을 하냐구!”
“정말로?”
“진짜라구! 왜 그러냐구! 누가 무슨 말 했냐구!”
“그렇구나⋯⋯.”
유키가 힘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미 다 알고 있는데. 바보 고양이.’
유키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필사적으로 숨기면 모르는 사람도 다 알게 될 텐데, 그림은 그런 것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순진함이 이 마수의 귀여운 점이기도 하나, 그 거짓말을 하는 대상이 자신이었기 때문에 유키는 그를 좋게만 볼 수 없었다. 그렇다고 거짓말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며 그림을 추궁하기에는, 말다툼이 길어질 것 같았다. 유키는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그림에게 싫은 소리는 하고 싶지 않았고, 화가 난다 해서 마구 혼내고 싶지 않았다.
겨우 거짓말 한 번이지 않은가. 유키는 자신이 원래 세계의 부모님께 했던 수없는 사소하고 커다란 거짓말을 떠올렸다. 원래 세계의 가족들을 생각하니 눈물이 찔끔 날 것 같았다. 유키가 훌쩍거리자 그림이 당황해서 유키의 어깨에 앞발을 올렸다.
유키는 힘없이 일어났다.
“으응⋯⋯ 저녁 먹자. 카레 먹고서는 양치 바로 해야 해.”
“알고 있다구!”
아무것도 모르는 그림이 힘차게 외쳤다.
* * *
마법 약학 수업, 유키는 절구로 곱게 간 풀물로 500ml의 용액을 만들었다. 용액 속 성분의 농도를 알기 위해 일부를 채취해 적정할 예정이었다. 피펫에 용액을 적당량 채워넣고 있는데 같은 조의 제이드가 질문했다.
“아즐에게 들었습니다. 계약을 거절하셨다고요?”
“⋯⋯딱히 할 이유가 없는 계약이었으니까요.”
유키는 한숨 쉬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그 옥타비넬의 기숙사장이나 이 곰치 쌍둥이와 더는 엮이고 싶지 않았다. 학점이 낮으면 외부 장학금이 끊기기에 할 수 없이 성실하게 수업에 참여하고 있긴 하지만, 한 학기 동안 제이드와 같은 조로 실험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는 이 수업을 포기할까 싶기까지 했다.
제이드가 비웃듯 말했다.
“저런, 자기과신은 별로 좋은 버릇이 아니랍니다.”
“자기과신은 아닐 걸요. 저한테는 필요없는 게 사실이잖아요?”
“그런가요? 후후. 그래도 고민이 생기신다면 언제든 모스트로 라운지에 찾아오시길. 언제든 당신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으니까요.”
이번 학기에만 해도 몇 번이나 들어본 영업 멘트다. 평소에는 돈이 없다거나 지불할 수 있는 대가가 없다는 말로 넘겼는데, 이번에는 그런 말로 넘길 수가 없었다. 제이드가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고민이 있으신 눈치로군요.”
“⋯⋯그래도 모스트로 라운지에는 안 가요.”
“저런, 어째서인가요? 모든 걸 혼자서 해결하실 수 있다고 생각하시진 않을 것 같은데.”
“오히려 제가 선배들에게 여쭤보고 싶은데요.”
“무엇을, 말입니까?”
질문이 전혀 예상가지 않는다는 듯 질문하면서도 제이드는 무척 즐거운 얼굴로 웃고 있었다. 유키는 제이드를 쳐다보지도 않고 실험 준비를 끝냈다. 제이드가 적정 실험을 위한 용액이 든 플라스크를 가져오자 유키는 제이드를 흘겨보며 말했다.
“선배들은 제가 가엾거나, 열심히 하는 모습이 예뻐서 도와주려고 하시는 건 아니잖아요? 이 학교에는 그런 사람 자체가 없는 것 같던데.”
“확실히 그렇죠. 저희가 자원봉사자는 아니니까요.”
“그럼 그건 도움이 아니라 거래죠. 대가로 드릴 수 있는 게 없는데 어떻게 거래를 하나요?”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유키 씨는 자신을 과소평가하는 면이 있네요.”
제이드가 피펫으로 플라스크 안에 한 방울씩 시약을 옮겼다. 유키는 제이드가 집중할 수 있게 입을 다물었다.
“3.5ml입니다.”
“기록해 뒀어요. 아무튼, 저는 오히려 선배들이 저를 과대평가하시는 것 같다고 생각해요. 지불할 수 있는 것도, 도움이 될 만한 능력도 없으니까요.”
유키가 말을 마칠 즈음 크루웰 선생이 다가와 소리쳤다.
“Bad Boys! 소곤소곤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거지?! 실험은 모두 끝냈나?”
“예. 기록도 끝냈습니다.”
제이드가 유키가 작성하던 보고서의 차트를 크루웰 선생에게 내밀었다. 차트를 확인한 크루웰 선생은 제이드와 유키를 가볍게 칭찬하고 다른 조의 실험 현황을 확인하려 자리를 떴다. 긴장이 풀렸는지 작게 한숨을 쉬는 유키에게 제이드가 웃으며 말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원하지 않는 사람과 억지로 거래하진 않는답니다.”
“그러면 좋겠지만요.”
“믿지 못하시는 것 같아서 아쉽네요.”
제이드가 훌쩍거리며 과장된 울음소리를 냈다. 유키는 그 거짓된 울음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 척 무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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