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타유키] 빨간구두와 함께 춤을! #3
아즐을 노려보던 유키가 질문한 것은 결국 그림에 관한 것이었다.
“질문에 제대로 답해주세요. 그림도 아즐 선배와 계약을 한 건가요?”
“다른 사람의 계약 사항은 비밀이라니까요. 플로이드가 알려주지 않던가요?”
“저는 그 애의 감독생이에요. 유사시 그 애가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할 입장에서 질문하는 거라고요.”
언뜻 보면 유키의 말에는 틀린 부분이 없어 보였다. 감독생은 낡은 기숙사에 대해 다른 기숙사의 기숙사장과 같은 권한을 지닌다. 그러나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기숙사장은 그 기숙사의 책임자이자 대표일 뿐, 기숙사 각 학생의 책임을 나눠 질 필요는 없었다. 다른 기숙사의 기숙사장들도 그렇게 행동하지 않는다.
유키의 말을 들은 아즐이 픽 비웃었다.
“그렇다면 그림 군의 계약을 필요시 유키 씨가 대신한다, 그런 제안이십니까?”
“저희는 둘이서 하나예요. 이런 상황에서 그림을 제대로 ‘계약의 주체’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지 않나요?”
“꼭 그림 군의 부모라거나, 진짜 보호자라도 되는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여전한 비웃음을 얼굴에 띄운 채 아즐이 말했다. 유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지만 유키와 그림은 혈연 관계도, 그림이 유키와 ‘둘이서 한 학생’이라는 증서도 없다. ‘둘이서 하나’라는 규칙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안에서만 통용될 뿐, 실제 서류는 유키와 그림 둘의 몫이 제대로 별개의 학생으로서 준비되어 있었다. 교사진들 정도만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이지만, 어째서인지 아즐은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이다.
아즐이 선심을 베풀듯이 말했다.
“그런 억지로는 계약을 파기할 수 없습니다. 이미 그림 군은 계약에 대한 보상을 받아가신 상태이기도 하고요.”
“그 보상에 대한 보상을, 제가 어떻게 해볼 수는 없을까요?”
“그림 군의 계약을 인수하시겠다는 뜻입니까?”
“…….”
“좋습니다. 중요한 이야기를 하기에는 자리가 좋지 않으니 자리를 옮기죠.”
아즐이 웃으며 앞서 걸어갔다. 제대로 유키를 자신의 예비 고객으로 대우하려는 듯, 유키에게 맞춰 발걸음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그것을 깨달은 유키의 기분은 바닥을 쳤다.
‘이 사람 뭐야?’
사람을 자신의 쓸모에 따라 재고 따지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유키 자신도 필요할 때는 다른 사람을 그렇게 대하곤 했다. 그렇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굴다니.
‘다른 사람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도 보이지 않는 속물이잖아!’
그렇게 생각했다가, 유키는 곧 제 생각을 고쳐먹었다. 저 사람, 옥타비넬의 기숙사장 아즐 아셴그로토라 했던가? 그의 교내 평판에 대해 제대로 들어보진 못했지만, 유키를 아끼는 선배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마라’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 보아 평판이 아주 나쁜 사람은 아니어 보였다. 적어도 유키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는 잘 대한다는 뜻이다. 유키에게는 그 사실이 더 비호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람의 급을 따져 나눈다는 뜻 아닌가.
그러나 유키는 화를 바깥으로 드러내거나 하지 않았다. 외려 속으로 분노를 삭히며 아즐이 안내하는 대로 VIP실로 들어갔다. 적진의 심장부에 들어갔지만 유키는 겁먹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긴장을 풀었다.
아즐이 지배인의 책상에 앉았다. 유키는 당당한 걸음으로 상석에 놓인 소파에 앉았다. 아즐이 조금은 의외라는 듯 스스로 손깍지를 꼈다.
“긴장하지 않는군요.”
“제가 긴장해야 할 이유가 있나요?”
“계약의 내용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는 긴장하는 게 보통이죠.”
아즐이 싱긋 웃었다.
“혹은 두려워하거나요.”
꼭 유키가 두려워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듯한 말투였다. 그를 깨달은 유키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그럼, 쥐고 있는 패도 없는 상황에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이상하지.’
이런 상황 자체를 즐기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우위에 있는 상황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다. 제 속내가 다 까발려진 것 같은 느낌에 유키가 못마땅한 눈으로 아즐을 흘겨보았다.
“뭐, 일반론의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화이트 씨는 그러지 않으시겠죠.”
“일반론이 항상 맞는 건 아니죠. 그리고, 일반론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 텐데요?”
“성질도 급하시지. 하지만 맞는 말이군요. 우리에게는 더 중요한 일이 있지요.”
아즐이 눈매를 부드럽고 늘어뜨리고 웃었다. 유키도 함께 눈을 접어 웃었지만 둘의 눈동자는 차가운 빛을 띄고 있었다. 아즐 또한 그것을 모르지 않았는데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말을 이어갔다.
“그래…… 그림 씨의 계약 말입니다. 화이트 씨가 취소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는 이미 계약의 대가를 수령했으니까요.”
“아까 전에 말하셨던 것처럼, 제가 그림의 계약을 인수하는 것도 불가능한가요?”
“오, 그것도 가능은 하지요. 다만,”
다만?
‘또 무슨 치사한 조건을 덧붙이려고.’
유키는 여전히 웃는 얼굴로 아즐을 바라보았다.
“유키 씨는 외부 장학금을 받고 계신다고 들었습니다. 제가 알기로는 전과목 성적 총합이 B 이하라면 다음 학기 생활비 장학금을 수령하지 못하시는데, 틀린가요?”
“……정보력이 무척 좋으시네요. 네. 맞아요. 그래서요?”
“그림 군의 조건은 ‘성적이 낮은 그림 씨가, 족보의 도움을 받아 성적을 일정 이상 향상시키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화이트 씨는 마법을 쓰지 못하면서도 항상 전과목 성적 총합이 A, 말하자면 전교 10% 안에 드는 수재입니다.”
“그래서, 추가로 지불하길 원하는 것이 뭐죠?”
“역시 이해가 빠르군요. 화이트 씨에게 그림 군의 계약을 그대로 인수해드리는 것은, 역시 수지타산이 안 맞죠. 그러므로…….”
아즐이 순수하게 호의를 베풀려는 듯한 얼굴로 웃었다. 눈빛마저 웃고 있는 부드럽고 달콤한 표정이었다. 원래 세계에 있던 유키였더라면, 얼굴에 홀려 넘어갈 정도로 예쁜 웃음.
그러나 그가 내뱉은 말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화이트 씨는, 낡은 기숙사의 사용권 정도는 거는 것이 어떠신지.”
“거절할게요.”
생각할 필요도 없었기에 바로 답했다. 유키는 습관적으로 짓고 있던 웃음을 거두고 무표정한 얼굴로 아즐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바로 거절의 말을 받을지 몰라 당황했지만, 아즐은 감정을 숨기고 같은 얼굴로 계약을 종용했다.
“어차피 B 학점 이상을 받기 위해서는 상위 50등 안에 드셔야 할 텐데요? 화이트 씨에게는 쉬운 일이지 않습니까?”
“확실히, 어려운 일은 아니네요.”
“그렇죠. 그림 씨에게 앞으로의 혜택을 거저 드리는 것이나 다름없는 조건입니다.”
“그래도 거절할게요.”
아즐은 유키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였지만, 유키 또한 고작 열여섯 살 소녀일 뿐이다. 평소 상냥함을 품고 있는 눈빛에 적대적인 감정이 엿보였다.
‘저런, 생각 정도는 하고 사는 줄 알았는데.’
아즐이 속으로 쯧, 하고 혀를 찼다.
“아즐 씨의 말씀처럼 저에게는 쉬운 일이네요. 그림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건 기특한 일이지만, 글쎄요. 그림은 저에게 ‘도와달라’고 말하지 않았던 걸요.”
“둘이서 하나, 라고 해 놓고선 겨우 그런 핑계로 빠져나가시려는 겁니까?”
“어떻게 생각하시든 상관없어요. 저에게도, 자존심이라는 게 있거든요.”
아즐이 풋, 소리를 내며 웃었다. 아즐이 생각하기에 지금은 도저히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가끔 이런 사람들이 있지. 자존심 세울 때와 안 세울 때를 구분 못 하는 사람이.’
그 정도의 계산도 없이 이곳을 찾아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는데, 유키 화이트는 역시 어렸다. 어린 만큼 감정적이기도 하고. 아즐 아셴그로토는 유키 화이트에 대한 평판을 떠올렸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고, 오로지 자신이 남을 도울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남을 도와준다고 했던가? 말이야 좋지만, 도저히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는 어울리지 않는 인간성이다. 오늘의 대화로 유키 화이트가 이리저리 뜯어먹히기 좋은 무른 인간은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긴 했지만, 정말로 그 뿐이다.
‘로열 소드 아카데미에 갔으면 편하게 살았을 텐데.’
그곳에는 유키 화이트와 같이 운 좋게 살아온 멍청이들이 산재해 있으니 말이다.
아즐이 속으로 유키를 비웃든 말든, 유키는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로 아즐을 노려보았다.
“제가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남의 도움을 받아 해나갈 필요 없어요. 그림의 대가는 그림이 치르겠죠. 저는 얻을 것 없는 장사네요.”
“내기에서 지는 것이 두렵습니까?”
“그럴 리가요. 그렇지만…….”
“그렇지만?”
“선배가 저를 얼마나 멍청하게 보셨는지 알 것 같아서요. 그런 사람이랑은 굳이 협력하지 않는 주의라.”
유키는 그 말만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가운 눈으로 아즐을 흘긋 보고선 등을 돌렸다. 마지막으로, 책 잡히는 일 만들지 않겠다는 듯 곱게 웃으며 인사했다.
“그럼, 다시는 볼 일 없으면 좋겠네요. 감사했습니다. 아셴그로토 선배.”
문이 닫히고, 아즐이 헛웃음을 지었다. 유키 화이트에 대한 평가를 수정해야 할 시간이었다.
가진 것 없으면서 콧대만 높은 여자.
공교롭게도 아즐이 가장 싫어하는 부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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