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유키] 재회 - 칠 님

<span class="sv_member">린더</span>
린더 @frauroteschuhe
2026-02-23 23:59

어린 시절의 기억은 쉽게 휘발된다. 날아가 버린 어린 빌의 기억에도 이런 장면이 존재했던가? 이미 사라진 기억은 돌아오지 않고. 돌아오지도 않고. 눈우물에 고인 것이 의미도 없이 떨어졌다. 누군가 불행하지만 잊고 싶지 않은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어린 시절로 회귀한다면, 어느 영화의 배경처럼 처음으로 돌아간다면. 그 전생은 과거인지, 미래인지. 일단, 지금의 빌 셴하이트는 분명하게 과거를 보고 있었다. 일곱 살의 빌은 여전히 서른이 한참 넘은 채였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의미 없는 하루가 또 지나가는 중이었다. 다른 점이라고는 아내가 죽기 전 설정해 놓은 알람이 고장도 모르고 때맞춰 시끄럽게 굴었던 일 정도가 전부였다. 빌 셴하이트의 서른 번째 생일이었고, 셴하이트 부인이 영면에 든 지 일 년이 겨우 되던 날이었다. 빌은 아직 처분하지 못한 탓에 일 년 만에 울리던 전화기를 한참이나 그 자리서 바라보았다. 적막하던 집안이 그 아이의 소리로 벅적거리는 것이 낯설었다. 낯설면서도 여전히 유키 화이트, 유키 셴하이트가 튀어나와 그 알람을 직접 끌 때까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기다리고 있으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지나든 태연하게 나타나 무슨 이런 알람을 가만 보고 있느냐고 타박이라도 해 줄 것만 같아서.

 

따라서 빌은 여전히 유부남이었다. 유키의 장례가 있던 날에도 빌은 유키를 모르는 제 지인들을 구태여 초대하지 않았다. 그래서였는지, 아내가 하루아침 교통사고로 세상을 떴다는 사실을 모르는 지인은 다 적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많았다. 덕분에 빌은 사회 생활을 하는 내내 유부남이었다. 카메라가 멈추고 모든 이들과의 대화에 일부러 존재하지도 않는 유키의 이야기를 섞었다. 그렇게 여느 남편들과 다른 팔불출이 되고 나면 유키가 정말로 집에 살아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빌은 그 기분 하나로 하루하루를 그저 버텨내고 있었다. 오늘이 끝나면 또 오늘 같은 내일이 오고, 오늘은 또 어제 같은 오늘일 테니.

 

근래에는 타임워프를 소재로 한 작품이 유독 많았다. 개중에서도 소중한 이를 잃은 주인공이 그를 살리기 위해 과거로 회귀하는 내용은 이제 흔해 빠진 클리셰로 취급된다. 그럼에도 많은 작품이 그 엇비슷한 구성을 따라가는 것은 결국 많은 이들이 찾기 때문이었다. 결국 그 많은 이들은 소중한 사람을 쉽게 잃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대중들의 그런 욕구를 완전히 이해하고부터는 도저히 그런 구성의 연기를 할 수 없었다. 그것들은 더 이상 연기가 아니었다. 카메라 앞에서는 몰입했다가도 모든 것을 마치고 나면 맡은 역할에 대한 질투가 끓었다. 나에게 기회가 주어진다면, 절대 놓치지 않을 텐데. 구하지 못하더라도 다시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오직 그것 하나만을 위해 지금 가진 것들이야 전부…….

 

그나마 카메라 앞에서 몰입할 때면 유키마저 잊을 수 있었고, 카메라가 꺼지면 모두와 유키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집에 붙어있지 않게 된 것이 몇 년이더라, 집에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이미 며칠이더라. 그런 시간 감각 따위가 무뎌지고 나면 늘 부족한 잠은 차에서 채웠다. 검은 매니지먼트 차 안은 소품으로 북적였고, 낯색은 점차 야위어갔다. 관계자의 대부분은 심지어 그가 왜 그런지조차 몰랐다. 빌은 그렇게 아무도 모르게 살았고, 아무도 모르게 죽었다. 그 즈음은 이미 유키 셴하이트가 죽고 오 년이 지난 뒤였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는, 그토록 원하던 유키가 죽기 전임에는 확실했으나 유키는 여전히 존재하지도 않던 날이었다. 예닐곱의 어린 빌 셴하이트가 아역으로 간혹 촬영장에 들르던, 처음 학교를 다니기도 전의 어떤 하루였다. 삼십 대 중반의 기억을 가지고 어린아이로 사는 것은 의외로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투기를 부렸던 과거인지 미래인지를 후회할 정도로 기분 나쁜 일이었다. 모두가 자신을 일곱 살 대하듯 대했고, 불면에 시달리던 때와 달리 아홉 시만 되면 잠자리에 누워야 했고, 무엇보다도 유키는 앞으로 십 년은 더 기다려야 만날 수 있을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아무런 의미도 없는 십 년. 어제와 같은 십 년. 서른 살과 같은, 십 년이었다.

 

그러니까, 그래야만 하는데. 그럼에도 기다릴 것이라고, 몇 번이고 작은 몸에 갇혀 다짐했는데. 빌은 그 몸으로 처음 촬영장에 도착하자마자 그대로 얼어 있었다. 마치 어느 날의 제 생일 알람 화면을 바라보던 때처럼. 어린 시절의 기억을 하나씩 되짚어 보았다. 과연 이 기억은 그 당시에도 있었던 기억일까? 저것은 제가 죽기 전의 과거에도 존재했던 것인가? 빌이 뺨을 타고 난 선명한 눈물길을 자연스레 훔쳐내었다. 그의 시선을 겨우 따라붙으면 저편에는 아직 셴하이트가 아닌 유키 화이트가 동그마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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