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자사니] 우리는 오렌지 태양 아래

<span class="sv_member">린더</span>
린더 @frauroteschuhe
2026-03-13 12:46

내성 바깥에 위치한 정부와 혼마루를 잇는 게이트를 넘은 정부 소속 부젠 고우는 바람같이 달려 혼마루의 정문을 두드렸다. 벌써 해가 먼 서산 너머로 떨어지고 있었다.

‘퇴근이 늦어지겠구만…….’

부젠 고우의 뒤로 외성에 키우는 벼와 밀이 노을에 젖어 바람의 흐름에 따라 불꽃처럼 일렁였다. 가끔 이런 혼마루들이 있었다. 옛 성의 양식에 따라 외성과 내성을 나눈 혼마루가. 부젠이 지금 방문한 하루아메 혼마루는 그런 혼마루 중 가장 유명하기에 ‘하루아메 성’이라고도 불렸다.

네모반듯하게 만들어져 잘 관리된 논과 밭, 멀리 보이는 산의 전경, 평성을 둘러싼 해자와 근처를 도도하게 흐르는 강물까지……. 사니와가 영력으로 혼마루 공간을 인공적으로 넓히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보통 성을 축조하고 산이나 강 같은 자연물을 구현하는 것까지 흔하지는 않았다. 하루아메 ‘성’이라고 불리는 이 혼마루의 사니와가 어떤 사람인지, 부젠 고우는 함부로 짐작하지는 않았으나 그 영력의 크기나 취향 정도는 알 법했다.

문지기 역할을 수행하려는 듯, 문가에 누워 있던 작은 토끼 인형이 눈을 떴다. 사니와가 부리는 식신이었다. 제게 집중하라는 듯 토끼 인형이 폴짝폴짝 뛰며 부젠의 눈길을 끌었다. 부젠이 한 쪽 무릎을 꿇고 토끼 인형과 눈을 맞추자, 토끼 인형이 앳된 목소리로 말했다.


“안녕! 처음 보는 남사님. 우사기쨩에게 소속과 이름을 알려주세요.”
“내는 시간 정부 우정국에서 온 부젠 고우라. 이 성의 사니와에게 누가 시간 정부 편으로 물건을 보냈거든. 반-드-시 직접 수령하시게 하라 카데.”
“이상하네. 우사기쨩의 주인님, 오늘 손님이 있다고 말한 적 없어.”
“아~ 곤란한데, 내 퇴근 좀 일찍 하고 싶거든. 우사기쨩. 사니와한테 전해주면 안되겠나.”
“우사기쨩의 주인님, 듣고 있어!”
“허어?”


토끼 인형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멈추더니, 곧 인형의 입에서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루아메 혼마루의 주인, 사니와 하루입니다. 말씀하세요.”
“아, 소포가 왔어예. 현세의 가족분이 보낸 거 같고. 검열국에서 디게 귀한 물건이라던데, 생일 선물이라거나 그런 거 아입니까?”
“생일은 멀었고, 현세의 가족은 없습니다.”


목소리는 차갑고 단단했다. 지뢰 밟았네. 우짜면 좋냐. 부젠이 얼어붙어 서 있자, 여자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근시인 미다레 토시로가 문을 열어줄 겁니다. 아까 전 정부 게이트의 이용은 확인했으니, 그 아이에게 우정국 소속 정부도에게 발급되는 증을 확인시켜 주세요.”


보통의 미다레 토시로가 그 신분증이 어떻게 생겼는지 어떻게 아는지 궁금했지만, 부젠은 고개만 끄덕였다. 의사를 확인한 토끼 인형이 다시 축 늘어져 바닥에 나뒹굴었다. 토끼 인형을 문 옆에 세워준 부젠이 고개를 들자, 경쾌한 몸짓으로 문을 여는 미다레 토시로와 눈이 마주쳤다.


“우정국 소속 부젠 고우 씨?”
“와, 여까지 뛰어온 기가. 니 달리기 억수로 빠른갑네. 내랑 낸주 달리기 시합 할래?”
“달리기 시합은 나중에! 주인님 퇴근해야 하니까 일단 신분증! 주세요!.”


기세에 밀린 부젠은 자켓을 뒤져 꼬마 소년에게 신분증을 건네주었다. 신분증을 슥 확인한 미다레가 부젠에게 증을 돌려주었다.


“네에 확—인! 주인님이 계신 곳으로 안내할게요!”


미다레가 휙 몸을 돌렸다. 혼마루 건물로 안내하는 걸음이 가볍고 사뿐사뿐한 것이 상당한 연도를 짐작하게 했다. 진짜 특이한 혼마루다……. 부젠은 그리 생각하며 미다레 토시로를 따라 걸었다.











미다레 토시로는 혼마루 건물로 돌아가는 동안 재잘거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왜 굳이 이 시간을 선택했냐며 툴툴대는 것으로 시작하여 ‘주인님이 요즘 야근이 잦아서 걱정된다.’는 말까지 계속되었다. 조금만 더 함께 있으면 혼마루의 깊은 사정까지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혼마루 건물은 전통적인 양식으로 지어졌으나 내부는 제법 현대적으로 꾸며져 있었다. 사니와의 취향이 반영된 듯 장식이 자제된 정갈하고 단정한 공간이었다. 그러나 부젠에게 내부를 찬찬히 구경할 여유는 주어지지 않았다. 미다레 토시로의 발걸음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미다레의 발걸음은 사니와의 집무실에 가까워질수록 빨라졌다. 사니와의 집무실이 눈에 보일 때는 거의 뛰듯 했다. 부젠 고우에게는 단도의 걸음 속도를 얕볼 수 없다는 당연한 사실을 재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심지어 미다레 토시로는 자각도 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곧 주인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들떠 그런 것 따위는 생각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주인이 좋은가?’

부젠도 정부에서 현현된 존재는 아닌지라 도검남사는 ‘당연히’ 주인을 아낀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까지 주인을 좋아했던가? 워낙 오래 전 일이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미다레가 극 수행을 다녀왔다는 점이나 현세에 나가 따로 사 온 것이 분명한 의상을 보면 주인의 애정을 담뿍 받은 것 같았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부젠은 미다레를 따라 달렸다. 미다레는 혼마루 건물의 가장 높은 층까지 단숨에 달려올라가더니 숨 한 번 헐떡이지 않고 사니와의 집무실 문을 열어젖혔다.


“귀염둥이 미다레 토시로 등장!”
“미다레! 건물 내에서는 뛰면 안 된다고 했잖아.”
“아, 맞다!”
“정말이지…….”


사니와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까 전의 차가운 목소리는 어디 갔는지 목소리에는 온기가 가득 차 있었다. 뛰지 말라는 말에서도 귀여워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미다레가 “머리 쓰다듬어주세요!”라며 앉아있는 사니와에게 머리를 숙일 때에는 부젠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외부인이라고 해도 너무한 거 아이가.’

사니와가 미다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는 것을 보던 부젠과 근시처럼 사니와의 뒤에 서 있던 코가라스마루의 눈이 마주쳤다. 코가라스마루가 빙긋 웃었다.


“하하, 그냥 두거라. 주인이 보고 싶어서 저도 모르게 달려온 것 같으니. 그것보다 객을 저리 세워두면 되겠느냐.”
“아! 죄송합니다, 부젠 씨. 일단 자리에 앉으시겠어요?”
“아, 예. 감사합니다.”
“파파, 음료를 준비해주시겠어요? 시간이 늦었으니 저는 냉침한 허브 티가 좋을 것 같아요.”
“알았다. 정말이지, 늙은 아비를 이렇게까지 부려먹다니.”


코가라스마루와의 대화에 부젠은 조금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하루아메 성의 사니와 하루는 분명히 현세에 가족이 있었고, 이 소포 또한 현세의 가족이 보낸 것이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도검남사와 사니와 사이의 2세는 시간 정부의 데이터베이스에 등록되어 따로 관리된다. 게다가 사니와 하루는, 코가라스마루와 닮은 구석이 전혀 없었다.


“신에게 어리고 늙은 게 어디있어요. 부젠 씨는?”
“아, 지예? 물이면 충분합니다.”
“그래선 안 되지. 젊을수록 몸을 따뜻하게 해야 하는 법이란다. 딸아이는 냉침한 것이 좋다고 했지만, 따뜻한 카모마일 차는 어떠냐?”
“감사히 받겠심다.”


누군가의 혼마루를 물려받지 않았으니 이 코가라스마루 또한 인간의 몸을 얻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테다. 오히려 부젠 자신이 인간의 육을 얻은지는 더 오래되었을 것이다. 부젠 고우는 기묘한 기분으로 뒤돌아 걸어가는 코가라스마루를 곁눈질했다.

사니와 하루가 웃으며 화제를 돌렸다.


“걱정하지 마세요. 파파의 차는 일품이랍니다. 그나저나, 소포가 왔다고요?”
“예. 현세 가족의 소포라도 검열하는 건 우짤 수 없는 일이라 양해 부탁드립니다. 아무튼, 검열국에서 무~척 중한 것이라 하더라꼬예?”
“이상하네요. 저는 현세의 가족이 없어서, 그리 귀중한 것을 보내줄 사람이 없는데요.”


사니와 하루가 잠시 멈칫하는 것을 부젠 고우는 알 수 있었다. 금방 표정 관리를 하긴 했지만, 어깨가 눈에 띄게 굳었다. 목소리도 차가워진 그대로였다. 뒤에서 미다레 토시로가 부젠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집무실에 딸린 작은 방에서 차를 우리고 있을 코가라스마루가 이쪽을 신경쓰고 있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주인 앞이라 흉흉한 기운은 내보이지 않았지만 살기도 보이지 않으면서 이 쪽에게 은근히 압박을 주고 있었다.

‘사니와한테 가는 우편을 내한테 맡긴 이유가 있었구마.’

부젠은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코가라스마루도 그렇고, 근시인 미다레 토시로도 그렇고 은근히 사니와를 과보호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간 직원들이었더라면 어떤 사연이 있는 물건인지 전하기도 전에 기에 눌려버렸을 테다. 연도 높은 도검남사가 둘이나 기싸움을 거는 것에 부젠 고우는 조금 피곤한 기분이 되었다. 아니, 아무 말도 안 했는데예, 아직.


“현세의 형제 분이 보냈다고 합디다.”
“……어떤 물건인가요?”


하루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코가라스마루가 자기 주전자에 우린 차를 가져와 사니와와 부젠의 잔에 각각 따라주었다. “따뜻한 걸 마시면 긴장이 풀릴 게다.” 라고 하며 사니와의 왼편 어깨를 다정하게 두드렸다. 그제야 부젠은 알 수 있었다. 제 앞에 있는 사니와는 단순히 긴장한 것이 아니라 두려워하고 있었으며, 그 두려움으로 인한 긴장을 이제서야 풀 수 있었다는 것을.

사니와 하루는 아직 중견이라는 이름을 달 기간도 채우지 못했으면서 빠르게 성장한 이였다. 그런 이가 도검남사를 두려워할 리 없으니 두려워하는 대상은 현세의 가족일 테다.

그러나 손짓 하나로도 움직일 강력한 도검남사를 거느린 사니와가 현세의 가족을 왜 두려워한단 말인가?

고작 인간을?

의문을 품고 부젠은 공간 주머니에 담아온 소포를 꺼냈다. 소포를 열지도 않았는데 방 안에 환한 기운이 가득 찼다. 맹렬하게 타오르고 따스하게 내리쬐는 자애로운 힘.

아마테라스의 신력이었다.

사니와 하루는 작게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부젠 고우는 이 사니와가 스사노오의 눈길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제야 기억해냈다. 이미 스사노오의 관심을 받고 있는 인물이 아마테라스의 보호마저 받을 이유가 있는가? 이런 밝은 기운이라면 스사노오의 ‘눈길’마저 벗겨낼 게 뻔했다.

부젠은 의아한 속내를 굳이 숨기지 않았다. 하루는 호기심 어린 눈빛을 흘려넘기며 소포의 포장을 뜯었다.

그 안에는 할머니가 항상 목에 걸고 다니던 오렌지빛 석류석 목걸이가 있었다.

어린 시절에는 할머니가 이런 석류석을 왜 가지고 다녔는지 몰랐지만, 이제는 알았다. 뻔한 이유였다. 하루는 신력을 담은 목걸이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복잡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하루는 고개를 다시 들었다. 부젠 고우가 늘 짓는 시원스러운 미소로 질문했다.


“아는 물건 맞지예?”
“예. 그런데, 이걸 제게 줄 리가…….”
“전언이 하나 있긴 했는데… 별로, 안 듣는 게 좋을 것 같긴 합디다.”
“들을래요. 듣고 싶어요.”


목소리는 다급하기까지 했다. 부젠은 한숨을 쉬고선 말했다.


“필요 없다… 고 하던데요.”


사니와 하루의 손가락 끝이 순간적으로 굳었다.


“……무엇이요?”
“그게, 그것 뿐입니더.”
“…….”


하루는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부젠이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서 있는 코가라스마루와 미다레 토시로까지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루가 꿋꿋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수령했습니다. 전해주셔서 감사해요.”
“아니, 이게 제 일인데. 거…….”
“미다레, 부젠 씨를 게이트까지 모셔다드리렴.”


깔끔한 축객령이었다. 미다레가 애써 밝은 목소리로 “네—에!” 하고 외쳤다. 미다레의 인도에 따라 부젠이 방 밖으로 나갔다.

건물 밖으로 나가자 바람이 흐느끼듯 불었다. 미다레 토시로가 시무룩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전에는 그리 밝았던 아이가 이제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괜히 나 때문인 거 같고 그렇구마…….’

복잡한 마음을 안고 부젠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히자마루와 1부대 부대원들이 에도에서 돌아오자 혼마루에는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평소보다 늦은 귀환이었다. 히자마루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마음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해가 떨어지는 서쪽에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온몸에 묻은 피와 먼지를 씻고 나오자 마른비가 흩날렸다. 에치젠국의 3월은 눈비가 자주 내리므로 아주 이상한 일은 아니었지만,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욕탕에서 함께 나온 오오카네히라가 하늘을 쳐다보며 중얼거렸다.


“하루카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인가. 아침까지만 해도 청명했는데.”
“오오카네히라. 혼마루에서 사니와에게 무슨 일이 생길 리가 없잖는가.”
“형제의 감이다. 연인에게는 그런 감이 없나 보지?”


놀리는 듯한 목소리에 히자마루가 오오카네히라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오오카네히라는 히자마루를 본 척도 하지 않고 혼마루 건물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피가 이어진 형제도 아니면서, 잘도 형제라는 말을 써먹는군.’

불만스럽게 생각은 했으나 히자마루도 불길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히게키리였더라면 하치만 대보살이 계시라도 주었을 텐데, 자신에게는 그런 능력이 없었다. 형제에게 있는 능력을 질투해본 적은 맹세코 없었지만, 이번만은 그런 계시가 필요했다. 손바닥에 기분 나쁜 습기가 들러붙었다.


“단순 날씨만으로 주인의 기분을 확신해서는 안된다. 알고 있을 텐데.”
“그래? 그럴 일이 없다면 좋겠다만.”


오오카네히라는 고개를 바로하고 혼마루 건물을 쳐다보았다. 하루가 코가라스마루와 미다레 토시로를 대동하고 걸어나오고 있었다. 거리가 있어 표정까지는 알아볼 수 없었으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심계가 아주 편해 보이진 않는군.”
“…….”


오오카네히라의 말을 끝까지 듣지도 않고 히자마루는 걸음을 더욱 빨리하여 하루카에게로 다가갔다. 쏘아지듯이 달려나가는 동료를 보며 오오카네히라가 헛웃음을 지었다. 저쪽에서도 히자마루를 발견한 듯 걸음을 멈췄다. 제게로 달려오는 히자마루를 보고 하루가 어쩔 수 없이 웃었다. 히자마루는 꼭 제가 관련된 일이면 저렇게 달려오곤 해서, 하루카는 그만 있다면 무슨 일이 있어도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히자마루는 하루 앞에 멈춰서서 하루의 얼굴을 살폈다. 부드러이 웃는 얼굴이긴 하였으나 그 웃음으로도 피로와 수심을 가릴 수 없었다. 히자마루가 하루의 손을 붙잡고 질문했다.


“하루카. 무슨 일이라도 있나.”
“굳이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니지만…….”


하루가 곤란한 얼굴로 웃었다. 어리광부리고 싶은데 마음의 거리낌을 두는 표정. 히자마루는 하루의 이런 표정을, 정말로 사랑했다. 하루가 코가라스마루에게로 눈짓했다. 코가라스마루가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아무리 딸아이가 곱다지만, 이 아비 앞에서 낯뜨겁게 굴지 말거라. 히자마루.”
“아,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나저나—.”
“아직?”


하루가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질문하며 웃었다. 질문에 얼굴이 빨개진 히자마루가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돌렸다. 코가라스마루가 웃으며 하루에게로 상자를 내밀었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어요, 히자마루에게.”
“부탁?”
“응. 부탁.”
“무엇이지? 아니, 바보 같은 질문을 했군. 무엇이라도 말해라. 이 히자마루의 능력이 닿는 데까지라면 뭐든 이루어 줄 테니.”
“그건 고텐에서.”


비장하게 각오를 말하는 히자마루에 하루가 상자를 받아 히자마루에게 건네주며 또 웃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사람 앞에서는 웃음이 나오게 된다. 바람에 흩날리던 빗방울이 잦아들었다. 히자마루는 그 웃는 얼굴을 한참을 바라보다가 겨우 바보 같은 목소리로 아주 뜬금없는 말을 했다.


“……하루, 저녁은 들었지?”
“오늘 저녁은 고텐에서 먹을래요. 당신과 단둘이.”
“…….”

히자마루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미다레가 하루의 뒤에서 그 얼굴을 보고 키득키득 웃었다. 코가라스마루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우리는 빠져줘야 할 때가 온 것 같구나, 미다레.”
“오오카네히라 씨가 누나랑 히자마루 씨를 방해하지 못하게, 미리 데려올까요?”
“좋은 생각이다. 오늘 저녁 메뉴는 무엇인지 물어보도록 할까. 그 아이라면 아마 외우고 있을 게다.”











혼마루 고텐, 즉 사니와의 거처로 갈 때까지 하루는 부탁의 내용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손에 든 물건을 히자마루에게 건네주고 나서, 다만 히자마루에게 에도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달라고 할 뿐이었다. 평소처럼 진행하는 연속 출진. 히자마루로서는 늘상 있는 평범한 일일 뿐이지만 하루는 언제나 그 이야기를 즐겁게 듣곤 했다. 히자마루가 해 주는 이야기를 듣고, 함께 연어 구이와 봄나물 샐러드, 가벼운 달래 된장국 등의 단출한 저녁을 만들어 먹은 후에도 하루는 부탁에 대해 아무 말도 없었다. 그리고 히자마루도 부탁에 대해 재촉하지 않았다.

하루가 부탁의 내용에 대해 말을 꺼낸 것은, 두 사람이 침실에 들어서였다. 하루는 침대에 앉아서 어느새 침실 한 켠에 놓아둔 상자를 히자마루에게 건넸다.


“이걸 걸어주세요.”
“그것이 ‘부탁’인가?”
“응. 가능하다면 보석 안에 영력도 불어넣어 주면 좋구.”


하루가 전해 준 상자 안에는 오렌지색 석류석 목걸이가 있었다. 아마테라스의 영력이 들어있다 빠져나간 듯 석류석에는 미약한 햇살같은 힘이 남아 있었다. 제 영력으로 채운 석류석 목걸이를 들고, 히자마루는 하루에게로 다가섰다.


“안 물어봐요? 목걸이에 대해서.”
“당신이 설명해주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겠지.”
“……할머니는 음양사가 되기 전에 스사노오의 무녀였어요.”


그리고 당신께서는 사니와가 된 손녀를 부탁하기 위해 스사노오의 신역으로 걸어들어가셨죠.

하루는 속삭이듯이 말했다. 히자마루가 하루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하루는 슬픈 얼굴로 웃으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현세의 언니가 보냈어요. 필요없다면서.”
“……신력을 지닌 물건을 일반인이 가져서 좋을 건 없으니까 맡긴 것일 테다. 귀중한 물건. 팔 수도 있었지 않겠나.”
“그런가요? ……그렇지만, 나는 이걸 꼭, 나에게 버린 것만 같아서.”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인간 아메미야 하루카가 웃었다. 히자마루가 한 쪽 무릎을 꿇고 하루와 시선을 맞췄다. 따뜻한 손이 부드러운 볼을 감쌌다. 히자마루는 무슨 말을 해야 위로가 될지도 알 수 없었다. 형님이었다면 제대로 위로해줄 수 있었을까. 이렇게 나약한 속내를 내보이는 연인을 달래줄 수 있었을까…….


“그래도, 당신이 걸어주면 어찌되든 괜찮을 것 같았어.”


하루카가 히자마루의 손을 붙잡고 애교부리듯 제 얼굴을 비볐다. 히자마루는 하루카를 가만 쳐다보았다. 물건으로서도, 인간으로서도 너무 과한 사랑을 받고 있었다. 히자마루는 눈을 질끈 감았다. 히자마루에게도 가끔 스스로를 형님과 비교하면서 가라앉을 때가 있다. 그런데, 이런 순간이 오면 자신의 불민함은, 제 모자람은 정말로 이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지끈거렸다.


“주홍색은 당신의 눈동자 색이잖아. 그러니까.”

이 목걸이를 걸고 다녀야 한다면, 당신이 걸어주는 게 좋아.


속삭이는 목소리에 히자마루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물어가는 태양빛 목걸이를 얇은 목에다 걸어주고, 다시 한쪽 무릎을 연인 앞에 꿇었다.


“반드시 지켜주마.”
“응?”
“세상의 모든 것에서, 심지어는 나에게까지도.”
“히자마루.”
“그 무엇도 당신을 상처낼 수 없게 하겠어. 맹세하고 싶다.”
“그렇다면,”


하루카가 고개를 숙여 히자마루의 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얼굴이 붉어진 히자마루는 곧 하루카의 얼굴을 손으로 붙잡고 입술을 겹쳤다.

밤은 깊어만 가고, 고텐의 정원에서는 풀벌레가 울었다.

그림자 따위는 없는 시간 속,

이 기억만으로도 평생을 살 수 있겠다고 하루카는 생각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