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유키] 오후 세 시의 티타임 #1
Scene #1. 플레인 스콘과 다즐링 퍼스트 플러시
“그러고 보니, 요 앞 티룸에서 좋은 다즐링을 들여왔다더라고요.”
그런 말을 꺼냈을 때, 유키는 찬장을 열기 위해 깨금발을 들고 있었다. 제법 들뜬 목소리였다. 거실에 임시로 놓인 티테이블에 앉은 빌이 유키 쪽을 돌아보았다. 가벼운 소재의 긴 치맛자락이 움직임에 따라 하늘하늘 휘날렸다. 유키의 기분이 특히 좋은 날에만 입는 치마였다. 그것이 아니더라도 가볍고 발랄한 움직임 덕에 누구라도 유키가 기분이 좋다는 사실은 알아낼 수 있었을 테지만. 유키가 깨금발을 들고 팔을 쭉 뻗는 양을 보며 빌이 픽 웃었다.
높은 찬장의 맨 위 칸에서 유키가 실링 백을 꺼내 들었다. 오늘이 오기까지 빌에게 들키지 않도록 숨겨놓은 모양이었다. 다리를 살짝 비틀거리면서도 무사히 실링 백을 찾아낸 유키는, 티 테이블을 향해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빌이 걱정스러운 눈길로 유키를 보았다. 조금은 불만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 티룸에 같이 가자고 했더라면 같이 갔을 텐데—”
“—아이, 빌도 참! 이걸 보라구요.”
유키가 찬장에서 찾아낸 실링 백을 들고 자랑스럽게 빌에게 걸어갔다. 춤의 스텝이라도 밟듯 경쾌한 걸음걸이였다. 얼결에 유키가 내민 것들을 받은 빌이 받은 물건을 자세히 보았다. 단단히 봉해진 은색 실링 백과 가장자리에 녹색 사과가 프린팅된 카드였다.
[1st Flush]
퍼스트 플러쉬. 쉬운 말로 바꾸자면 첫물차. 그해 처음 수확한 어린 찻잎으로 만드는 차다. 빌은 제 앞에 서 있는 유키를 올려다보았다. 홍차의 수확 시기는 다양하지만, 유키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퍼스트 플러쉬 홍차의 맛은 가볍고 부드럽다. 그래, 꼭 빌 앞에서 생글생글 웃고 있는 유키와 닮았다. 빌은 반쯤 확신을 담아 질문했다.
“혹시, 이게 그 다즐링이니?”
“정답!”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유키가 까르르 웃었다. 손으로 입을 가리고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함께 티룸에 갈 시간이 없을까 봐 티룸 주인에게 부탁해서 조금 사 왔어요. 무척 맛있어서, 빌에게도 꼭 맛보여주고 싶었거든요!”
“그냥 시간을 좀 내어 달라고 하면 되었을 것을…….”
“그야 수요일 오후에 일을 빠질 수 있게 될 줄, 나도 몰랐으니 그런 거죠! 빌의 문제가 아니라, 내 일정이 문제였단 말이에요.”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런 말을 한다. 빌이 그 볼에 제 손가락을 가져다 대었다. 매끄러운 피부를 예쁜 손가락이 천천히 쓸었다. 동그랗던 눈이 어느새 사르르 녹아 예쁜 호선을 그렸다. 그 눈웃음에 빌이 쓴웃음을 지었다. 제 연인은 언제나 이런 식으로 빌에겐 잘못이 없다고 말한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믿는 양.
“문제는, 유키 너는 주말에 쉬고, 나는 영화 홍보 일정 때문에 주말에 시간을 못 내는 것이잖니. 문제의 본질을 흐리지 말렴.”
“영화 홍보 일정을 빌이 잡는 건 아니잖아요?”
강아지처럼 빌의 손을 붙들고 볼을 비비던 유키가 반박했다. 말이나 못하면. 속으로 중얼거리며 빌이 유키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꼭 참여해야 하는 일정이 아닌 이상, 모든 일정을 참여하는 것은 불가능. 몇 개는 불참해도 괜찮았어.”
“그래도 가능하면 참여하는 게 좋죠. 아내와 함께하겠다고 일정을 취소하는 것도 프로답지 않은 일이잖아요? 그렇죠?”
그러니 괜찮다고 말하는 얼굴로 유키가 생긋 웃었다. 뺨을 쓰다듬던 빌의 손을 두 손으로 마주 쥐고 팔을 내렸다. 작고 하얀 손을 따라 시선을 내리자, 그곳에는 유키가 소분 받아온 다즐링이 있었다.
“모처럼의 휴일인데, 꼭 이런 일로 옥신각신해야겠어요? 이번 다즐링, 퍼스트 플러쉬치고도 특히 청사과 향이 짙다고 했어요. 빌도 사과와 관련이 깊잖아요. 학생 때 실사판 ‘Beautiful Queen’ 홍보도 했었고.”
“기가 막혀. 지금 말 돌리겠다고 10년 전 일을 끌고 오는 거니? 본인이 그때 말썽꾸러기 사과라고 불렸다는 건 다 잊어버린 모양이구나? 내 천방지축 사과 아가씨.”
‘사과’라니. 오랜만에 듣는 호칭이었다. 유키와 결혼한 이후 빌은 유키를 더 이상 ‘사과’라고 부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는 모두 감자라고 부르면서 왜 자신만 사과인지 궁금했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지금도 그렇다. 그런 사소한 호칭마저 모두 애정이었으니까. 비록 그때는 ‘말썽꾸러기’, 지금은 ‘천방지축’ 같은 수식어가 붙었지만, 그런 사소한 것은 예나 지금이나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다. 유키가 빌을 놀리듯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히히, 그러고 보니, 사귀기 전부터 다른 친구들은 모두 감자라고 부르셨으면서 저만 사과라고 부르셨죠.”
“사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말썽꾸러기 쪽이 중요한 거라고 그때부터 그렇게 말했는데, 또 제게 불리한 건 못 들은 척하는구나. 정말이지.”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빌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유키가 배시시 웃었다. 불평처럼 몇 마디 늘어놓긴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결국 ‘사랑해서 져 주겠다’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 그러지 말고요. 스콘이 곧 있으면 다 될 거란 말이에요. 슬슬 빌도 물을 끓여야죠?”
“어머, 오늘은 유키가 나를 대접해주는 게 아니었던 걸까?”
“홍차는 나보다 빌이 더 잘 우리면서. 맛없는 홍차는 빌도 싫잖아요? 모처럼 좋은 차를 받아왔는데.”
유키가 입술을 삐죽였다. 빌이 입술 집어넣으라며 유키의 입술을 손가락으로 누르려던 차,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오븐에서 알람이 울렸다. 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굽고 있던 스콘을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유키가 부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을 감싼 버터 향기가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스콘을 가져오겠다는 말도 없이 유키가 자리를 박찼다. 쌩하니 부엌으로 사라지는 유키의 뒷모습을 빌이 헛웃음을 지으며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빌은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토록 즐거워하니 어쩔 수가 있나. 차를 우려내려면 일단 물부터 끓여야지.
전기 포트를 가지러 부엌에 들어서니 유키가 다 구워진 스콘을 오븐에서 꺼내고 있었다. 푹신해 보이는 두꺼운 오븐용 장갑을 손에 낀 채 조심조심 트레이를 꺼내어 아일랜드에 올려두는 모습에 빌이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소리에 유키가 빌을 홱 돌아보았다.
“물을 끓이러 왔더니, 스콘을 그렇게까지 소중하게 다룰 일이니?”
“그럼요? 막, 터프하게 팍팍 꺼내야 해요?”
“누가 그러라고 했니? 조심스러운 게 귀여워서 그렇지.”
“그냥 귀엽기만 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사랑스럽기도 하고. 여보.”
유키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저 뾰로통한 표정 다음으로 올 말은, 역시 ‘이번 한 번만 봐 주는 거예요.’려나?
“이번 한 번만 봐 주는 거예요.”
역시. 빌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지었다. 오븐에서 갓 꺼낸 스콘을 아끼는 접시에 옮겨 담은 유키가 식탁으로 접시를 가져갔다. 스콘이 무척 잘 굽혔다고 당장이라도 자랑하고 싶은 표정이었다. 빌은 유키에게 해줄 완벽한 스콘에 대한 찬사를 떠올리며 말을 골랐다. 그러나 유키는 스콘이 잘 구워졌다고 자랑하는 대신, 냉장고 문을 여는 것이었다. 이건 예상 왼데. 빌은 그리 생각하며 유키가 하는 양을 쳐다보았다.
아.
유키가 꺼낸 것을 보고 빌이 속으로 작게 탄성을 질렀다. 차갑게 식힌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 잼. 유키는 스콘이라는 과자 자체를 좋아하기에 아무것도 바르지 않은 스콘을 먹는 일도 더러 있지만, 역시 스콘에는 잼과 크림을 발라 먹어야 제맛이다. 자연히 빌의 머릿속에 어젯밤 클로티드 크림을 만든다며 부산을 떨던 유키의 모습이 떠올랐다.
“미리 말해두겠지만, 나는 클로티드 크림은 바르지 않을 거야.”
“딸기 잼도요? 이거, 내가 직접 만든 건데.”
“아무리 휴식기라 해도 나는 모델이자 배우. 무절제하게 먹는 일은 있을 수 없어.”
“설탕 대신 알룰로스 넣었는데도요?”
“어머, 제로 딸기잼이라던가, 그런 거니?”
“네. 설탕을 아예 안 넣을 순 없었지만…… 빌도 조금은 마음 놓고 먹을 수 있었으면 좋겠어서.”
유키가 부끄러운지 그렇게 말하며 코를 찡긋거렸다. 빌이 말이 없기에 그 쪽을 바라보자, 빌은 유키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빌이 그런 식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유키는 괜히 할 말 있으면 얼른 해보라는 듯, 새초롬한 표정을 짓게 된다. 어쩌면 시무룩한 표정으로 보일지도 모르겠다. 연애를 한 지는 10년도 넘었고, 결혼한 지도 1년이 넘어 이제는 신혼이라 말할 수도 없다. 그런데 왜 이렇게까지 마음이 설레는 건지. 빌이 저런 눈으로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처음 연애를 시작한 어린 날처럼 가슴이 속없이 뛰고 볼이 제멋대로 붉어졌다.
“……고마워.”
전기 포트의 스위치가 딸깍이는 소리를 내며 넘어갔다. 그 소리에 유키가 놀라 파드득 몸을 떨었다. 그 모습을 보며 빌이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었다.
“크흠. 물도 끓었으니, 차를 마실 시간이란다, 유키. 스콘도 식어가고 있잖니?”
“아, 아! 그렇죠. 아이, 나도 참…….”
유키가 마법에 걸렸다가 깨어난 듯 볼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쟁반을 가져오겠다며 다시 그릇을 넣어둔 찬장을 뒤지는 모습을 보며 빌이 속으로 작게 웃었다. 저런 모습까지도 귀엽다니까.
“차를 우리는 데에는 스킬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정확한 온도와 시간이 중요해.”
찻잎을 넣은 거름망을 들어내며, 빌이 그리 말했다. 유키가 진지한 표정으로 빌이 하는 양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다도 강의라도 하는 것 같네, 정말이지. 그리 생각하며 빌이 유키를 바라보았다. 유키는 곧 고개를 들어 빌을 바라보았다. 의아한 표정이었다.
“그치만 빌은 온도계를 안 썼잖아요.”
“온도에 대한 감각이라는 게 있잖니? 이쯤이면 됐다고 느껴지는 감각 말이야.”
“역시 잘 모르겠단 말이죠…….”
유키가 스콘에서 피어오르는 김을 바라보며 입술을 내밀었다.
“뭐, 내가 계속 우려주면 되는 것 아니겠니.”
“치, 그래놓고 또 로케 갈 거면서.”
“그건…… 항상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단다.”
그리 말하며 빌이 잘 우러난 다즐링을 유키의 잔에 따라 주었다. 퍼스트 플러쉬답게 홍차의 담홍빛보다는 노란 색감이었다. 따뜻한 색감의 수색을 바라보며 유키가 가벼운 한숨을 쉬었다. 다즐링의 섬세한 향기가 코끝을 간질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좋니?”
“네?”
“그렇게 좋냐고 물었어.”
빌은 약간 서운한 표정이었다. 유키는 의아하여 빌을 빤히 바라보았다. 한숨을 쉬었을 뿐인데, 도대체 왜 서운함을 느끼는 거지? 의아했지만, 유키는 순순히 대답했다.
“그럼, 좋죠.”
“나보다도 더?”
“빌과 함께 하니까 좋은 거거든요?”
빌도 참. 질투할 게 없어 차 향기마저도 질투하는 모습을 보며 유키가 헛웃음을 지었다. 장난스러운 질투였으면 좋았으련만, 그는 진심으로 보였다. 유키는 픽 웃으며 아직 따뜻한 스콘을 제 앞접시로 가져왔다. 두 입 크기로 만들어진 스콘을 반으로 자르고, 잘린 단면에 잼 나이프로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 잼을 발랐다.
“빌, 아~.”
그러며 포크에 꽂힌 스콘을 내밀었다. 분명 클로티드 크림은 먹지 않겠다고 했는데. 빌은 곤란한 표정으로 유키를 바라보았다. 유키가 생글생글 웃었다. 빌이 유키를 한참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 결국 말을 토해냈다. 장난처럼 스콘을 권하는 유키를 거부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번 한 입뿐이야.”
“당연하죠! 저도 더는 안 권할게요. 물론 클로티드 크림을 얹으면 더 맛있겠지만!”
빌이 순순히 입을 벌렸다. 클로티드 크림과 딸기 잼을 바른 스콘이 유키의 손에 의해 입 안으로 들어갔다. 스콘의 적당한 버터 향이나 클로티드 크림의 우유 맛, 그리고 직접 만든 딸기 잼의 새콤달콤한 맛이 어우러져 무척이나 풍부한 맛이었다. 더 먹고 싶어. ……그렇지만 자제해야겠지. 제 몫의 차를 마시곤, 빌이 얄미움과 사랑스러움을 담아 유키를 노려보았다. 뭐가 그리 좋은지 유키가 헤헤 웃었다.
“이렇게 먹으니까 역시 더 맛있죠?”
“……그렇지만 더는 먹지 않겠어. 알겠지?”
“알겠어요. 안 권할게요. 그래도, 맛있었죠?”
“그래, 무척 맛있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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