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말레유키] 나선 스텝의 왈츠를 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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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6-03 15:29

“쉿.”


테라스 난간에 가뿐히 내려앉은 유키 화이트가 입에 검지손가락을 댔다. 장엄한 왕궁과 화려한 무도회에 어울리지 않는 가벼운 차림이었다. 만나러 오겠다 하더니 이런 방식이었나. 말레우스 드라코니아가 씩 웃었다.


“이젠 비행 마법도 제법 다루는 모양이군.”

“그럼요. 열심히 연습했답니다.”


유키가 생긋 웃었다. 흑린성에 오는 것은 6개월만이었다. 인간의 시간으로는 긴 여행이었지만 요정의 시간 개념으로 따지자면 긴 여행도 아니었다. 두 계절이 흘렀더라도 요정들에게는 그야말로 눈 깜짝할 새일 뿐이었다. 그러나 이 두 계절이 무척이나 길게 느껴진 것은 아직 인간의 시간 감각을 지닌 유키뿐만 아닌, 말레우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아름다운 녹빛 눈동자에는 재회의 기쁨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말레우스가 유키에게 손을 내밀었다. 유키는 그 손을 잡고 가볍게 난간에서 내려왔다.


“호위들은?”

“성문 앞에 두고 왔어요. 아직 출입 수속을 받고 있겠죠.”

“너를 찾느라 꽤나 고생이겠군.”

“보고 싶어서요.”

“기특한 말이긴 하다만.”

“말레우스는 절 보고 싶지 않았나요?”

“그랬을 거라 생각하나?”


말레우스가 빙긋이 웃었다. 짐짓 삐진 척하는 연인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치기어렸던 어린 시절이라면 몰라도, 그들은 아주 오래 함께했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만나고 싶지 않았을 리가 있나. 보고 싶지 않았을 리가 있나. 요정들에게 6개월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사랑하는 이들에게는 그렇지도 않았다.


말레우스는 유키를 껴안고 속삭였다. 아직 유키가 돌아왔다는 것을 진실로 체감하지는 못한 듯, 꿈결 같은 목소리였다.


“해가 바뀐 후, 네 생일쯤에야 올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오래 여행하지는 않아요. 말레우스의 생일 전에는 와야죠.”

“자유로이 다닐 수 있는 마지막 여행이니까.”


실로 그랬다. 이번은 유키가 자유로이 지낼 수 있는 마지막 시기였다. 말레우스가 성년이 되면 여왕 말레피시아는 왕위를 이양할 것이라고, 말레우스가 태어났을 때부터 말했다. 아직 요정의 나이로 미성년이기에 혼인을 하지 않았을 뿐, 성년이 되고 왕위를 이어받으면 말레우스도 결혼을 해야 했다.


그리고 말레우스의 상대는,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서 그 이방인을 처음 만난 순간에 정해졌다.


유키는 20년 전을 떠올렸다. 세계 바깥에서 온 출신 모를 여자를 고귀한 드래곤 요정인 드라코니아 가문에 입적시킬 것이라 처음 선언했을 때, 흑린성이 발칵 뒤집어졌던 것을. 현 여왕인 말레피시아가 유키의 존재를 암묵적으로 인정했음에도 그랬다. 유키 화이트는 인간인 데다 가시나무 계곡의 기반이 없었으니까.


“너무 늦으면 말레우스의 곁에 다른 사람이 설지도 모르니까.”

“내가 그럴 거라 생각하나?”


장난스러운 말에 말레우스는 미간을 좁혔다. ‘내 마음을 믿지 못하냐’는 투정이었다. 유키는 그저 웃기만 했다. 불신은 오래된 버릇이었다. 요정의 마음은 인간의 것처럼 그리 쉬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그를 버릴 수 없었다. 가끔 그 불신이 말레우스를 상처입힌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모든 건 바뀌니까요.”

“이곳에 있는 건 아주 천천히 바뀌지. ……지금의 네가 그렇듯이.”


속상한 투였다. 유키는 그의 감정을 이해했다. 입에 넣고 굴리기에는 너무 쓰디쓴 감정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어쩌면, 안심으로 다가왔을 수도 있겠다. 말레우스는 10년 전, 그가 유키를 완전히 잃어버릴 뻔했을 때를 떠올리고 있었다. 유키는 아무 말 없이 말레우스를 마주 안았다. 그 따스한 품 속에서 그 때의 불안을 떠올렸다.


가시나무 계곡과 흑린성은 쉬이 변하는 곳이 아니었고, 변화를 두려워하는 곳이기도 했다. 드라코니아 일족의 피에 인간의 피가 섞여들어가는 것이 고까웠던 드라코니아의 원로들은 눈엣가시였던 유키를 꼬드겼다.


네가 왔던 세상의 바깥으로 다시 돌려보내주겠다고, 원래 있어야 할 곳, 네 집으로 돌아가게 해 주겠다고…….


집이란 너무 달콤한 단어였다. 유키는 이미 그 10년 전에도 그것 때문에 말레우스를 한번 저버린 적이 있었다. 이 세계에서 쌓은 모든 것을 버려야 하더라도, 설령 돌아갈 수 없다 해도 일말의 가능성을 믿고 원래 세계로 돌아가려 했다. 유키는 그 일이 말레우스에게 미친 영향을 기억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마지막의 마지막에서야 마음을 돌린 것은 결국 사랑 때문이었다.


유키 화이트의 의식만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신이 말했다.


아쉽구나, 네가 떠나면 그 아이가 슬퍼할 텐데.


돌아갔더라면 행복했을 테다. 이 비틀린 세계로 오기 전까지 그랬던 것처럼, 무척이나 행복했을 테다. 시라사키 유키노로 다시 살아갈 수 있었을 테다. 그러나 유키 화이트는 자신의 행복이 사랑하는 이의 슬픔을 담보해야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를 선택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많이 슬퍼할까요?

그럼. 울겠지. 오랫동안 비가 올 거야. 요정은 잊지 못하게 만들어져 있으니까.


잊지 못하게 만들어져 있으니, 너를 아주아주 긴 시간동안 잊지 못할 거야. 마법의 가을에 만났던 찰나의 인연을 천 년이 지나도, 혹은 죽어서도 잊지 못하겠지.


그렇지만 아가, 그 슬픔조차도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란다.


돌아가면 너는 모두 잊어버릴 테니 말이야.


돌아가면 모두 잊는다 해도 유키 화이트는 말레우스 드라코니아의 슬픔을 외면할 수 없었다. 사랑이란 그의 감정을 자신의 것과 혼동하게 만든다. 타인의 슬픔은 타인의 슬픔일 뿐인데도 그를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를 제 것처럼 느끼게 한다. 제가 떠나도 울지 않았으면 좋겠다.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의 존재로 인해 당신이 괴로워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런 생각을 해버린 순간, 유키 화이트는 깨달았다. 눈물 몇 방울과 사과 몇 마디로 그 마음을 위로할 수 없다고. 모조리 잊게 되더라도 그의 슬픔은 이곳에 존재할 것이라고.


그러니, 버리고 갈 수 없는 것이다.


눈을 뜨자 말레우스가 자신을 안고 울고 있었다.


그것이 10년 전의 일. 그 여자가 고통스러운 변이와 불멸의 저주를 안고 살아가게 만든 대가.


“말레우스.”

“그래.”

“춤추지 않을래요?”

“춤?”

“네. 왈츠를 춰요.”


품 속에서 꼼지락거리던 작은 손이 말레우스의 손을 잡았다. 말레우스는 멋진 제복을 입고 있었고, 홀 안의 무도회에서는 무곡이 흘렀다.


“제 차림이 좀 초라하긴 하지만, 저랑 춤춰주시지 않을래요? 왕자님.”

“……하루만 더 일찍 도착했어도 오늘의 첫 춤을 나와 함께 출 수 있었을 텐데.”

“오늘 무도회가 열릴 줄은 몰랐으니까.”

“글쎄, 정말로 몰랐나?”


유키 화이트는 그냥 웃기만 했다. 말레우스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따라 웃었다. 작은 틈새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둘은 가볍게 스텝을 밟았다. 온화한 달이 그들을 비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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