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R 유키 화이트 [편안한 마이룸]
“유키. 당일 이러는 것도 좀 그렇지만…… 정말 나로 괜찮아?”
“응? 무슨 뜻이야?”
유키가 뒤를 돌아보았다. 에펠이 어정쩡한 자세로 고스트 카메라를 든 채 머뭇거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사진사가 나여도 괜찮냐는 뜻, 일까나.”
“에펠이 뭐가 어때서?”
“이런 건 빌 씨나, 적어도 케이터 선배가 낫지 않을까 해서.”
“음…….”
의아한 표정으로 에펠을 바라보던 유키가 곧 생각에 빠졌다. 턱을 쥔 채 입술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그 모습을 에펠이 불안하게 바라보았다. 유키의 생일 사진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생일 사진을 직접 찍어주는 일도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에펠은 자신의 사진에 자신이 없었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 입학하기 전처럼 아예 사진에 대해 몰랐더라면 차라리 ‘그깟 거, 대충 보이는 대로 찍으면 되는 거 아니야?’ 했을 테다. 그러나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 입학한 후 ‘그’ 빌 셴하이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으면서, 에펠에게도 ‘안목’이 생겨버렸다. 아무리 보는 눈이 없다 해도 빌이 찍는 사진과 자신의 사진이 다르다는 것을 모를 리 없었다.
게다가, 이번에는 단순히 에펠이 사진을 잘 못 찍는다는 사실만이 문제가 아니었다. 잭이나 세벡 녀석 같은 친구에게 부탁을 받았더라면 그냥, 별 생각 없이 대충 찍었을 테니까. ‘명색이 폼피오레면서 사진을 이렇게 찍을 줄은 몰랐다!’ 같은 소리를 해도 ‘그러니까, 누가 포트폴리오도 안 보고 사진사 고르래?’ 따위의 말로 격추시킬 자신이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그럴 수 없었다. 그는 단순히 에펠과 유키의 사진 기술 차이 때문은 아니었다. 어쩌면 당연하다. 좋아하는 여자아이의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부담스럽지 않을 리가 없지 않은가!
“확실히 그 두 선배가 사진은 잘 찍긴 해.”
유키의 말에 에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츠라뷸의 케이터는 하츠라뷸의 바보 듀오에게 부탁하면 될 테고, 빌의 경우에는 에펠도 함께 부탁해줄 수 있었다. 한 번밖에 없는 열여섯 살 생일인데, 이왕이면 유키도 예쁘게 잘 찍히는 게 좋지 않겠는가.
“응, 그리고 루크 씨도, 나는 잘 모르겠지만, 사진을 잘 찍는다고…….”
“그래도 에펠을 고른 데에는 이유가 있으니까, 걱정 마.”
에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를 고른 데에 이유가 있다고? 라는 말이 얼굴에 쓰여 있는 것 같았다. 유키가 웃으며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에펠이 급하게 유키를 따라잡았다.
“그 이유가 뭔데?”
“곧 알게 될 거야. 꼭 당장 알아야 하는 건 아니잖아?”
“곧 알게 될 거라면 지금 알아도 되잖아?”
“어차피 조금만 있으면 알게 될 텐데, 꼭 지금 알아야 해?”
대답에 에펠이 입을 다물었다. 유키의 말을 더 물고 늘어져봤자 짜증만 살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폼피오레의 선배들과 다니면서 는 것이라고는 눈치밖에 없다. 다행인 점이 있다면 유키는 빌보다는 훨씬 관대한 편이라는 것일까. 에펠이 한숨을 작게 쉬었다. 유키는 에펠의 한숨을 못 들은 체하고 바쁘게 걸었다. 궁금해해도 절대 안 알려줄 거지만. 생각하며.
“……이게 뭐야?”
유키가 에펠을 안내한 곳은 옴보로 기숙사의 사진실이었다. 폐가에 가까웠던 옴보로 기숙사지만 1년의 수리를 지나며 사진실도 이제는 스튜디오라고 불러도 좋을 규모가 되었다. 그러고 보니 이번 분기 학교 홍보물 컨셉이 ‘편안한 기숙사’였댔나. 에펠도 당장 며칠 전 제 생일 전, 생일 기념 사진을 찍는다며 이 사진실을 방문했었기에 저 커다란 매트리스가 왜 비스듬히 벽에 기대져 있는지는 이해했다.
그러나, 저 위에 있는 회색 고양이 얼굴 모양의 소품들은 뭐란 말인가? 마치 옴보로 기숙사의 쪼끄만 마수…….
“에펠은 행동도 느리더니 눈치도 느리다고! 바로 이 몸이야, 이 몸!”
그래. 쟤 말이다. 쟤. 바로 유키의 파트너 마수 그림 같지 않은가! 유키가 들어오는 걸 보고 사진실 소파에 앉아서 졸던 그림이 자리에서 튀어 올랐다. 그림이 유키에게 다가와 얼마나 기다렸는지 아냐며 삐죽댔다. 유키가 그림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아하하, 미안, 미안. 그림. 이야기가 좀 길어져서. 기다렸어?”
“당연히 기다렸지! 고스트들이 영상실에서 영화 보면서 나초와 구운 오징어를 먹자고 꼬셨는데도 유키를 기다렸다고!”
“그림…… 감동이야.”
“감동이면 오늘 저녁엔 참치 캔 하나 더 달라구!”
그림이 자랑스럽게 외쳤다. 유키가 그림의 털을 마구 헝클이면서도 단호하게 “그래도 다이어트 중이니까 참치 캔은 더 안 돼.” 했다. 길어봐야 5분 떨어져 있었을 텐데 저럴 거 있어? 에펠이 옴보로 기숙사의 한 사람과 한 마리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당연히 이럴 줄 알았지만 괜히 억울했다. 이 사진실까지 오면서 옴보로 기숙사의 고스트들을 하나도 마주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키와 에펠 사이의 미묘한 연애 기류는 옴보로 기숙사의 고스트들에게 어째서인지 제법 지지받고 있었다. 그래서 무의식적으로 에펠은, 어쩌면 오늘 하루만큼은 고스트들이 저 정신연령 7세짜리 마수를 데리고 나가줄 거라고 믿었다.
그리고 결과는 현재와 같다. 나초와 구운 오징어라면 제법 큰 유혹이었을 텐데 버틴 그림을 기특하다 해줘야 할지, 고스트들의 실패를 슬퍼해야 할지 에펠은 알 수 없었다.
그림을 끌어안고 엉덩이를 두드려주던 유키가 질문했다.
“근데 그림, 어떻게 도와줄 거야?”
“에펠 녀석이 구도를 잡게 도와줄 거라구!”
“구도는 내가 설명해줄 텐데?”
“에, 혹시 나님, 필요 없는 거였냐구…….”
그림이 시선을 떨어트렸다. 웬만한 실수를 하지 않고서야 잘 볼 수 없는 시무룩한 표정에 유키가 화들짝 놀라 그림을 달랬다.
“그럴 리가! 그림은 나 옷 갈아입고 나올 때까지 에펠의 말동무를 해 줄래? 그리고 사진 찍을 땐 고스트들과 영화 보면서 나초 먹다가 내가 부르면 오는 거야. 알겠지?”
“알겠다구! 우하하, 나초다!”
“응. 착하다. 에펠, 나 옷 갈아입고 올게!”
“앗, 으응!”
유키가 옷을 갈아입겠다며 사진실 옆에 마련된 간이 탈의실 안으로 들어갔다. 그럼, 유키의 잠옷 차림을 보는 건가. 지난 번, 옴보로 기숙사에서 있었던 합숙에서도 보긴 했지만…… 에펠이 눈동자를 굴렸다.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다시 기고만장해진 그림이 소파 위로 폴짝 뛰어올라 에펠을 불렀다.
“에펠! 이리 와보라구.”
“하아…….”
“웬 한숨이야? 혹시 많이 긴장한 거냐구!”
“아하하, 긴장은 안 했어. 정확히는 방금 풀렸다, 고 해야 할까나.”
정확히는 그림의 존재에 맥이 탁 풀린 것에 가깝지만, 그거나 그거나였다.
“그래? 괜찮다구! 유키도 어제까지 긴장 많이 했으니까!”
“엇, 유키도 긴장했어?”
“당연한 거 아니냐구!”
처음 듣는 이야기다. 매사에 여유롭고 명랑해 보이는 유키였기 때문에 자신의 생일 사진에도 에펠과는 달리 긴장 따위는 안 할 줄 알았다. 유키도 긴장을 하는구나…… 에펠이 작게 중얼거렸다.
“그림! 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랬지!”
“에펠 녀석의 긴장을 풀어주고 있는 거라구!”
간이 탈의실에서 유키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림도 똑같이 소리를 쳐 주었다. 에펠이 무의식적으로 귀를 막았다. 유키와 그림이 왁왁대는 것을 보았을 땐 절대 긴장한 사람 같지 않았다. 아, 이래서 남은 거구나. 에펠이 그리 생각하며 그림의 머리를 쓱 쓰다듬었다.
“익! 머리 만지지 말라구!”
“왜 유키는 되고 나는 안 돼?”
“유키랑 네가 같냐구!”
그림이 펄쩍 뛰었다. 에펠 녀석 이상하다구. 하며 꿍얼거리는 그림을 보고 에펠이 키득키득 웃었다.
그러는 동안 간이 탈의실의 가벽 너머에서 유키가 나타났다. 고양이가 프린팅된 병아리색 실크 파자마 차림이었다. 바지 파자마는 지난번 밤샘 공부회 때 입었던 낡은 원피스와는 다른, 완전한 새것이었다. 그림이 다시 소파에서 뛰어내려 유키에게 총총 달려갔다. 그림도 이 파자마를 입은 모습은 처음 보는 듯 신기하다는 얼굴로 유키 주위를 맴돌았다.
“히히, 옷 어때? 귀엽지. 생일이라서 좀 무리해서 좋은 걸로 사 봤어. 파자마는 자주 입으니까.”
“쳇, 나님이 골랐던 회색 쪽이 더 예쁘다구!”
“어쨌건 옷 색깔은 생일자 마음이야. 그림. 네 생일 때 회색 파자마를 사줄게.”
“굳이 입는 거라면 털 색깔이랑 다른 게 좋다구!”
“알겠어, 알겠어. 그럼 그림은 병아리 동물 잠옷을 해 줘야겠다.”
유키가 농담에 왁왁대는 그림의 엉덩이를 두드려 내보냈다. 좀 있다가 참치 캔도 줄게, 하는 회유에 그림이 어깨를 높이 들어 올린 채 나갔다. 유키가 여전히 웃는 얼굴로 어정쩡하게 소파에 앉아있는 에펠을 보았다.
“사진 찍는 법은, 알지?”
“어, 응…….”
“일단 가볍게 한 장 찍어볼래?”
제안에 에펠이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키가 그림 모양의 쿠션들 사이에 누웠다. 에펠이 뷰파인더 너머로 유키를 쳐다보았다. 렌즈 안으로 유키가 선명히 보였다. 무의식적으로 셔터를 누르며, 에펠이 유키에게 질문했다.
“이 쿠션들은 누가 만든 거야? 고스트들?”
“고스트들이랑 내가. 만드느라 고생 좀 했지.”
“왜 하필이면 그림 모양이야?”
질문을 듣고 유키가 작게 웃었다. 아, 이 얼굴은 찍어야겠다. 생각이 들어 셔터를 눌렀다. 찰칵, 하는 소리 사이로 유키가 대답했다.
“우리는 둘이서 하나의 학생이니까? 나는 ‘감독생’이기도 하고.”
“그림의 반응은 어땠어?”
“실물이 훨씬 귀엽다고 난리쳤지, 뭐. 바보 고양이 같으니라고.”
“아하하, 그림답네.”
사진을 네댓 장쯤 찍었을 때 유키가 에펠에게로 손을 뻗었다. 에펠은 자신도 모르게 유키에게 고스트 카메라를 건네주었다. 에펠이 찍은 사진을 한 장씩 넘겨 보며 유키가 질문했다.
“긴장은 좀 풀렸어?”
“에, 긴장?”
“응. 그림이 있을 때까진 괜찮더니, 그림이 나가고 나니까 긴장했잖아.”
“그랬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다. 에펠은 찍힌 사진 한 장 한 장을 세세히 살펴보는 유키의 얼굴을 홀린 듯이 쳐다보았다. 유키는 대체로 항상 예뻤지만, 에펠은 무언가에 집중하는 표정이 가장 좋았다. 유키는 한참을 사진 한 장을 보더니 카메라를 에펠에게 내밀었다. 얼결에 카메라를 받은 에펠은 당황하여 액정에 띄워진 사진 대신 유키를 바라보았다.
“어…?”
“에펠, 너 엄청 사진 잘 찍는다. 사진 엄청 잘 나왔어.”
“그래? 다행이다.”
유키가 심각하게 사진을 들여다보며 중얼거렸다. 실물보다 사진이 백 배 예쁘게 나왔잖아… 사기 수준이라고. 이거. 에펠이 사진을 보는 유키에게 질문했다.
“그런데, 유키는 내가 사진을 괜찮게 찍을 줄 알았던 거야?”
포트폴리오랄 것도 없고, 매지카메에 올려둔 사진들은 다 엉망이었는데…… 에펠이 웅얼거렸다. 유키가 그 말에 현실로 돌아온 듯 고개를 반짝 들고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그냥, 에펠이 찍어줬음 해서 에펠한테 부탁한 건데.”
“엣.”
“에펠 앞이면 긴장을 좀 덜 할 거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응, 무엇보다도?”
“에펠이 보는 나는 어떤지 궁금했어.”
이렇게 예쁘게 보고 있었구나? 유키의 농담에 에펠의 볼이 붉게 물들었다. 유키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사진은 순간의, 시선의 박제다. 그 사람을 보는 관점의 창. 유키는 그 말을 믿었다. 애정을 가진 피사체를 찍은 사진에는 애정이 묻어있는 법이다. 완벽한 구도와 셔터 찬스로도 묻어나오지 않는, 애정이.
눈치 못 채서 다행이다.
핑계는 그렇게 댔지만, 그냥 내가 에펠을 좋아해서 에펠에게 부탁한 거였는데. 유키는 웃으며 뒤돌아 침대 쪽으로 걸어갔다.
“그럼 오늘 잘 부탁할게.”
유키가 뷰파인더 너머의 눈을 보고 웃었다.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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