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빌유키] 오후 세 시의 티타임 #2

<span class="sv_member">린더</span>
린더 @frauroteschuhe
2025-11-24 20:24

Scene #2. 마카롱과 얼그레이

 




유키가 냉장고에서 종이 상자를 꺼냈다. 하얀 종이 상자에는 검은색으로 파티셰리의 로고가 찍혀 있었다. 미장의 거리에서도 구움 과자류로 유명한 파티셰리였다. 상자 안에는 색색의 마카롱이 가득했다. 분홍색, 노란색, 갈색……. 양을 보아하니 그 가게에 존재하는 마카롱 종류를 모두 짝을 맞춰 사 온 모양이었다. 유키는 한 쌍씩 가지런히 놓인 마카롱을 보며 푸스스 웃었다. 짧은 영화제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빌이 이 마카롱 박스를 주며 한 말이 생각나서였다.

 

선물이야.”

, 선물이요?”

비싸고 예쁜 것보다는 그곳에서만 파는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기념품이라 하긴 뭣하지만.”

 

유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빌을 바라보았다. 유키의 침묵이 길어질수록 빌의 완벽한 표정이 서서히 무너져갔다.

 

…….”

사실, 진짜.”

진짜 최고의 선물이에요! , 잊지 않았군요?”

무엇을?”

내일의 약속을요!”

 

그 때 빌의 당황한 표정, 절대 잊지 못할 거 같아. 가벼운 말 한 마디에도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의아한 표정을 그대로 내보이는 얼굴을 생각하니 웃음이 참아지질 않았다. 유키는 킥킥 웃으며 마카롱을 꺼냈다. 유키와 특별히 약속한 것이 없었던 것 같은데, 무얼 잊었지? 아마 빌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을 테지. 어쩌면 당연하다. 이제 셴하이트 부부에게 수요일 오후의 티 타임은 굳이 약속하지 않아도 함께하는,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그러므로 빌 셴하이트가 눈살을 찌푸리며 입을 다시 연 것은 두 사람 사이의 정적이 조금 길다 싶어졌을 때였다.

 

혹시, 티 타임 이야기하는 거니?”

! 그것 말고 또 뭐가 있겠어요?”

하아, 나는 또, 잊은 약속이 있는 줄 알았잖니. 너와의 약속을 잊을 리 없는데도. 그건 티 타임을 위한 게 맞아. 진짜 선물은 따로 있지.”

 

왠지 김이 빠진 목소리였다. 잔뜩 긴장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말투에 유키가 씩 웃었다. 혼자 미장의 거리에 다녀온 빌을 놀려주려고 한 것은 아니었지만, 이런 의외의 즐거움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유키가 마카롱 박스를 들고 냉장고로 향했다. 빌의 시선이 유키를 향했다.


그러니까요! 빌이 잊지 않을 줄 알았어요. 그리고 이곳의 마카롱, 무척 맛있다고 들었으니까 꼭 한번 먹어보고 싶었단 말이에요.”

좋다면 됐지만…….”

 

빌이 조금은 허탈한 표정으로 유키를 바라보았다. 유키가 마카롱 박스에 박힌 로고를 들여다보며 들떠 조잘거렸다.

 

내일 뭘 같이 마실까요? 레이디 그레이? 으음, 그건 너무 향이 강할지도. 다즐링은 떠나기 전에 이미 마셨고, 아예 허브티로 할까요?”

진정해, 유키.”

빌이 생각해서 사다 준 거니까 완벽한 페어링을 찾고 싶어요. 내일 오후를 완벽하게 만들어줄 한 잔을요.”

 

유키의 말에 빌이 헛웃음을 지었다. 작은 마카롱 선물에도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기쁘긴 하지만, 작은 머리를 저렇게까지 굴리며 고심할 일로는 보이지 않았다. 당연한 일 아닌가. 마카롱은 티 타임을 세 번 정도 열 수 있을 정도로 양이 많고, 빌의 홍보 일정은 얼마 남지 않았으니 마카롱과 차를 페어링할 시간도 충분하다. 그리고 유키가 고대하는 티타임은 내일이지 않은가. 지금 당장 고민해야 할 일도 아닌데, 가지런히 정리해둔 실링 백들을 쳐다보는 모습이 어이가 없기도 했지만, 역시 조금은 귀여웠다.

 

그렇게 진지해질 일이니?”

그럼요? 일주일에 하루, 빌과 함께하는 가장 중요한 날인데요.”

하아…… 그럼 나도 진지하게 답해줘야겠네. 기쁜 건 알겠는데, 마카롱의 종류를 무척 다양하게 사 왔으니까, 모든 마카롱과 다 어울리는 차를 찾기는 거의 불가능. 마카롱이나 차의 종류를 먼저 정하고 그에 어울리는 것을 정하는 게 더 빠르지 않겠어?”

으으, 빌 말이 맞아요. 상자를 여는 건 내일의 기쁨으로 두고 싶은데. 어쩌죠?”

그리고, 유키. 뭔가 잊어버린 게 없을까?”

제가 뭘 잊어버렸나요?”

 

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빌을 올려다보았다. 이런 천진해 보이는 얼굴이 사랑스럽긴 하다만은, 역시 돌아온 남편보다 마카롱을 반기는 건 질투가 났다. 작고 달콤할 뿐인 과자. 겨우 그런 것에 천하의 빌 셴하이트가 질투를 하다니, 빌을 아는 영화계 관계자들이 듣는다면 웃을 이야기다. 그렇지만 이 아이와 관련되면 무엇이든 신경 쓰이기 마련이다. 특히 마카롱이라 하면,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니까.

 

무사 귀환을 축하하는 키스는 없는 거니?”

위험한 일정도 없었으면서.”

아아, 유키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구나? 그래, 내가 그립지도 않았을 테지. 이제 완전히 손에 넣었다 이거니? 정말이지, 여자의 사랑한다는 말은 믿을 게 못 된다더니…….”

아이, 할게요! 해 주면 되잖아요!”

 

놀리는 듯한 말투에 유키가 빌을 밉지 않게 노려보며 그에게로 가까이 다가섰다. 허리를 숙여준 그의 목을 끌어안고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

 

다른 쪽 볼에는?”

 

그 말에 유키가 빌의 턱을 붙들었다. 입술이 반대편 볼에 쪽, 붙었다가 떨어졌다. 턱에서 손을 떼지 않고 빌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날렵한 콧등과 남자다운 이마에도 입술 도장을 찍었다. 얼굴을 좀 떨어뜨려 장난스레 웃는 입술을 노려보았다.


그렇게 놀려 놓고선, 내가 빌이 뭐가 그리 예쁘다고 입술에까지 키스를 해 줘야 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유키는 가볍게 제 입술을 빌의 입술에 내리눌렀다. 작은 혀를 내어 그의 입술을 할짝거렸다. 빌은 도무지 입술을 열어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유키는 빌의 아랫입술을 아프지 않게 물어 당겼다. 이래도 키스 안 해줄 거예요? 이래도? 말로 옮기자면 그런 투정이었다.


유키가 투정 부리고 있다는 것을 눈치챈 빌이 속으로 작게 웃었다. 어째 10년 전보다 지금이 더 참을성이 모자란 것 같아. 그런 생각을 하며 빌이 입을 벌렸다. 입술이 단단히 맞붙고 두툼한 혀가 제 연인을 찾아 몸을 휘감았다. 타액이 서로 섞이는 것이 느껴졌다. 빌을 기다리며 사탕이나 젤리라도 찾아 먹었는지 입에서 유치하고 달콤한 맛이 났다.


원하는 만큼 휘저은 빌이 맞붙은 입술을 떼어냈다. 숨을 할딱이는 유키를 놀리듯 속삭였다.

 

젤리 먹었지? 어린애들 좋아하는 그거. 먹지 말라고 했는데, 정말이지.”

……혼내실 거예요?”

그럴 리가.”

그러면?”

일단 우리 둘 다 씻고 나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네. 네 입술, 내 립이 잔뜩 묻었어.”

 

그리고 그 이후엔…… 유키는 떠오르는 어젯밤의 기억을 애써 내리누르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지금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젯밤은 결국 서로를 끌어안느라 다음 날에 마실 차 종류나 먹을 마카롱의 종류를 한 가지도 정하지 못했다. 곧 있으면 빌이 운동하고 돌아올 시간인데, 어쩌지. 잠시 고민하던 유키의 시선 안으로 은색 찻잎 봉투가 하나 들어왔다. ……너무 무난한 선택이긴 하지만, 오늘은 이걸로 하자. 유키는 발개진 볼을 제 손으로 식히며 어울릴 만한 마카롱을 골라냈다.

 

 

* * *

 

 

마카롱을 골라내 보니 딱 다섯 종류가 나왔다. 마카롱을 탑 모양으로 쌓아 접시에 냈다. 애프터눈 티에 곁들일 디저트로 마카롱 다섯 개라, 양이 좀 적어 보이긴 했지만 뭐 어떤가 싶었다. 점심을 든든히 먹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오늘은 저녁을 일찍 먹을 거니까. 유키는 빌과 함께 하기로 한 저녁 약속을 떠올렸다. 새로 문을 연 비스트로에 함께 가자 했었지. 빌의 촬영이 끝난 이후에도 집 안에서 영화나 봤지, 바깥 데이트는 꽤나 오랜만이다. 저녁 약속을 떠올리니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어제 귀국해서 빌도 피곤할 텐데, 티타임에 저녁 약속에꼭 고맙다고 해야겠어. 그리 생각하며 유키가 마카롱을 접시에 하나씩 담을 무렵,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유키가 현관으로 뛰어가 마중했다.

 

, 왔어요?”

. 내가 너와의 약속에 늦을 리가 없잖니?”

 

시계를 흘끗 쳐다보니 시각은 두 시 오십 분이었다. 유키가 쿡쿡 웃었다. 빌의 늦을 리 없잖니?’ 하는 말은 자기 확신이기도 하지만 안도의 표현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유키는 마카롱이 든 접시를 내어 티 테이블이 있는 거실로 걸어갔다. 집 안으로 들어온 빌이 유키의 차림새를 보고 걸음을 멈췄다. 유키의 차림새를 눈으로 한번 쓱 훑더니 말했다.

 

오늘은 그 원피스를 골랐구나. , 잘 어울려.”

빌이 골라준 건데 어울리지 않을 리가 있겠어요?”

하긴, 내 아내는 내가 제일 잘 알지.”

 

가볍게 말하며 빌이 홍차를 끓일 물을 준비하러 부엌으로 들어갔다. 등 뒤에서 달그락거리며 마카롱이 든 접시를 놓는 소리가 들렸다. 물이 끓고, 그는 미리 덥혀놓은 찻주전자와 유키가 준비한 차를 가지고 티 테이블로 향했다.

 

얼그레이라니, 고전적인 선택인걸.”

향이 너무 강하지 않으면서도 적절히 마카롱의 과일 크림과 잘 어우러질 법한 것을 고르다 보니, 결국 무난한 것을 고르게 되더라고요.”

대중적인 선택도 가끔은 좋지. 늘 말하지만, 클리셰가 클리셰가 된 데에는 이유가 있는 법이니까.”

 

유키는 홍차를 우려내는 빌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빌이 저렇게 다정할 때마다 괜히 유키는 입을 다물고 발장난을 치게 된다. 이 또한 오랜 버릇이다. 그 앞에 서면 괜히 단정하고 어른스럽게 보이고 싶었던 어린 날부터 이어져 온, 오랜 버릇.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빌이 유키를 돌아보았다. 어쩐지 감상에 빠진 표정이었으나 빌은 굳이 그 표정의 이유를 묻지 않았다. 유키의 얼굴을 보자마자 그들이 처음 만났을 적의 일을 떠올린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빌은 유키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묻지 않았다. 대신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타이머를 맞춰둘 테니, 내가 돌아오기 전에 휴대폰이 울리면 거름망을 건져 올려 줘.”

, 어디 가요?”

잠시 안방에. 줄 게 있거든.”

어제 말한 진짜 선물’, 맞죠?”

 

유키가 눈을 찡긋해 보였다. 정말이지, 눈치만 빨라서는. 빌은 유키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휴대폰 타이머를 맞추고 안방으로 들어가는 빌을 보며, 유키가 찻주전자에 시선을 주었다. 유키가 휴가를 내지 못해 미장의 거리에 혼자 다녀올 때마다 빌은 선물을 하나씩 사 왔다. 유키에겐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싼 선물이었지만, 빌은 별로 개의치 않는 것처럼 보였다.


정리해둔 짐 속에서 진짜 선물을 찾는 것이 제법 오래 걸리는 모양이었다. 빌의 핸드폰 타이머가 울렸다. 빌은 찻주전자 안의 거름망을 빼내어 부엌으로 가져다 두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

깊숙한 곳에 숨겨뒀거든.”

 

그런 말을 하면서 빌이 유키에게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미장의 거리에 본점이 있는 주얼리 브랜드의 로고가 상자에 양각되어 있었다. 주얼리에는 취미가 없어 브랜드를 알아보지 못한 유키가 한참 동안 로고를 쳐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이건 뭐예요?”

열어보면 알 것 아니니?”

그건 그렇지만.”

 

또 말도 안 되는 가격의 무언가를 사왔을까 싶어 유키는 점점 두려워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반지 사이즈가 아니라는 점일까. 주얼리류는 상자가 작을수록 비싸지는 게 보통이므로. 자기 연봉을 들이부어도 살 수 없는 것이라면 받지 않겠다고 했었는데, 분명. 유키는 조금 긴장하며 매여 있는 하얀 리본을 풀었다. 빌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유키의 잔에 홍차를 따라주었다.


상자 안에는 목걸이가 있었다. 반짝이는 자색 사파이어가 달린 백금 목걸이. 유키는 목걸이를 한참 내려보다가, 시선을 올려 빌을 빤히 보았다. 시선에 빌이 조금 초조해진 듯 말했다.

 

생일 선물 겸 사 온 거야. 곧 있으면 네 생일이니까.”

빌 생일이 먼저 오는 거, 알고는 있죠……?”

그러니 내 생일 선물도, 기대할게?”

 

빌이 그리 말하며 씩 웃었다. 황홀한 미소였다. 유키가 홀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뭔가 생각난 듯 자색 사파이어와 빌을 번갈아 보았다. 빌의 눈에서 보석을 닮은 보라색 눈동자가 빛난다. , 그래서. 유키가 생글생글 웃으며 천천히 말했다.

 

고마워요, .”

……흠흠. 지금 입은 옷과도 목걸이가 잘 어울릴 것 같구나. 목걸이를 걸어줘도 될까?”

영광이죠.”

 

빌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을 보고 유키는 목을 덮는 머리카락을 높이 묶었다. 어깨가 파인 원피스 덕분에 섬세한 목과 어깨선이 한 눈에 보였다. 어떤 자국도 남지 않은 하얀 목이 무척 연약해 보였다. 깨물어 자국을 남길걸.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빌은 곧 생각을 털어낸다. 설원은 누구도 밟지 않은 상태일 때 가장 아름다운 법이다. 게다가 자국이야 시간이 지나면 사라지지만, 목에 걸린 목걸이는 사라지지 않는다.


아마 유키도 이 목걸이가 의미하는 바를 얼마간 눈치챘을 것이다. 그야, 너무 노골적인 어필 아닌가. 줄은 샴페인 골드, 포인트가 되는 펜던트는 바이올렛 사파이어. 각각 빌의 머리카락 색깔과 눈 색깔이다. 유키라면 목걸이를 보고 언제나 함께 있지는 못하지만, 이 목걸이를 보면서 함께 있다고 생각해줘.’ 같은 생각으로 선물했다고 생각하겠지만…….

 

확실히 그것보다는, 조금 더 무거운 마음이지.’

 

반짝이는 백금 목걸이는 생각보다 무게가 있었다. 목걸이의 의미는 가볍고 산뜻한 사랑의 표현에 딱 이 목걸이만큼의 무게가 더해진 것이다. 그런 산뜻한 의미도 없진 않지만, 결국에는 영역 표시다. 아마 오늘쯤에는 빌 셴하이트가 아내를 위해 제작한 목걸이라는 이름의 광고성 기사가 날 것이고, 그 광고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목걸이를 걸고 있는 유키가 빌의 부인이라는 것을 눈치챌 테다.

목걸이 후크를 걸고 빌이 한 걸음 물러섰다. 섬약한 목에 걸린 백금 목걸이가 반짝거렸다. 거울을 못 보기에 제 모습을 확인할 수 없는 유키가 고개를 돌려 아무 말 없는 빌을 바라보았다.

 

, 어때요? 괜찮아요?”

성격도 급하지. 나는 아직 제대로 보지도 못했는데?”

 

놀리자 유키가 민망한 듯 눈을 굴렸다. 그러고선 아예 몸을 돌려 의자에 가로로 앉아 빌을 빤히 바라보았다. 눈이 칭찬을 기다리듯이 반짝였다. 제가 고른 것이 유키에게 어울리지 않을 리도 없지만, 안 어울린다고 말하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빌이 허리를 굽혀 유키와 눈을 맞췄다.

 

. 잘 어울리네.”

 

손을 뻗어 삐져나온 잔머리를 정리해주며 말했다.

 

포니테일이나 풀어헤치는 것보다는 머리카락은 틀어 올리는 게 좋겠어. 화장은 조금 더 진하게 해도 괜찮을 것 같고.”

 

유키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빌이 손을 뻗어 가볍게 묶은 머리카락을 틀어 올려 주었다.

 

. 완벽해.”

 

빌은 며칠간을 고민하며 그리다 결국 완성해낸 작품을 보듯 유키의 모습을 감상했다. 유키가 멋쩍게 말했다.

 

집 근처 비스트로 가는 게 아니라, 어디 레드카펫에라도 서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에요.”

어림도 없는 소리 말렴. 영화제의 타피 루즈를 밟으려면 이걸로는 부족해. 일단 의상부터 이런 이브닝 드레스가 아니라 제대로 된 드레스를 입어야 하고.”

말이 그렇다는 거죠.”

 

유키가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빌이 웃으며 제 자리로 돌아갔다.

 

원한다면 데려가 줄게.”

레드카펫 밟는 게 아니고, 일반 참여라면야…….”

저런,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는 거니? 실사판 ‘Beautiful Queen’ 때 일을 말이야.”

 

순간 유키의 머릿속에 그 때의 영상이 떠올랐다. 실사판 Beautiful Queen. 빌과 함께 처음으로 미장의 거리에서 열리는 영화제를 갔을 때의 일이다. 빌 셴하이트의 등장에 몰린 어마어마한 인파에 밀리지 않고 타피 루즈를 걷는 빌의 곁에서 사진을 제대로 찍어야 했었지. 유키가 작게 치를 떨었다.

 

, 안 데려가면 되잖니. 그렇게 떨지 말렴.”

 

유키가 치를 떠는 것을 두려움에 떠는 것으로 착각하기라도 했는지 빌이 웃었다. 적당히 식은 차를 한 모금 마신 빌이 조그만 마카롱 타워 맨 위에 있는 라즈베리 마카롱을 입으로 가져갔다. 빨간 코크 사이에 라즈베리 필링이 들어간 마카롱이었다. 그러고 보니, 에펠도 마카롱을 좋아했는데. 유키는 제 몫의 마카롱을 입으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그러고 보니, 에펠도 마카롱을 좋아했었죠.”

 

코크는 쫀득했고 필링은 새콤달콤했다. , 잘 만들어진 마카롱이구나. 그렇게 생각하며 홍차를 마시려는데, 빌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살짝 언짢은 표정이었다. 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빌은 마카롱이 마음에 들지 않은 건가? 이렇게 맛있는데? 유키가 그런 생각을 떠올리며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빌한테는 말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에펠은 마카롱보다는 바비큐를 좋아한대요. 빌은 처음 듣죠?”

그걸 몰랐을 리가. 그냥, 그 때는 그 애에게 마카롱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필요한 시절이었으니까 그렇게 하라고 했을 뿐이야.”

 

화제를 돌렸음에도 빌은 여전히 기분이 썩 좋지 않아 보였다. 마카롱이 문제가 아니었나? 그럼 뭐가 문제지? 유키가 의아한 얼굴로 빌을 빤히 쳐다보았다. 빌은 유키의 시선을 무시하려다가, 결국 한숨을 쉬며 속마음을 토해냈다.

 

그러니, 이제 에펠의 이야기는 그만 하지 않겠어?”

, , 설마 에펠이랑 싸웠어요?”

 

유키는 며칠 전 에펠과의 통화를 떠올렸다. 풍작촌의 사과를 홍보하러 미장의 거리에서 열리는 다른 행사에 부스를 낸댔나. 시기가 영화제와 겹쳐서 그 쪽으로 관심이 다 쏠렸다며 우는 소리를 했었다. 빌이 유키의 질문에 코웃음을 쳤다.

 

에펠과 싸우다니. , 그 작은 감자가 나에게 제대로 된 싸움이나 걸 수 있는 상대니?”

그런데, 왜 에펠 이야기를……?”

 

빌이 한숨을 푹 쉬었다. 도대체 어디까지 하려는 걸까, 이 아이. 그러나 곧 유키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떠올려냈다. 당연하다. 유키는 학창 시절에도 자신을 좋아하는 남자아이들의 존재를 몰랐으니까. 자신과 가까운 이들의 연애감정은 전혀 몰랐고, 가끔 고백을 받으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며 거절하곤 했다. 빌은 그 좋아하는 사람이 도대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고민하던 나날들을 떠올렸다. 역시 직접 말하지 않으면 모르는구나. 이 아이.


빌이 가볍게 설명했다.

 

그야, 당연히 에펠이 사랑스러우니까, 가 아니겠니.”

그거랑 그게 무슨 상관…… , 맙소사. , 설마 에펠을 질투해요?”

안 할 리 있겠어?”

 

빌이 픽 웃으며 농담처럼 던졌다. 유키의 표정이 한순간에 시무룩해졌다. 항상 네쥬에게 주역을 빼앗기던 청소년기. 빌은 자신이 이기지 못한다면 다른 존재를 이용해서라도 네쥬에게서 주역을 빼앗아오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용된 사람이 에펠이고. 빌은 에펠의 사랑스러움마저도 질투하는 걸까? 아직 그는 빌과 좋은 관계를 쌓아오고 있어서, 유사시에 빌이 사용할 수 있는 임에도?

 

그렇지만 그런 건 아니란다.”

? 무슨, 뜻이에요?”

에펠은 네 가장 친한 친구잖니.”

 

빌이 쓴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남자지.”

 

그제서야 유키가 이해하고 작은 탄성을 질렀다.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서 공부하던 4년 동안 유키와 에펠은 거의 항상 붙어 다녔기 때문이다. 그림을 제외하면 가장 오래 시간을 보냈다고 봐도 무방하다. 빌을 좋아하던 유키가 에펠을 핑계로 폼피오레에 자주 놀러가곤 했기 때문에. 에펠도 유키의 짝사랑을 알고 있었고 그 짝사랑을 가장 가까운 곳에서 응원했었다. 그런데, 빌이, 에펠을 질투해?

 

말도 안 돼요.”

왜 말이 안 되니? 세상에 일어나지 못할 일은 없단다. 너는 늘 에펠과 폼피오레 담화실에서 노닥거렸잖니.”

 

노닥거리다니. 물론 장난도 치고 놀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상황에서는 빌의 감독 하에 숙제나 공부를 했다. 가끔 귓속말도 하고 농담도 한 것은 맞지만! 그렇다고 아주 놀기만 한 건 아닌데! 유키가 항변했다.

 

노닥거리지 않았거든요? 그리고 에펠도 에펠이지만, 결국에는 빌을 보러 간 건데요.”

그래. 그건 알고 있단다.”

그걸…… 어떻게?”

모르는 게 바보지. 유키.”

 

빌이 빙그레 웃었다. 한 번도 빌에게 그것에 대해 말한 적 없는데! 왜 알고 있는 거지? 유키는 혼란스러운 표정을 하고선 빌에게 질문했다.

 

아니, 그것보다그걸 알면서도 에펠을 질투한다고요?”

, 그러면 안 되니?”

 

빌이 악역 전문 배우다운 소름 끼치는 미소를 지었다. 유키가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입을 우물거렸다. 손에는 블루베리 마카롱을 든 채였다.

 

아니, 그럴 필요가 없잖아요?”

그럴 필요는 내가 판단하는 거지, 네가 판단하는 게 아니란다.”

 

유키가 황당한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에펠의 이상형은 유키와 닮은 구석이 있지만, 당시의 에펠은 연애에 별로 관심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더 남자답게보일 수 있을지 골몰하던 쪽이었다. 에펠은 자신의 예쁜 얼굴이나 작은 체구, 사랑스러운 몸짓 등을 싫어했으니까. 그가 동경하던 것이 제 기숙사의 기숙사장이 아닌 사바나클로의 기숙사장 레오나 킹스칼라였으니 말 다 했지. 유키는 황당하여 빌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튼, 에펠에게도 마카롱을 한 박스 전해줬으니 그건 걱정하지 말렴. 대충 다 이해한 것 같으니 이제 에펠 이야기를 그만해도 될까?”

아니, 아니요……. 저 궁금한 거 남았어요. 언제부터 질투했는데요?”

에펠을 혼내는데 네가 에펠의 역성을 들었을 때부터?”

 

그럼 처음부터다. 빌과 유키는 유키가 혼나는 에펠을 위해 빌에게 말을 걸었을 때 처음 이야기를 나눠봤으니까. 유키는 또다시 황당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잖아요?”

첫 눈에 반했다는 말, 안 믿었니?”

그걸 어떻게 믿어요? 상황이 상황이었잖아요.”

내가 너한테 거짓말을 왜 하니?”

 

빌이 픽 웃었다. 유키가 빌을 빤히 쳐다보았다. 아니, 당연히 내게 거짓말 할 이유는 없지만……. 그걸 누가 믿겠어요. 유키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오히려 서운한걸. 그동안 내 말을 안 믿고 있었다니 말이야.”

저 기분 좋게 해 주려고 하는 농담인 줄 알았다니까요.”

오늘 말하지 않았더라면 영원히 농담으로 생각했겠구나.”

그렇죠? 아마도.”

……차나 마시렴.”

 

빌이 한숨을 푹 쉬었다. 당당하게 저런 말을 하는 유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기 위해 마카롱과 차로 입을 틀어막았다. 입에 들어간 분홍색 딸기 마카롱이 너무 달았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