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빌유키] 남친셔츠는 좋아하세요?

<span class="sv_member">린더</span>
린더 @frauroteschuhe
2025-11-24 20:15

현관의 센서등이 반짝 켜졌다. 빌 셴하이트는 당황스러움에 잠시 움직임을 멈췄다. 밤늦은 시간임에도 거실의 등이 환히 켜져 있었기 때문이다. 분명 저녁쯤 전화로 오늘도 늦으니 기다리지 말고 자라고 했던 것 같은데. 빌은 미간을 살짝 좁혔다. 그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시각은 새벽 258. 주차하고 올라오는 데에 시간이 걸렸으니 지금은 35분쯤 되었을 테다. 아침까지 촬영이 계속되어 아예 들어오지 못했다면 어쩌려고 했던 건지 모르겠네, 이 바보는. 연인은 거실에서 빌이 오기를 기다리다 잠든 것이 분명했다. 깨어있었더라면 문이 열리는 소리에 바로 뛰쳐나왔을 테니. 세상 모르고 졸고 있을 말간 얼굴을 생각하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실내화를 신고 거실로 들어가자 바로 하얀 머리꼭지가 보였다. 연인은 카우치에 쪼그려 앉은 채 세상 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불편한 자세로 새우잠 자는 모습이 안쓰럽기도 했으나, 도대체 몇 시간을 저러고 있었을지 생각하니 답답한 마음이 앞섰다. 빌은 빠른 걸음으로 유키에게 다가가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유키가 무거운 눈꺼풀을 억지로 들어 올렸다.

 

오셨어요…….”

먼저 자라고 했잖아.”

얼굴, 보고 자고 싶어서.”

 

유키가 배시시 웃으며 빌의 손에 제 뺨을 문질렀다. 방금 잠에서 깨어난 탓인지 볼이 묘하게 따끈했다. 애교스러운 몸짓에 당장이라도 쏟아져 나오려던 잔소리가 쏙 들어가 버렸다. 예나 지금이나 이 아이에게는 못 당해내겠네. 빌은 몸을 숙여 유키와 눈을 맞췄다. 눈이 마주치자 연인은 제 눈을 접어 방긋 웃었다. 괜히 기분이 몽글몽글, 마음이 이상해진 탓에 빌은 눈을 피하며 말을 쏟아냈다.

 

그래도 다음부터는 먼저 자려무나? 정말, 날씨도 추워지는데, 옷도 얇게 입고 뭐하는 짓이니.”

보일러 들어오니까 괜찮아요.”

정말이지, 고분고분 대답하는 날이 없어.”

그런 점도 좋아하시면서.”

한 마디도 안 지려 들고 말야.”

 

불퉁한 목소리에 유키가 여전히 볼을 쓰다듬던 빌의 손을 두 손으로 잡고 손바닥에 키스했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당황하면서도 손을 빼려 들지 않는 그가 어쩔 수 없이 사랑스러웠다. 유키가 여전히 세워둔 무릎을 내려 다리를 폈다. 잠기운이 가신 눈이 장난기로 반짝였다.

 

유키, . 그 옷.”

이제 눈치채다니. 서운해요, .”

너라는 애는 정말……!”

원피스 같지 않아요?”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생글생글 웃는 모습이 귀엽기는 했지만, 빌은 도저히 그 모습을 귀엽다고 해줄 수 없었다.

 

기가 막혀. , 한참은 큰 옷을 입어놓고 칭찬해 주길 바라는 거니? 이 나에게?”

이상하다. 다들 귀여워할 거라고 했는데.”

옷에 잡아먹힌 꼴이 뭐가 귀엽다고……!”

 

옷이 흘러내려 어깨라던가 속살이 다 들여다보이질 않는가! 빌은 제 파자마를 입은 유키를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의 파자마도 다 흘러내리는 상의만 입고 하의는 입지 않아 맨다리였다. 요즘은 좀 얌전하게 지낸다 싶더니, 잠잠하다 싶으면 꼭 이렇게 바보 같은 짓을 한다. 이 바보가. 내가 오늘 집에 안 들어왔으면 정말 어쩔 뻔했어! 머리가 살살 아파 오는 것을 느끼며, 빌은 유키의 어깨를 붙들었다.

 

그것보다, 이 꼴을 다른 사람에게 보인 거니?”

이걸 다른 사람한테 어떻게 보여줘요!”

그 정도의 분별은 있는 것 같아 다행이구나? 내가 오늘 집에 못 왔을 경우에 대한 대책은 생각도 안 한 주제에. 감기라도 걸렸으면 어쩌려고

걱정했어요?”

걱정 안 하게 생겼니?”

나는 선배가 나 걱정해 주는 게 그렇게 좋더라.”

앞으로도 이러시겠다?”

그런 말은 한마디도 안 했어요!”

 

억울한 듯 소리치며 유키가 히히 웃었다. 장난기 어린 웃음에 빌도 어쩔 수 없다는 듯 마주 웃어줄 수밖에 없었다. 정확히는 벅차오르는 행복감에 새어나오는 미소를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무척이나 고생스러웠던 날도 사랑하는 이가 그렇게 일을 마치고 오는 그를 맞아준다면 그리 힘들게 느껴지지 않았다. 유키가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향해 팔을 벌렸다. 빌은 연인을 꼭 껴안았다.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작은 체온이 저항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유키가 그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귓가에 간지러운 목소리가 재재대며 울렸다.

 

고생했어요, . 이거, 깜짝 이벤트였는데, 잠들어 버렸네요.”

이벤트? 기념일은…….”

. 한참 남았죠. 그래도, 요즘 너무 피곤해 보이길래.”

컨디션은 항상 만전인데 말이지?”

마음의 컨디션 말이었어요.”

 

빌은 입을 꾹 다물었다. 몇 주 전 크랭크인한 영화는 일정이 말도 안 되게 빡빡했다. 그 탓인지 스태프들도 예민했고 촬영장 분위기도 몹시 날 서 있었다. 그에 영향받지 않으려 애를 쓴 것 마저도 은연중 스트레스가 된 모양으로 빌은 전에 없던 심적 피로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걸 유키에게까지 들킬 줄은 몰랐는데. 빌이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유키가 후후 웃으며 그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어떻게 알았냐고는 하지 마요. 그 정도는 저라도 알 수 있다고요?”

조만간 연기 레슨을 받아야겠네…….”

 

웅얼거리며 빌은 옷이 흘러내려 드러난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코를 묻었다. 익숙한 샤워 코롱의 베이스 노트가 코끝을 스쳤다. 내뱉는 숨마저 달콤하게 느껴졌다. 빌이 언젠가 수제 샤워 코롱을 선물한 이후 연인은 샤워를 마치면 늘 그것을 뿌렸다. 그 사실을 자각할 때마다 가슴이 기쁨으로 벅차올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신으로 뒤덮인 유키 화이트가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 없었다. 새삼스럽게 이 향을 깨달았던 어느 밤처럼 마음이 행복감으로 부풀었다.

 

아하하, 간지러워요.”

 

들이쉬고 내뱉는 숨결이 간지럽다며, 빌의 머리를 쓰다듬던 유키가 까르르 웃었다. 그 웃음소리에 괜히 마음이 무거웠다. 조금만 더 일찍 왔으면 좋았을 텐데. 그랬더라면 너를 기다리게 하지도 않고, 잠든 네가 아니라 이 옷을 입고 나를 맞아주는 너도 볼 수 있었을 텐데.

 

여전히 빌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유키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연기 레슨은 안 받아도 돼요. .”

일반인에게 간파당할 연기라면 받는 게 당연하지 않니.”

연기는 언제나 훌륭한걸요. 보는 것만으로는 나도 모를 정도로?”

……설마.”

찍은 것도 아니에요? 그냥, 느껴졌으니까.”

 

이게 무슨 소리야. 빌이 몸을 일으켜 유키를 보았다. 마법을 못 쓰는, 가진 것이라고는 빠른 눈치밖에 없는 작은 여자가 그를 보며 방긋 웃었다.

 

하아?”

그냥 알 것 같았는걸요. 제가 빌을 너무 좋아해서 텔레파시라도 통하나 봐요.”

하아, 유키.”

진짠데? 촬영이 즐겁다고 웃으면서 말하는데도 당신, 이상하게 피곤해 보였다고요.”

 

빌이 인상을 찡그렸다. 유키가 눈을 마주하며 입술을 쭉 내밀었다. 순간이었다. 뾰로통한 표정으로 빌을 바라보던 유키가 자신을 노려보는 눈 아래에 도장이라도 찍듯 입술을 가져간 것은.

 

유키.”

으응. 무서운 표정 하지 마요. 진짠데 어떡해?”

정말이지, 너는…….”

피곤하지 않아요? 빨리 씻고 자자구요.”

정말 씻기만 하고 자도 되겠어?”

피곤한 사람 건들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거든요. 내일도 일찍 나가야 하면서.”

 

유키의 얼굴이 다시 새침해졌다. 빌은 어이가 없어져 질문했다.

 

내일 촬영 없는 거, 알고 준비한 거 아니었어?”

……?”

 

정말 몰랐던 거야? 빌이 헛웃음을 지었다. 분명 처음에는 어이가 없어져 웃음이 났는데, 점점 갈수록 기분 좋은 웃음이 섞여 들어갔다. 원하는 만큼 웃은 빌은 유키의 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유키가 배시시 웃으며 큰 손에 머리를 기댔다.

 

정말이지, 대책이라고는 하나도 없고.”

……그래도 빌은 나 좋아하죠?”

그래, 그래요. 유키 씨? , 먼저 침실에 가 있어.”

잠들면 깨워 주셔야 해요.”

글쎄? 자는 사람 건들 만큼 파렴치한은 아니라서.”

이이익…….”

 

자신이 한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유키가 빌을 노려보았다. 따가운 시선마저 기꺼워진 빌은 상쾌하게 웃으며 욕실로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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