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빌유키] 커피 브레이크

<span class="sv_member">린더</span>
린더 @frauroteschuhe
2025-11-24 20:10

 

우산을 샀어야 했어.”

 

유키가 창밖을 쳐다보며 황망하게 중얼거렸다. 밖은 굵은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영하에 가까운 이 겨울날에 눈비가 이토록 내리는데 우산이 없었다. 비바람이 들이치는 낡은 고물 기숙사에 있던 우산으로 오랫동안 버틸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지만, 하루도 버티지 못하고 살이 꺾여 날아가 버리는 것은 심하지 않는가. 나름 멀쩡해 보였는데. 유키는 끌어안고 있던 그림의 머리 위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림이 유키를 올려다보며 불만스럽게 외쳤다.

 

그러니까 새로 사자고 했잖아! 맨날 잘난 척하더니 바보네, 부하 녀석아!”

우산을 새로 사러 가려도 해도 이 비를 뚫고 가야 하는걸. 그림을 비막이로 쓰고 갈까?”

이 몸은 네 우산이 아니라고! 감기 걸리면 네가 책임질 것도 아니면서!”

두 사람이 아픈 것보다 한 사람만 아픈 게 낫지 않아?”

그럴 거면 네가 내 비를 막아주면 되겠네!”

싫어!”

 

1층의 회랑을 지나던 학생들이 서문 현관 앞에서 아웅다웅거리는 둘을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마수와 감독생이 사는 고물 기숙사는 마법의 거울이 설치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저 콤비가 곤란해하는 것을 이해는 하나, 싸우는 내용이 무척이나 유치했기 때문이다. 서로 , 내 우산이 되라!’ 하며 다투는 꼴이 명문 고등학교에 다니는 열여섯살이라고 보기에는 심히 어려웠다. 옆에서 싸움을 말리거나 중재할 혹은 우산을 빌려줄!1-A반의 다른 둘은 하필 또 어디 갔는지 없어, 그 둘의 입씨름은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하하, 저 둘은 안 싸우는 날이 없나 보네.”

누구?”

마담 블랑셰와 그림. 오늘은 또 무슨 유치한 이유에서 저러고 있는 걸까.”

 

루크가 말을 마치며 작게 웃었다. 빌은 콧방귀를 뀌었다. 일과를 마친 이후 기숙사로 돌아가기 위해 1층으로 내려오던 참이었는데, 저렇게 싸우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이 지경으로 목소리가 커질 때까지 그 누구도 말리지 않았다는 뜻 아닌가. 물론, 저 조그만 마수와 감독생이 하잘것 없는 일로 다투는 일은 하루에도 대여섯번씩은 벌어지는 일이니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 대다수라는 사실을 빌도 알고 있었다. 당장 제 옆에 있는 부사감 루크도 둘을 말리기보다는 무슨 하찮은 이유에서 저렇게 언성을 높이는지 궁금해하지 않는가. 제가 관리하는 기숙사 학생도 아니고 빌에게도 저 녀석들을 말릴 이유는 없다. 그렇지만,


시끄럽잖아.’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회랑에서 저렇게 싸우는 것은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의 품위에도 영향을 미친다. 빌은 그렇게 생각하며 서문 현관 앞에 서 있는 바보 콤비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루크가 재밌는 일을 발견한 듯 입꼬리를 씩 올렸다. 분명히 타당한 이유가 있기야 있겠지만, 루크는 알 수 있었다. 빌이 단순히 타당한이유만으로 움직인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루크는 빌의 최측근이자 그에게 있어 최고의 팬이었다. 요사이 빌 주변을 흐르는 분홍빛 기류를, 그가 모를 리 없지 않은가. 빌이 듣는다면 말도 안 되는 소리라며 펄쩍 뛰겠지만 루크는 알 수 있었다. ‘빌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가 사랑을 하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루크는 그 최고의 팬으로서 그의 마음을 응원해주기로 했다.

 

그러니까 그림, 너 지금 감독생의 말을 안 듣겠다는 거야?”

우우, 그건 직권 남용이거든?! 그냥 하츠라뷸에 들러서 에이스 녀석한테 우산을 빌려오는 게 낫다니까!”

하츠라뷸에 들르는 것보다 고물 기숙사로 돌아가는 게 빠른 건 알고 있지?”

 

그 설레는 마음이 향하는 대상이 제 무릎까지도 오지 않는 마수와 다투고 있는 저 조그만 여자아이라는 게 웃기긴 하지만.

 

유키.”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그림을 끌어안고 있던 유키가 딱 굳었다. 통행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일부러 회랑 벽 쪽에 붙어서 다투고 있었는데 목소리가 컸나 보다. 빌이 굳이 자신을 지적하러 온 것을 보면. 유키는 삐걱삐걱 몸을 돌렸다.

 

……, 빌 선배.”

외부인들도 드나들 수 있는 장소에서 그렇게 크게 떠드는 건 매너에 맞지 않는 행동이라는 것, 알고 있지?”

…….”

알고 있는데 왜 그렇게 큰 소리를 내면서 싸운 걸까?”

 

빌이 한마디 한마디 할 때마다 유키가 점점 쭈그러들었다. 그 모습에 괜히 속이 뒤틀렸다. 학기 초 리들의 뺨을 갈긴 이후 미친 치와와라고까지 불렸던 녀석이 제 앞에서는 항상 이렇게 쪼그라든다. 리들에게 그랬듯 대들었으면 좋겠다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무서워하잖아.’


빌이 못마땅함에 미간을 살짝 좁혔다. 유키가 잔뜩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잘못했어요…….”

좋았어 빌! 더 혼내달라구!”

 

유키가 잔뜩 시무룩해져 눈초리가 올라가지도 않는 눈으로 그림을 쏘아보았다. 이 바보 너구리 녀석이.

 

그림 군, 너도 큰 소리를 내면서 같이 싸운 걸로 아는데.”

그렇지만 유키가 자꾸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데 어떡하란 말이야!”

아니, 그림. 마법의 거울에서 하츠라뷸 건물까지 가는 거리보다 서문에서 고물 기숙사까지 가는 거리가 더 짧다니까?”

에이스에게 마법의 거울 앞까지 우산을 가져오라고 하면 되잖아!”

에이스 군은 쓰러진 듀스 군을 간호해야 한다고 했잖아!”

 

말하다 보니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그런데, 뭔가 잊어버린 것 같은데.

 

너희…… 지금 내 앞에서 싸우는 거니?”

 

어떻게 눈 앞에 이 사람을 두고 목소리를 높일 수 있지. 유키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빠져나갔다. 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상황을 듣자 하니, 우산도, 우산을 빌려줄 사람도 없는 모양이었다. 이 싸늘한 겨울에 쏟아지는 장대비를 맞으면 당연히 감기가 걸릴 테고, 며칠을 앓아누울지 모른다. 유키가 목이 졸린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죄송해요…….”

하 참…….”

 

그러니까, 왜 이렇게 과하게 무서워하는지 모르겠다 이 말이다. 빌은 자신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유키의 얼굴이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어느새 빌의 곁에 다가온 루크가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 . 듣자하니, 우산이 없는 것 같은데. 맞니?”

? …….”

그럼 그렇게 하자. 폼피오레는 마법의 거울이 건물 안에 있거든. 우산을 깜박한 학생들을 위한 공용 우산도 있단다? 그걸 빌려주는 건 어때, ?”

루크.”

뭐 어때? 그 우산들, 시커매서 아무도 안 쓰잖아?”

 

루크가 빙긋 웃었다. 빌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눈초리가 날카롭지 않은 것을 보니 적당한 타이밍에 잘 끼어든 것 같았다. 친구의 연애사업이 더 이상 망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본인이 아직 눈치채지 못했더라도 말이다.

 

대신 가져다주기는 번거로우니, 폼피오레까지 와서 가져가는 건 어떠니? 폼피오레에 온다면 커피와 쿠키를 대접할게.”

쿠키! 나 갈래! 초코칩 쿠키도 있어?”

당연하지. 집에서 보내준 것이 남아 있단다.”

 

빙긋 웃는 루크를 빌이 어이없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그렇지, . 너도 우리와 함께 하겠어?”

?”

커피 브레이크.”

 

갑작스럽게 만들어진 커피 브레이크 약속에 빌이 헛웃음을 지었다. 어이없다는 듯 루크를 쳐다보다가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커피만 마시겠어.”

“Oui, Monsieur. 그럼 결정된 거지?”

 

제 의사는요? 유키는 조금 혈색이 돌아온 얼굴로 두 사람과 한 마수를 번갈아가며 보았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아무것도 모르겠다. 어쩐지, 빌 선배 앞에만 가면 심장이 뛰고 몸이 굳어서……. 자동으로 긴장해 손에 식은땀이 잡히고, 어쩐지 조신하게 행동하고 싶어진단 말이야. 두려워서 그렇다기에는, 빌 선배가 크게 혼낸 것도 아닌데. 무섭기는 그 때의 레오나 선배가 더 무서웠는데. 아직 충분히 친하지 않아서 그런가? 혼자 생각해서는 답이 나오지 않을 문제 같았다. 나중에 에펠 군한테 상담해야지.

 

유키는 고개를 흔들어 복잡한 생각들을 털어내고 앞서 걷기 시작한 폼피오레의 두 선배들을 따라 걸었다. 어쨌건 커피와 초콜릿 쿠키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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