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Marriage [합본]
“그렇군. 신부 고스트가 찾고 있던 이상적인 왕자님이, 이데아 선배였다……는 얘기지?”
리들의 말에 운동장에 모여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웃음이 터졌다. 웃지 않으려 애쓰던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어느새 숨이 넘어가도록 웃고 있었다. 깔깔거리며 웃던 에이스가 눈물을 훔치며 중얼거렸다.
“이데아 선배가 이상적인 왕자님이라니, 진심이냐고!”
“신부쨩, 진짜 보는 눈 있네!”
배까지 잡아가며 웃던 케이터도 유쾌하게 외쳤다. 그 와중 혼자 웃지 않던 유키가 진지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 멋지다. 그 공주님.”
“유키 씨, 지금 뭐라고……?”
이데아의 상황을 재미있게만 여기던 아즐이 제 귀를 의심했다. 그림이 짜증스럽게 “옴보로 기숙사를 빼앗아간 것부터 전혀 멋지지 않다구!” 소리쳤지만 유키는 쪼그려 앉아 그림의 머리를 쓰다듬을 뿐, 동의의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대신 아즐을 올려다보며 생글생글 웃었다.
“멋지지 않아요? 수동적으로 왕자님을 기다리기만 하지 않고 자기 사랑을 쟁취하는 공주님.”
“저건 사랑을 쟁취하는 게 아니잖아?! 완전 민폐인데도~?”
“원래 사랑이라는 감정은 민폐인 법이야.”
딱 잘라 말했다. 중학생 시절에 해 본, 자신의 마지막 연애를 떠올린 에이스는 입을 다물고 듀스 쪽을 쳐다보았다. 듀스는 유키의 확신의 찬 말에 ‘그런가?’ 하고 말려들고 있었다. 여기서 제정신인 사람 나밖에 없지 않아? 유키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에이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런 민폐를 저지를 거라면, 애초에 화끈하게 저지르는 게 여자로서 멋있지 않아?”
“그건…… 인간으로서도 존경할 만하지.”
“뭐가 ‘여자로서 멋있지 않아?’야?! 뭐가 ‘인간으로서도 존경할 만하지.’냐고! 지금 학교가 완전 점령당했습니다만?!”
친구라는 녀석들 중에서 제정신인 사람은 결국 나밖에 없는 건가?! 에이스는 심각한 얼굴로 생각했다. 아즐이 여전한 미소를 지은 채 대답했다.
“역시 재미있는 관점이로군요. 유키 씨. 저도 제 욕망에 충실한 사람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그렇죠~? 역시 에이스 같은 어린애보다는 아즐 씨가 사람 보는 눈이 있어. 그리고…….”
유키가 오르토를 흘끗 쳐다보며 다시 입을 열었다.
“응?”
“오르토에겐 미안한 말이지만, 결국 이데아 선배가 결혼만 해 주면 정상화되는 거 아니야……?”
“엣, 유키 화이트 씨. 진심이야?!”
“그치만 그렇잖아? 저 신부 고스트, 미인이구. 이데아 선배한테도 나쁜 조건은 아닐 텐데?”
“얼굴에 넘어간 거였냐!”
한바탕의 촌극을 보고 있던 크로울리가 심각하게 소리쳤다.
“웃을 일이 아닙니다!”
고성에 학생들이 크로울리를 쳐다보았다. 크로울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고스트의 신랑이 된다는 게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 여러분. 모르시는군요?”
알 게 뭐람. 아마 운동장에 선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터였다. 유키가 예의상 질문했다.
“그냥 결혼 아니에요? 이데아 선배, 어차피 피규어랑 결혼할 것 같…… 아니. 그게 아니지. 저런 미인이 상대라는 거에 감사해야 하는 게 아니고요?”
“화이트 군. 슈라우드 군이 결국 만화 캐릭터와 혼인신고를 올릴 것 같은 사람이기 이전에,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학원장. 분명 슈라우드 선배가 만화 캐릭터와 혼인신고 올릴 오타쿠라고 했지. 응. 오르토가 학원장을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어. 학생들이 수군거렸다. 학원장이 다시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웅성거리는 소리가 잦아들고 나서야 학원장이 다시 설명을 시작했다.
“고스트와의 결혼. 그것은 죽은 자와 ‘영원히 함께한다’는 계약을 맺는 것.”
“그런데요?”
“한마디로, 그녀의 신랑이 되면, 그대로 영혼이 뽑혀 저세상행입니다!”
에엑?! 듣던 학생들이 소리를 질렀다. 유키도 눈을 크게 떴다. 그냥 영혼과 결혼하여 평생 수절할 거라고 생각했을 뿐, 죽을 거라고는 추호도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이데아 선배한테는 좀 미안할지도…….
“신부의 눈에 차는 신랑이 존재할 리 없다 생각해서 방심하고 말았습니다.”
“학원장님, 부탁이에요. 형을 구해주세요!”
“물론입니다. 여기에 있는 ‘상냥한’ 여러분들이 슈라우드 군을 도우러…….”
“싫어.”
“싫은데요.”
와. 멋진 하모니. 이건 만들라고 해도 못 만들겠다. 모두의 합창을 들으며 유키는 생각했다.
“거절이야. 평소에는 사람을 피해다니면서 필요할 때만 도와달라니, 뻔뻔하기 짝이 없지.”
“네 ‘형님’의 문제잖냐. 네 녀석 혼자서 해결해라.”
빌과 레오나의 거절은 유키에게는 일견 타당하게 들렸다. 보드게임부의 부장인 이데아에게 유키는 ‘의외로 잘 놀아주는 선배’ 정도의 호감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데아가 평소 쌓아둔 비호감 스탯이 있는 탓이다. 제 기숙사장이 안 한다고 하는데 그 기숙사의 학생이 할 리가 없다. 기숙사장의 뜻을 거스르면서까지 이데아를 구하고 싶을 정도로 이데아와 친한 사람은 적어도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에는 없었다.
다른 기숙사장의 거절을 들은 오르토가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우고 중얼거렸다.
“알았어. 이제 됐어. 나 혼자서도 괜찮은걸.”
“아니, 혼자라니. 무리인게 당연하잖—”
“이데아 슈라우드 탈환 패턴을 시뮬레이션 중. 조건 : 구출 시간을 최우선. 시뮬레이션이 정상적으로 완료되었습니다. 작전을 실행합니다.”
카림이 무리라며 도움의 손길을 건네려 했지만, 이미 이성을 잃은 오르토에게 카림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오르토가 가슴 중앙에 달린 마도 빔을 기동시키기 시작했다.
“마도 에너지 충전 중. 조준 :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본교사. 마도 빔 발사 5초 전…….”
“그만——!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를 박살낼 셈입니까?! 마도 빔은 금지입니다!”
학원장이 기겁을 하며 오르토를 말렸다. 에이, 수업 안 들을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림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유키가 그런 말 하면 안 된다며 그림의 볼을 쭈욱 늘렸다. 오르토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처량한 얼굴로 말했다.
“하지만,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이렇게 할 수밖에 없는걸…….”
“여러분. 이렇게 거절해도 되겠습니까? 만약 이대로 슈라우드 군을 버린다면……”
고스트 카메라를 들고 학원장이 에이스를 찍어댔다. 괴롭힘을 당하던 에이스가 결국 도와준다고 소리를 지르는 것을 보며 유키는 생각했다. 단순히 에이스를 괴롭히기 위해서 저러는 건 아니었구나……. 그것보다, 제 카메라 메모리는요?! 유키가 눈에 쌍심지를 켜고 학원장을 노려보았다.
“귀중한 학생이 정신적 피로로 고생하는 것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저, 상냥하니까요.”
“상냥하기는…….”
매번 하는 이야기지만, 진짜로 상냥한 어른은 저런 소리 안 하지 않나. 오히려 본인이 들어가서 학생을 구해왔으면 왔지. 유키가 꿍얼거리며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리들도 같은 의견인 듯 입을 열었다.
“학원에서 불상사가 일어난다면 가장 곤란한 것은 책임자인 학원장님 본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리들이 동의를 구하러 주위를 흘긋 둘러보았다. 빌이 한숨쉬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확실히 곤란하네. 모델이자 배우로서 이미지는 중요해.”
“아무래도 힘을 빌려줄 수밖에 없겠구나. 가시나무 계곡의 차기 왕이 인간 하나를 못 구해서 저세상으로 보냈다는 말을 듣는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가 없지.”
“예. 릴리아 님의 말씀대로입니다.”
“그럼 여러분! 함께 슈라우드 군을 신부 고스트에게서 구출하도록 하죠!”
학원장이 감격한 듯 제 두 손을 붙잡고 소리쳤다.
“아, 상냥한 학생들만 있어서 저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응! 다함께 형을 구할 방법을 생각하자!”
글쎄요, 아무리 봐도 상냥한 학생들은 아닌 것 같은데요……. 눈 앞의 소동을 관망하던 유키가 속으로 그리 비웃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구나. 믿을만한 어른은 내 인생에 언제쯤 나타날런지… 유키는 땅바닥에 주저앉아 여러가지 의견을 내는 학생들을 구경했다.
“우선 본심을 털어놓고 신부 측과 대화해보는 건 어때? 제대로 사정을 설명한다면, 이데아를 해방시켜주지 않을까?”
“멋진 제안이야, 로아 드 오르. 하지만 줄곧 신랑을 바라왔던 신부를 그리 간단히 설득할 수 있을까? 나라면 절대로 사랑하는 사람을 손에서 놓지 않을 거야.”
루크는 그런 말을 하며 유키 쪽을 쳐다보았다. 유키는 루크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채 생각에 빠진 얼굴로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이데아 선배도 불쌍하지만 옴보로 기숙사를 오늘 안에 돌려받지 못한다면 이 먹보 마수와 함께 당장 바닥에 나앉게 생겼다. 그런 생각에 심란해진 유키가 그림을 끌어안았다. “어이, 부하! 나는 애완동물이 아니란 말이야!” 하고 그림이 항의했지만, 유키의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힘으로 깨닫게 해줄 수밖에 없다는 거군.”
여자를 패시려고요?! 유키가 놀란 눈으로 레오나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을 감지한 레오나가 픽 비웃으며 말했다.
“뭘 보냐, 초식동물.”
“고스트를…… 공격해서 쫓아내시게요?”
“쳇, 평화주의자 같은 말 하기는. 안될 건 뭐 있어?”
“그걸 못 해서 우리 모두 여기로 도망쳐 온 거잖니. 벌써 잊어버렸어?”
빌이 짜증스럽게 레오나에게 쏘아붙였다.
“네. 정면으로 싸워도 고스트를 ‘쓰러뜨리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적으로 돌리면 성가신 존재이니, 싸우는 것은 피해야겠지요.”
“고스트인가…… 흠. 샘 꼬맹이는 스피리추얼한 방면은 잘 알 테다. 그 녀석에게 상담해보는 게 어떠냐?”
조용히 설전을 듣고 있던 릴리아가 의견을 냈다. 학원장이 좋은 생각이라며 학생들을 끌고 구매부로 향했다.
“트레이 클로버 군, 잭 하울 군, 제이드 리치 군, 플로이드 리치 군, 그리고 킹스칼라 군, 셴하이트 군, 지그볼트 군까지…… 다 모이셨군요.”
학원장이 불러오라던 사람을 다 불러온 유키는 방금 전까지 학원장이 앉아있던 벤치에 앉았다. 고스트들을 놀려먹고 있던 리치 쌍둥이들을 구매부까지 데려오는 게 정말 힘들었던 탓이다. 특히 ‘왜 가야 합니까?’ ‘굳이 유키 씨가 저희를 데리러 온 데에는 이유가 있으신지?’ 따위를 계속해서 질문해대던 제이드 때문에 정신적으로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그럼 이제 이 멤버로 신부 고스트에게 구혼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에이스와 듀스의 선배인 트레이가 기겁을 하건, 잭이 비명지르듯 학원장에게 항의하건 신경써줄 기력 따윈 없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늘 단정하던 리들이 학원장에게 항의하는 건 제법 신경이 쓰였다.
“학원장,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부기숙사장인 트레이를 작전에 포함시켜두고 기숙사장인 제가 보고만 있을 수 없습니다. 저도 가겠습니다.”
“로즈하트 군은 안 됩니다.”
학원장이 리들의 지원을 한 마디로 잘라냈다. 그러나 리들은 그 한 마디로 물러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다른 기숙사장들도 참가하는데, 자신만이 참여하지 않는 것은 직무 유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뻔했다. 학원장이 웃으며 리들이 지원할 수 없는 이유를 말했다.
“여기에 모인 7명의 공통점, 그것은…… 180cm 이상의 고신장 남자!”
“그건 한마디로, 내 키가, 작다고, 하고 싶은 겁니까?”
리들의 표정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리들 선배, 보수적인 성격이라 학원장을 공격하지는 않겠지만…… 유키는 플로이드가 입을 떼는 것을 보며 차라리 눈을 감았다.
“아하핫! 금붕어쨩, 안됐네~ 내 꼬리지느러미만큼 나눠줄까?”
“사양하겠어. 결혼 상대를 키만으로 고른다고? 키만 크다면 플로이드 같은 녀석이라도 괜찮다는 건가? 어떻게 됐다고밖엔 생각할 수 없군!”
트레이가 좋은 말로 리들을 말렸으나, 플로이드의 입은 멈출 줄을 몰랐다.
“그래, 그래. 금붕어쨩은 작아서 좋은 거라니까? ……어라? 금붕어쨩? 어디 갔어?”
“하?”
“아. 있다, 있어. 작아서 안 보였네에~.”
“리들! 진정해!”
얼굴이 시뻘개져서는 매지컬 펜을 꺼내들려는 리들을 트레이가 뜯어말렸다. 와중 학원장은 제 할 말을 계속했다.
“신부 고스트는 줄곧 자신의 이상을 관철해온, 타협이 없는 성격입니다. 그녀가 신랑에게 바라는 조건은 이목구비부터 체격까지 다양하지만, 대부분이 ‘이런 사람이다.’라고 정의하기에는 애매하지요.”
유키도 아까 전 신부 고스트가 원하던 조건을 들었다. 그 조건을 다 들은 유키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질문했더랬다. ‘그런 사람이 실제로 존재하긴 해요?’ 머릿속에 떠오르는 누군가의 얼굴을 애써 지우며 학원장이 그러니까 몇백년동안 신랑을 구하지 못한 것 아니겠냐며 신부 고스트를 조롱하는 것을 들었다.
“그 중 유일하게 명확한 수치로 나타낼 수 있는 것이, 180cm 이상의 고신장입니다. 로즈하트 군의 열의는 높이 삽니다만, 작전 성공을 위해서 이번만큼은 참아주세요.”
유키는 이미 들은 학원장의 설명을 다시 들으며 ‘그 공주님은 키가 큰가 보다.’ 하는 실없는 생각이나 했다. 그야,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사람은 무섭지 않은가. 본인도 키가 크다면 모르겠지만. 아, 잭 제외. 음…… 말레우스도 제외하자. 제 친구들을 무섭지 않은 대상 쪽으로 이동시키며, 유키가 다시 벤치에서 일어섰다. 가까이 다가서자 이번에는 빌의 항의가 들렸다.
“신장이 조건이라면 말레우스는? 그 녀석도 키가 크잖아.”
아, 제발요. 빌 선배. 저를 다시 디아솜니아까지 가게 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마법도 없다고요. 유키의 생각을 읽기라도 했는지 릴리아가 해명했다.
“분명히 말레우스는 프로포즈를 성공시킬 테지. 허나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가시나무 계곡의 차기 왕을 흔한 고스트 따위에게 구혼하게 할 수는 없네. 구혼했다는 사실만으로 국제 문제가 될 게다. 대신에 세벡을 보낼 테니 이번만큼은 눈감아줬으면 하는구나.”
“잘난 듯 말한다만, 말레우스가 뽑힐 거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
냉소적인 레오나의 말에 유키가 기겁했다. 세벡 앞에서 그런 말을 했다간 귀가 떨어져나가고 말 텐데……! 생각이 미처 끝나기도 전에 세벡의 고성이 귀를 울렸다. 레오나가 귀를 틀어막고 싶은 얼굴을 했다.
“잘도 지껄이는군.”
“웃기고 있네. 무쓸모한 호박들이 모이고 모여서는.”
릴리아와 세벡의 도발이 먹혀들었는지, 레오나도 빌도 짜증스러운 얼굴이 되었다. 유키는 에펠과 루크 쪽으로 살짝 다가갔다. 저 두 사람 눈에 괜히 띄었다가 화를 입을지도 모른다. 그림을 끌어안고 에펠을 쳐다보자 에펠이 제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학원장이 즐거운 얼굴로 외쳤다.
“기숙사장이 두 명이나 의욕을 내주어서 정말 다행입니다.”
“우린 작전 진행 상황을 살펴볼게!”
오르토가 대식당의 CCTV를 해킹해 빔 프로젝터로 비췄다. 터무니없는 일에 휘말리게 되었다며 짜증을 내는 빌에게 루크가 위로 아닌 위로를 했다.
“빌이라면 반드시 선택받을 수 있을 거야! 이렇게 아름다운 신랑은 세상 어디에도 없지. 마담 블랑셰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렇죠. 신부보다도 더 아름다울걸요?”
유키가 그리 말하며 웃었다. 오늘 하루 귀한 몸들을 모시러 다니며 빈말을 몇 번이나 했지만 이번만큼은 빈말이 아니었다. 신부 고스트도 해맑고 처연한 미인이긴 했으나 빌보다 아름답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괜히 전세계적 탑 모델이자 배우겠는가. 진심이 담긴 말에 빌의 기분도 좀 풀어지는 듯 했다.
“에펠 군은?”
“에, 그렇네요…….”
에펠이 유키를 힐끔 눈짓했다. 유키 쟤는 내가 구혼하러 가도 저렇게 응원해줄까. 신부 고스트에게 구혼하러 가는 자신을 응원하는 유키를 생각하니 괜히 기분이 나빠졌다. 에펠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빌이 ‘교정’하려 했던 사투리가 빠르게 지나갔다.
“프로포즈라던가 사랑의 말이라던가, 겁나게 남사스러운 짓 아이가. 나라면 못하겠지만서도……. 빌 씨라면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에펠. 다 들렸어.”
“아하하…….”
빌의 지적에 에펠이 웃음으로 상황을 무마했다. 빌이 에펠에게 한 마디 더 하기 전, 루크가 빌의 주의를 자신 쪽으로 끌었다.
“빌! 그대의 미모가 빛날 순간을 모두 함께 지켜보고 있으마!”
“잠깐! 이건 말도 안 돼!”
유키가 오르토를 붙들고 비명처럼 외쳤다. 빌이 막 따귀를 맞은 참이었다.
“그 빌 선배라고? 저 얼굴이잖아? 어떻게 저 얼굴을 때릴 수 있어? 백만 달러짜리 얼굴이라고!”
“백만 달러?”
“있어! 그런 거!”
에펠의 질문에 유키가 다시금 소리쳤다. 에이스가 옆에서 “또 자기 세계 이야기겠지.” 하고 설명했다. 외침이 계속될 기미에 그림이 귀를 막았다. 유키의 외침이 이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빌과의 친분은 그리 깊지 않지만 —오히려 에펠의 훈육 문제 때문에 충돌이 더 많았다.— 빌의 얼굴만큼은 아름답다고 인정하고 있었기에, 충격이 컸다.
“유~키~. 영상이 흔들려서 안 보이잖아. 진정 좀 해.”
“……저 공주님, 보면 볼수록 대단해. 그 빌 선배라고? 천만 달러짜리 마스크란 말이야. 저 얼굴에 손을 댄다고?”
“그러니까 달러가 뭐야?”
“그런 게 있어. 미국 돈.”
듀스의 질문에 유키가 대충 대답했다. 미국은 또 뭔데? 듀스가 점점 미궁에 빠져들었지만 유키는 껴안고 있던 오르토를 놓아주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 동안 따귀를 맞고 멍청한 표정으로 굳은 가짜 구혼자들이 늘었다.
“보셨습니까? 즉각 고스트에게 따귀를 맞은 플로이드를!”
“아하하, 트레이 선배 노래, 개쩔지 않아~?! 서민적인 것에도 정도가 있지. 최고다, 진짜!”
“그만 둬, 에이스. 클로버 선배에게 실례잖아……!”
트레이 클로버의 엉망진창 노래가사에 모두들 감명받은 모양이었다. 유키가 생각해도 베일이 갓 표백한 걸레 같고, 눈이 포도알 같다는 가사는 좀 심하긴 했다. 그러나 다른 친구들과 함께 트레이를 비웃을 마음은 들지 않았다.
“와. 진짜 다들 심하다. 다들 소녀의 마음을 하나도 모르네.”
유키가 그림을 끌어안으며 한숨을 쉬었다. 니들 이래서 연애 어떻게 할래? 싶어져서였다. 하츠라뷸의 세 사람이 연애를 할 수 있건 없건 유키의 알 바는 아니었지만, 이래서는 저 신부 고스트가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공들여서 쓴 베일일 텐데 걸레 같다는 말을 듣다니. 저 공주님도 불쌍하네…….
“유키 너는 소녀의 마음을 안다는 것처럼 이야기한다구.”
“당연한 거 아니야? 나는 여자아이잖아.”
“아. 그랬지. 잊고 있었다구.”
“그림은 그런 거 몰라도 괜찮아.”
유키가 그리 말하며 그림의 볼을 쭈욱 잡아 늘렸다. 아프지도 않으면서 그림이 엄살을 부렸다. 그 엄살을 못 들은 체 하며 유키가 그림에게 속삭였다.
“근데, 이렇게 되면 다 망한 거 아니야?”
“아! 이 얼마나 참혹한 광경인가. 빌의 미모가 손상되다니, 참을 수 없는 비극이야!”
아까 전의 저처럼 크게 탄식하는 루크와 차였을 때의 빌의 얼굴을 생각하며 키득키득 웃는 에펠을 유키는 애써 무시했다. 그림. 혹시 아까 전의 나도 저렇게 보였어? 당연한 거 아니냐고. 앞으로는 자제해야겠다. 이런 대화나 나누며 킬킬거리는데, 학원장이 노호성을 내질렀다.
“지금 그렇게 웃으며 나뒹굴 때입니까?! 이건 놀이가 아닙니다. 슈라우드 군의 목숨이 걸려있단 말입니다!”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저희 제이드와 플로이드의 실수를 사과하도록 하죠. 정말이지, 여성을 다룰 줄 모르기는…….”
아즐이 어디선가 등장해 학원장에게 자기어필을 시작했다. 유키는 앉은 채 아즐을 올려다보며 생각했다. 선배도 여자 다룰 줄 모르기는 마찬가지잖아요……. 유키는 같은 보드게임부로서 아즐이 평상시 하던 행동을 떠올렸다. 아즐도 역시 여자를 잘 다룬다거나, 카사노바가 된다거나 하기에는 글렀다. 카사노바 쪽은. 유키가 루크를 흘끔 바라보았다. 차라리 루크 선배가 어울리지…….
유키가 그렇게 생각하건 말건, 아즐의 자기 어필은 계속되었다.
“이 저, 아즐 아셴그로토에게 맡겨주시길. 반드시 그녀에게 ‘단절의 반지’를 끼워 보이겠습니다.”
“아니, 아니. 귀여운 아이에게 하는 어프로치라면 우선 내게 상담했어야지!”
이제는 케이터 선배까지. 유키는 동태 눈으로 자신있게 학원장에게 자신을 어필하는 선배들을 바라보았다.
“다이아몬드 선배, 꽤나 자신있어 보이시네요.”
“에~? 하지만 자신 있어. 그렇지, 듀스 쨩도 같이 가자. 이런 건 사람이 많은 쪽이 분위기가 사니까!”
“저저, 저요?!”
여자의 마음도 잘 모르고, 어쩌고 하며 듀스가 케이터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시도했다. 그러나 케이터 뒤에는 에이스가 있었으니.
“듀스, 너 트레이 선배를 버릴 참이야?”
“그, 그럴 생각은……!”
“그럼 같이 가면 되겠네? 트레이 선배, 네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거라고?”
“……확실히 그렇네. 선배의 복수는 후배가 해야지.”
“이거 패싸움이 아닌 건 알고 있지?”
유키가 순진한 척 질문했다. 듀스가 “아, 알고 있어!” 하고 소리쳤다. 에이스가 옆에서 바람을 잡았다. 듀스가 투지를 불태웠다. 옆에서 릴리아도 가겠다며 한 손 거들었다. 각자 자신이 공주를 유혹해 보일 것이라 말하는 세 사람을 쳐다보며, 유키가 그림에게 속삭였다.
“이 파티도 글른 것 같지?”
“되겠냐고.”
시원한 마찰음이 울려퍼졌다. 마지막으로 도전한 아즐이 뺨을 맞는 소리였다. 유키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영상을 쳐다보았다.
“그야 그렇게 되겠지.”
“유키, 너 아까부터 2부대한테는 좀 심하다?”
에이스가 지적했다. 유키가 여전히 심드렁한 눈으로 에이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여자는 잘 안다며 자신있게 간 것 치고는 그들은 여자의 마음을 몰라도 너무 몰랐다. 차라리 반강제로 보내진 1부대가 나아 보일 지경이었다. 1부대에는 그래도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탈락한 사람들도 있었으므로.
유키가 제가 잘났네 네가 못났네 하며 화면 안에서 떠드는 인간 마네킹들을 보며 삐죽였다.
“그치만 자기 입으로 여자는 잘 안다고 했는걸. 근데 잘 알기는커녕 짜증나는 말만 하고 있잖아.”
“뭐, 한 명은 아무 말도 못했지만!”
“아하핫, 듀스 봤어? 자기소개만 하고 한 마디도 안 한 거 심하다, 진짜.”
마침 오르토가 송출하는 화면은 귀를 붉힌 채 “공주님 앞에 서니까 긴장되어서 한 마디도 나오지 않았어요.” 라고 뇌까리는 듀스를 클로즈업하고 있었다. “유키랑은 이야기 잘 하잖아?” 라는 트레이의 질문에 얼굴이 붉어져서는 “엣……! 그건, 유키는 여자라기보다는…….” 하는 꼴이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에펠이 유키의 눈치를 살짝 봤다. 그리고 에이스와 그림은…… 웃음을 참지 않았다.
“푸학! 듀스 녀석, 맞말 하잖아~?”
“듀스 녀석, 웃기다구! 학기 초에는 유키랑도 눈 못 마주쳤으면서!”
듀스와 자신을 동시에 놀려대는 망할 친구와 마수를 노려보다, 유키가 무릎 위에 올려 끌어안고 있던 그림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눈치 없는 마수는 ‘오늘의 MVP상’에 선정될 법한 듀스의 바보같은 표정을 떠올리며 아예 배를 잡고 굴렀다. 화면 속에서 케이터가 “이런, 듀스 쨩. 유키 쨩이 들으면 상처받겠어.” 라며 듀스를 놀려댔다. 상처 안 받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유키가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듀스가 화면에서 “그 뭐냐, 유키는…… 여자애라기보다는 절친이라서요. 친구를 그런 눈으로 보는 건……!” 어쩌고 하며 변명을 늘어놨다. 제법 기특한 소리지만 변명은 됐다. 그렇지만 왜 나를 여자로 안 보냐며 친구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라 — 그건 꼭, 듀스에게 나를 연애 상대로 봐달라고 하는 것 같잖아! — 유키는 씩씩거리기만 했다.
‘아, 어째서 이 학원 녀석들은 사람에 대한 배려가 이렇게 없는지.’
괜히 화풀이로 그런 것을 생각하다가 어깨를 추욱 늘어뜨렸다. 자신도 ‘이 학원 녀석들’에 속한다는 것을 깨닫고 힘이 빠졌기 때문이다. 화면 안에서는 이제 이데아가 구혼을 성공시키지 못한 구출조들에게 “뭘 위한 리얼충이야! 구혼 하나도 성공시키지 못하면서!”라며 화를 내고 있었다. 저러다 보면 아무도 안 도와줄 텐데. 자력으로 탈출도 못 할 거면서 왜 저러는 거야? 우리 부장은. 유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신부 고스트가 결혼식은 오늘 자정이라고 선언하자마자 이데아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희게 질린 얼굴로 화면 속 이데아가 인간 마네킹들에게 도와달라고 애원했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싸늘했다.
“잘 됐잖아? 낯가림 심한 너를 선택하는 사람이 있어서.”
“잘 생각해 보니 너에게 딱 맞는 상대다. 감사히 여겨.”
“방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던 이데아 씨가 결혼…… 감동스러워서 눈물이 나네요. 축하드립니다. 축의금은 두둑이 드리지요!”
이데아가 바로 자신이 쏘아올린 업보를 돌려받는 모습을 유키는 빤히 쳐다보았다. 누군가의 목숨이 명재경각에 달려있는 위급한 상황이라기보다는 꼭 만담회 같았다. 옆에서 학원장이 괴로운 한숨을 푹 쉬었다.
“제 2부대도 격침입니까…….”
학원장이 그런 소리를 하건 말건 그림과 에이스는 아직도 굴러다니면서 웃고 있었다. 오르토가 그 둘에게 짜증을 냈다. 그러나 유키는 심각한 표정의 학원장을 보고 생각했다. 사람을 또 다른 데로 보내려는 건 아니겠지…….
“이렇게 된 이상…… 남은 신랑 후보를 긁어모으는 수밖에!”
그림과 유키가 가게 될 것이다. 유키가 흙바닥에 구르던 그림을 동태눈깔로 쳐다보았다.
“유키 군! 각 기숙사에 들러서 신랑 후보들을 데려오세요!”
어째서 불길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나. 유키는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도…… 말입니까?”
“네. 아무도요.”
“결국 모인 사람이…… 0명?!”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매정해.”
학원장의 한숨에 오르토가 뾰로통하게 중얼거렸다. 유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앞선 두 조가 장난처럼 갔다지만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었다. 선뜻 나서지 못하는 것은 이해하지만 이렇게까지 대놓고 거절하는 건 너무하지 않나. 이데아의 평소 인망을 생각하면 이상하지도 않은 일이지만……. 유키도 한숨을 쉬었다. 무척이나 기분이 이상했다. 아는 사람이 고스트와 결혼해 영혼이 뽑혀서 죽는다니, 이런 판타지 소설에나 일어날 법한 일이 왜 나한테 일어나는 건지.
유키는 신랑 후보로 입후보해달라는 요청을 거절한 네 사람을 떠올렸다. 쟈밀과 라기는 솔직히 바라지도 않았다. 카림에게는 애초에 말도 걸어보지 못하고 쟈밀 선에서 컷 당했고. 그래도 실버는 믿었는데, 실버도 제법 매정하게 거절한 것이 충격이었다. ‘이데아 선배는 안타깝게 됐지만, 릴리아 선배는 알아서 탈출할 테니 걱정할 것 없다. 나는 말레우스 님의 곁을 지켜야 한다.’라고 했던가. 그래도 그나마 실버는 사람 목숨이 걸려 있다고 더 간절하게 부탁하면 들어줄 거 같긴 했으나, 나머지 셋은 아예 가망이 없었다.
그렇게 세 사람이 모여 한숨만 쉬던 자리에 루크와 에펠이 나타났다.
“걱정하지 말게나, 우리가 있으니!”
“루크 헌트 씨! 에펠 펠미에 씨! 형을 구하러 가 줄 거야?”
“물론. 서로 돕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지. 그리고 빌의 미모가 이 이상으로 모욕받는 것은 참을 수 없으니 말이야. 에펠 군도 굉장히 의욕적이란다!”
“네! 반드시 기숙사장을 구해내서 제 힘을 인정받겠어요!”
폼피오레의 두 명이 나타난 것에 대해 학원장이 감동을 받은 듯 주절주절 감사의 말을 읊기 시작했다. 한 발 뒤로 빠져 있던 에이스가 질문했다.
“제 3부대는 두 명뿐? 뭐, 보통은 이런 귀찮은 일에 휘말리고 싶지는…….”
“저도 가겠습니다.”
“에, 왜요? 설마 선배들을 구하기 위해?!”
에이스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리들에게 질문했다. ‘말도 안 돼.’ 라는 말이 얼굴에 쓰여 있었다. 리들은 그 얼굴을 무시하고 차분하게 설명했다.
“물론 그것도 있지. 하츠라뷸 기숙사생의 생활은 기숙사장인 내 책임이니까. 그러나 그 이상으로 중요한 일이 있어. 중요한 일을 잊고 있는 것 같구나, 에이스.”
“중요한 일……?”
“하트 여왕의 법률, 제 703조. ‘크리켓 대회에서 2위였던 자는 다음 날 여왕에게 홍차를 끓여주지 않으면 안 된다.’”
하트 여왕의 법률이 나온 순간 유키는 ‘그럼 그렇지’ 하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결혼식이 끝나면 이데아를 제외한 모두는 풀려날 것이다. 신부 고스트가 신혼여행을 떠난다든지 하면 마법 도구를 이용해서 풀어주면 되겠지. 어차피 자정까지는 2시간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케이터와 트레이, 그리고 듀스는 이데아를 제물로 바치고 데려오면 되는 일이므로 리들에게 굳이 직접 나서야 할 이유가 없던 탓이다.
“그게 뭐……. 그러고 보니!”
에이스가 갑자기 뭔가 생각났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어제 크리켓 대회에서 2위를 한 사람은 케이터지. 내일이 되기 전에 케이터는 기숙사로 귀환! 여왕, 즉 기숙사장인 나에게 홍차를 끓여주어야 해!”
“에엑~?! 지금은 긴급사태잖아요! 꿩 대신 닭이라고, 가능하면 제가 케이터 선배 대신 홍차를…….”
“안 돼. 에이스는 어제 10위권 안에도 못 들었잖니? 하트 여왕의 법률을 준수하기 위해, 반드시 나는 0시까지 케이터를 데리고 돌아가겠어.”
‘너는 닭도 못 된다’는 말에 조금 욱하는 것 같기도 했으나, 에이스는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들이 모두 공유하는 정신 ‘나만 아니면 돼’를 발동해 편한 마음으로 살기로 했다.
“하아, 역시 규칙 귀신…… 뭐, 나랑은 관계 없으니 상관 없나!”
“그럼 고스트에게 구혼하는 사람은, 나와 루크 선배, 에펠, 그리고 에이스까지 네 명이구나.”
“아니 나?! 왜 나까지?!”
“오지 않을 셈이니?”
리들이 에이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연히 올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당연하죠! 왜 일부러 고생하러 가야 하는데요?!”
그러나 에이스는 정말로 평균적인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들의 인성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에이스는 기숙사로 돌아가서 고슴도치라도 돌보려무나. 나한테는 에펠로 충분하니까.”
“엣, 저요?”
“그래, 에펠. 너는 용기가 있구나. 우리 하트 병사는 겁쟁이라 곤란하네.”
“하?”
“겁쟁이가 오더라도 방해만 될 뿐이니까, 오히려 행운이라고 해야 하나.”
고슴도치도 제 새끼는 함함하다고 하는데, 졸지에 자기 기숙사장에게 타기숙사 1학년보다 못한 취급을 받게 된 에이스가 발끈했다. 제법 어른스러운 척 하지만 에이스는 이런 바보 취급을 당하고서 참을 사람이 아니었다.
“하아~?! 에펠도, 기숙사장도 내가 가면 나설 자리도 없을 거거든요?!”
“저런, 그래?”
“당연하죠. 내가 멋진 프로포즈로 확실히 신부의 마음을 빼앗을 테니까요. 내게 푹 빠진 신부를 손가락이나 빨며 지켜보시라고요!”
삿대질까지 해가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열을 내는 모습에 루크가 작게 웃었다. ‘계획대로’라고 얼굴에 써둔 것 같은 악당 같은 표정으로 리들이 웃었다. 유키가 옆에서 한 마디 거들었다.
“후후, 무슈 하트는 심술꾸러기인 점이 귀엽구나.”
“그냥 어린애같을 뿐이지 않나요……?”
“후후, 마담 블랑셰. 마담도 어린아이같이 구는 무슈 털복숭이를 귀엽다고 하잖니.”
“그림은 귀여우니까요.”
당연한 거 아닌가요? 유키가 루크를 올려다보며 질문했다. 왜 당연한 걸 묻지? 그림이랑 에이스는 다른걸. 그런 딴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에이스가 냅다 유키를 불렀다.
“그렇다고 해도 이 멤버, 불안하기만 한데…… 유키! 너도 가자.”
“에, 나?”
“그래!”
“나는 왜?! 나 여자앤데?!”
유키가 어이없다는 듯 자신을 가리키며 질문했다. 신부 고스트에게 구혼하려면 애초에 신랑이어야 하지 않겠나. 신부 고스트는 500년 전부터 신부감이 아니라 신랑감을 찾고 있었으니까!
“신부보다도 체구가 작은 에펠이나 우리 기숙사장도 가는데, 이제는 신장이나 성별 같은 건 관계 없어!”
“아니, 성별은 보통 관계 있지?!”
“헤에, 겁나는 거야?”
에이스의 한마디에 유키가 질 수 없다는 듯 냅다 소리쳤다.
“아니, 겁난다는 말은 한마디도 안 했거든?! 에이스 너, 옴보로 기숙사 한 번도 안 와본 것처럼 말할래? 여기서 고스트에게 가장 친숙한 건 나일걸?”
“아, 알겠다. 유키는 고스트들이 무섭구나~.”
“그런 거 아니라니까?! 학원장! 제 고스트 카메라 돌려주세요. 에이스 녀석이 실패하면 신부 고스트한테 저라도 구혼을 해서, 자정 이후에도 확실하게 살아있는 이데아 선배의 사진을 찍어오죠!”
“오오, 유키 군……. 역시 슈라우드 군에 대한 의리가.”
유키가 차게 식은 눈으로 학원장을 쳐다보았다. 부장에 대한 의리는 무슨. 에이스 녀석한테 말려든 것뿐이거든요? 씩씩대던 유키가 순식간에 진정해서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헛소리 하시면 안 가요.”
“합. 자, 여기 고스트 카메라. 그리고 그 꼴로 갈 생각 하지 말고, 가기 전에 준비부터 하죠.”
유키에게 주어진 옷은 분홍색 드레스였다. 어린 시절에 꾸던 ‘공주님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어주는 것 같은, 예쁜 분홍색 드레스. 공주님이 입고 있던 웨딩드레스보다는 심플했지만 유키가 보기에는 충분히 화려했다. 역시 마법 물품인 탓인지 드레스는 몸에 꼭 맞았다.
탈의실 밖으로 나오자 벌써 옷을 갈아입고 나온 사람들이 떠들고 있었다.
“걱정할 것 없어. 두 사람의 사랑스러움과 멋짐을 한껏 끌어내고 있으니 말이야.”
“루크 선배한테 칭찬받아도 안 믿긴단 말이지…… 어때, 유키?”
나오자마자 그런 질문을 받은 유키는 에이스를 빤히 쳐다보았다. 옷감의 무늬나 색이 과도하게 화려하긴 했으나, 정장의 모양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아니, 사실은 조금 더 심플한 쪽이 취향이긴 했지만…… 어쨌건 지금은 유키의 취향은 중요하지 않았다.
“뭐, 괜찮네.”
“……괜찮은 정도야?”
에이스가 못마땅하게 유키를 바라보았다. 미감을 의심하는 것 같은 눈초리에 유키가 눈꼬리를 뾰족하게 세웠다. 에이스가 급하게 수습했다.
“뭐, 유키가 괜찮다면 괜찮은 거겠지.”
어쨌거나 유키는 학원의 홍일점이니 남자보다는 여자의 취향을 더 잘 알 거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유키가 삐죽거리고 있자 구매부의 샘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모두의 옷은 고대의 마법이 담긴 구애의 턱시도. 이걸 입은 인간은 고스트에게 있어 굉장히 매력적으로 보인다고 하지. 이건 사은품. 위로의 부케라고 해.”
그러며 샘이 모두에게 창백한 색감의 부케를 나눠주었다. 어딘지 바랜 듯한 부케는 어쩐지 쓸쓸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푸른 안개꽃으로 만들어진 부케를 든 유키를 빤히 쳐다보던 에이스가 크게 웃었다.
“푸핫! 꽃까지 드니까 완전 화동 같네.”
“이렇게 큰 화동이 어디 있어!”
“하하! 작은 도깨비 쨩처럼 화동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특별한 부케야. 부정적인 감정을 에너지 삼아 꽃을 피우도록 하지. 고스트의 힘이 원천인 한도 빨아들일 수 있다네. 선물해도 좋고, 타격해도 좋고. 일석이조지!”
“화동 아니거든요?!”
유키의 반박을 무시하고 샘이 계속해서 말했다.
“그렇지만 명심해둬. 신부 고스트를 저세상으로 보낼 수 있는 건, 단절의 반지뿐이야. 너희의 미래는 반지를 끼울 수 있느냐에 달렸지.”
“결혼식이 가까워졌으니 가신들도 경계하고 있을 겁니다. 이상적인 왕자님이라는 사실을 어필하지 않으면 식장 안에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하겠죠.”
‘근데, 굳이 이상적인 왕자님이라는 사실을 어필해야만 하나?’
유키가 한숨을 쉬었다. 신부 고스트에게 어떻게 구혼해야 할지 생각만 해도 막막한 탓이었다. 결혼식을 보러 온 사람인 척 들어가서, 이데아 선배에게 단절의 반지를 건네준 후 그에게 직접 신부 고스트에게 반지를 끼우게 하면 될 일 같은데. 뭐, 그것도 신부 고스트가 부장을 풀어줘야만 가능한 거겠지만…….
그러나 유키의 생각과는 달리, 다른 사람들은 의지에 불타고 있었다.
“문제 없습니다. 남은 시간을 사용하여 제가 얼마나 신랑에 걸맞는 남자인지 증명하도록 하겠습니다.”
“나도 사랑의 말을 전하도록 하지. 진지하게 전한다면 마음은 전해질 거야.”
“꼭 신부의 마음을 사로잡아 보겠어요!”
“그렇지. 파팟~하고 프러포즈를 성공해 보이겠어!”
이미 프러포즈를 성공시킨 것처럼 들떠있는 모습에 유키는 어쩐지 한숨을 쉬고 싶어졌다.
“좋은 저녁, 아름다운 신부에게 구혼하러 왔습니다.”
“또 구혼자인가. 앞선 무례한 녀석들이 공주님의 심기를 어지럽힌 탓에, 이제 아무도 들이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다! 물러가라!”
문지기가 퉁명스럽게 외쳤다. 앞 사람들의 실패 때문인지, 당장이라도 창을 내질러 쫓아보낼 기세였다. 그러나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생이 기세로 밀릴 리 없었다. 백마 위에 탄 에펠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괜찮으신가요? 저를 돌려보낸다면 후회하실 텐데요.”
“꽤 자신이 있나 보군.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내가 심사해주지. 나를 공주님이라 생각하고 프러포즈 해봐!”
모두가 백마에 탄 에펠을 올려다보았다. 얼굴만으로는 왕자 합격인데. 유키가 실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 에펠이 진지한 목소리로 준비해 온 프러포즈 대사를 읊었다. 조금 떨리는 듯 당당한 목소리와 단단한 눈빛이 문지기를 향했다.
“저는…… 반드시 신부를 행복하게 하겠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위험할 때에는 어디에 있더라도 달려나갈 수 있는 백마 탄 왕자! 도중에 어떤 역경과 마주쳐도 절대로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을 상처주는 모든 것으로부터 지켜내보이겠어요. 나야말로 공주님에 걸맞는 왕자입니다! 부탁드려요, 저와 결혼해 주세요!”
“이 진지한 눈빛, 그리고 올라타 있는 그 백마! 제대로 된 왕자가 찾아왔군!”
문지기의 외침에 모두가 에펠을 돌아보았다. 꽤 하잖아? 에이스와 유키가 눈빛을 교환했다. 처음부터 실패하면 어쩌나 했는데, 시작이 좋았다. 문지기가 ‘백마’에 초점을 둔 것을 알아챈 에이스가 곁에 있는 유키에게 속닥거렸다.
“말이라니…… 역시 잘못된 건 나야?”
“에이스는 무드를 모르니까.”
유키가 톡 쏘았다. 똑같이 무드 같은 거 모르는 사람들 사이에서 뭘 배우겠냐만은……. 생각했지만 입 바깥으로 뱉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 주홍색 머리의 남자는, 왕자의 종자인가?”
“내가? 에펠의 종자? 잘도 말하네. 나는 지금까지의 녀석들과는 비교가 안 될 거라고?”
“뭣, 너도 구혼자인가? 좋아. 네 프러포즈, 보여주실까.”
에이스가 자신만만하게 앞으로 한 발 내딛으며 말했다.
“나와 결혼하면, 항상 즐겁게 지낼 수 있게 해 줄게. 줄곧 함께 있으면 가끔은 싸울 수도 있겠지만, 그럴 때는 반드시 내 쪽에서 사과할게. 슬플 때도 힘들 때도 함께하면서 소중한 사람을 웃게 할 거야. 나야말로 공주님에 걸맞는 왕자야. 그러니, 다른 데 한눈 팔지 마. 나와 결혼해 주세요!”
뭐야. 제대로 진심을 담아서 준비했잖아. 다음은 내 차례인데, 저렇게 잘 해버리면 어쩌라고! 유키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문지기의 찬사가 이어졌다.
“상대의 행복을 생각하고 있는 게 전해져! 아무래도 마음은 진짜인 것 같군. 종자라니. 무례한 말을 해버렸어.”
“확실히. 꽤 좋은 프러포즈잖아.”
“잠깐! 진심으로 말하지 마세요 진짜! 이런 거, 척일 뿐이니까.”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실은 진지하게 생각한 거지?”
에이스가 입을 다물었다. 정곡을 찔린 것이다. 에이스를 놀리려던 유키를 보고 문지기가 눈을 크게 떴다.
“아, 결혼식을 구경하러 오신 이웃 나라의 공주님이시군요. 나머지는 공주님의 호위인가요? 어서 이리로.”
그 말을 들은 유키가 리들과 루크의 눈치를 봤다. 루크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는 대로 하라는 뜻이다. 허락을 받은 유키가 눈을 뾰족하게 뜨고 말했다. 공주님으로 착각해준 건 고마운데 말이지, 나도 준비해온 게 있단 말이야!
“아니에요!”
“그렇다면…… 헉, 혹시 이데아 님의 약혼자…….”
겠냐?! 유키가 목소리를 더 높여 외쳤다.
“그럴 리가 있겠나요! 제가 관심 있는 쪽은 공주님이라고요!”
“여성, 구혼자?! 들어본 적도 없어!”
“여성의 마음까지 흔들어 버릴 정도로 공주님이 매력적이시라는 뜻이죠. 절대 이데아 선배 따위에게 공주님을 빼앗길 수 없어요!”
유키가 자신만만한 얼굴로 웃었다. 뒤에서 에이스와 에펠이 수군거렸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우울한 표정 해 놓고, 말 잘하는데?”
“그것보다, 이데아 선배 따위라고 했어.”
“그렇잖아? 공주님 같은 미인은 이데아 선배에게는 너무 과분해! 저도 아름다운 공주님을 얻기 위해서라면 왕자님 정도는 될 수 있다고요.”
에이스가 다시 ‘역시 얼굴인가…….’ 하는 질린 얼굴로 유키를 쳐다보았다. 뭐. 왜. 뭐. 에이스를 노려보고 싶었지만 유키는 꾹 참고 착한 강아지 같은 얼굴을 했다. 문지기는 곤란한 표정이었다.
“여자인데도?”
“여자는 안 되나요?”
“아무래도 어렵죠…….”
문지기가 곤란해하는 틈을 타 유키가 준비해 온 멘트를 외쳤다.
“흥. 그럴 리가요. 저는 다른 세계에서 온 여자! 제가 이 세계로 불려온 것은 공주님을 만나기 위해서가 틀림없어요. 사랑은 성별도, 법칙도, 심지어는 차원도 뛰어넘는 법! 아름답고 용기 있는 공주님에게 자신을 구속할 왕자 따위는 어울리지 않아. 제가 바로 공주님에게 가장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드, 듣고 보니 그럴 듯해…….”
“그럼 구혼자로 인정해주시는 건가요?”
“네, 네. 그럼 다음은 너인가!”
유키 다음으로 문지기는 리들을 바라보았다. 리들이 웃으며 앞으로 한 발자국 나섰다. 리들 선배는 어떤 프러포즈를 준비했을까? 그리 생각하며 유키가 리들 쪽을 쳐다보았다. 리들이 자신만만하게 입을 열었다.
“저는 성실함을 맹세하겠습니다. 어떠한 때에도 사랑하는 사람을 의심하거나 상처 주지 않겠다고 약속하지요. 배우자를 위해서라면, 이 몸이 있는 한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부디…… 저를 당신의 결혼 상대로 골라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리 말하며 리들이 손을 내밀었다. 유키도 리들이 주어진 과제를 대충 할 거라고는 생각하진 않았지만, 진심으로 성실함을 말하는 리들에게 조금 두근거린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유키보다 더 빨개진 문지기가 조금 붉어진 얼굴로 창끝을 바닥에 내리쳤다.
“크흠……! 의지가 돼. 나까지 조금 두근거려버렸군.”
“정말이야. 멋있어……!”
에펠의 맞장구에 에이스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아. 이거 완전 놀릴 건수 잡은 표정인데.’ 유키가 그리 생각하며 에이스가 리들을 놀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기숙사장도 진심이잖아요?”
“그, 그만해 너희들……!”
리들이 부끄러운 듯 손사래를 쳤다. 마지막으로 루크가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셋 다 훌륭해. 다음은 내 차례군.”
“좋은 프러포즈 덕에 허들이 높아졌다. 어설픈 프러포즈로는 더 이상 두근거리지 않아!”
‘루크 선배가 실패할 리 없지.’
유키는 그리 생각하며 일행을 바라보았다. 일행들도 그 루크가 실패할 리 없다 생각했는지 별 생각 없어 보였다.
“—아름다운 그대여, 나를 영원히, 당신의 ‘사랑의 종’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해. 몇백년이나 고독에게 괴롭힘당한 그대에게, 마음을 담은 시를 바치지.”
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루크가 시 작문에 일가견이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런 상황에서 바로 시를 지을 줄 몰랐던 탓이다. 루크가 시를 읊기 시작했다.
‘아아! 비극의 공주여.
그 차가운 뺨을 따뜻하게 해주고 싶어.
항상 울며 지내고 있구나. 가까이 있는 행복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젖은 그 눈,
손바닥으로 상냥히 가려줄게.
지금이라면 보일 터. 그래, 그것이야말로 진실된 사랑.
유리처럼 투명한 그 눈에 희망의 반짝임이 돌아오길.’
잠시의 정적이 흘렀다. 에이스가 입을 열었다.
“뭔가……. 듣는 것만으로도 부끄럽다고나 할까, 간지럽다고나 할까…….”
사랑시를 읽는 것은 좋아하지만 직접 들은 입장으로는 에이스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저런 부끄러운 말을 표정 하나도 변하지 않고……!’
유키가 속으로 경악하고 있을 때, 리들이 소리쳤다.
“헛! 다들! 루크 선배의 시를 세로로 읽어봐!”
“읽으라고 해봤자 기억 못한다구.”
“아쉽군. 아까 전의 시를 기록해 읽을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루크 선배의 시를 앞문자만 읽으면, ‘사랑해’가 된다고!”
두운 맞추기를 이렇게 해낸다고? 유키가 놀라서 “전혀 몰랐어…….” 중얼거렸다. 루크가 리들을 보며 씩 웃었다.
“그래, 잘 알아냈구나, 리들 군.”
“저는 십자말풀이가 특기니까요.”
“이거, 십자말풀이랑 관련 있어?!”
“폼피오레 녀석들은 다 이상해…….”
“가, 같은 선상에 두지 말아줘!”
에이스와 에펠이 어이없다는 듯 외쳤다. 유키가 눈을 감았다. 이상적인 왕자님 어필을 하겠다면서 정숙하게 있지 않고 떠들썩하게 구는 것을 보니 글렀다 싶었던 것이다. 유키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왕자님은 이런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조금 덜 경박한…….
“아직 부족한가? 그럼 다음 시를 바치지!”
“이제 됐어—! 열기는 잘—— 전해졌다! 지금까지의 각오 없던 구혼자들과는 다르다고 인정하지!”
루크의 간지러운 시를 더는 듣기 싫었던 것인지, 문지기 고스트가 손을 휘두르며 외쳤다. 다들 합격인 모양이네. 그런 의미로 유키가 에이스에게 눈짓했다. 리들이 조바심이 났는지 새침하게 말했다.
“그러면 어서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겠어?”
“하지만 말야, 역시…….”
“역시?”
“키도 그렇고, 성별도 그렇고…….”
“기, 기숙사장! 진정해요!”
“……잘도…….”
리들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마지막 구출대의 키는 모두 180cm 이하. 공주님의 기준을 맞추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리들에게는 그것이 중요하지 않았다.
“저 녀석, 기숙사장의 대단함을 몰라서 그래요! 싫다 정말—… 하하…….”
에이스가 필사적으로 리들을 말렸지만…….
“Off with Your Head!”
리들의 마법까지 막지는 못했다. 고스트를 불태워버린 리들이 잔뜩 화난 목소리로 외쳤다.
“이놈이고 저놈이고! 일반적으로 남성의 키 크는 연령은 18세까지! 내겐 아직 1년이나 여지가 있어!”
“그렇지만, 이렇게 화려하게 마법을 쓰면…….”
소란에 자극받은 고스트들이 달려오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이상, 정면 돌파다!
숨이 차도록 달렸지만 고스트들이 불어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결국 리들이 중간에서 고스트들을 맡아 남았다. 유키는 체력 단련 시간에 꾸준히 달리기를 해 온 것을 다행으로 생각하며 다른 세 명과 함게 복도를 내달렸다.
“고스트 가신의 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어!”
“저쪽도 전력이라는 거겠지. 뭐라 해도 500년 전부터 계속 기다려온 결혼식이니까.”
“진짜 성가시네요!”
“성가신, 건가…… 확실히 그렇지. 그렇지만 그 열의는 칭찬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니?”
숨차게 달리며 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상황이었더라면, 혹은 화면 너머로 본 가상의 이야기라면 공주님을 칭찬해 줬을지도 모른다. 이상적인 왕자님이 존재하는지 아닌지도 모르면서 그를 기다리는 공주님이라니. 순진하고 가련하지 않은가.
‘부장이 죽을 뻔하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그런 아이나 가질 바람을 지금까지 품어왔다는 것도 대단하다. 유키가 입을 열려던 차, 에이스가 달리면서 소리질렀다.
“칭찬이요?! 그런 느긋한 소리 할 상황이에요 지금?!”
“누구라도 양보할 수 없는 건 있어. 그걸 위해 수단 방법 가리지 않는 감정은 나도 잘 알고 있지. 그건 분명…….”
루크가 마법을 쏘아냈다. 천장에서 기다리고 있던 궁병 고스트가 잠시 형태를 유지할 힘을 잃고 이지러졌다.
“내가 너희들을 지키고 싶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거야.”
‘와, 정말 영화 속 한 장면 같잖아.’
유키는 그리 생각하며 자신을 내버려두고 가라는 루크의 말대로 달렸다. 에이스가 당황하여 머뭇거리자 에이스의 팔을 잡아끌어 달렸다.
“야, 유키! 너까지……!”
“여기는 루크 선배한테 맡기자.”
“뭐~?”
“에이스나 에펠이었더라면 못 믿었겠지만, 루크 선배라면 믿을 수 있어.”
“야!”
아무리 달려도 추격대 고스트들은 계속해서 따라붙었다. 결국 따라잡혔다. 이번에는 에펠이 뒤를 막아서서 매지컬 펜을 들었다.
그리고 아무도 공격하지 않았다.
“공주님, 도망치세요!”
“공주님? ……유키?”
에펠과 에이스가 동시에 유키 쪽을 바라보았다.
“그 아름다운 모습! 당신은 결혼식에 참여하러 오신 이웃나라 공주님이시죠? 옆 분홍 드레스의 공주님은 자매분이신가요?”
“……설마, 에펠?”
유키가 고개를 돌려 에펠을 보았다. 아무리 봐도 저 녀석들, 에펠을 여자로 착각하고 있잖아! 큰일났다. 이러면……
“연약하신 공주님, 그 흉포한 놈들의 근처는 위험합니다! 어서 저희 쪽으로……!”
“누가 공주야——!”
에펠의 마법이 고스트들에게 직격했다. 머리카락이나 옷이 그을린 고스트들이 놀라 흩어졌다. 후열에 있던 대장 고스트가 에펠을 자세히 보더니 소리쳤다.
“이 얼마나 말괄량이…… 아니, 잠시만. 이 녀석 남자야!”
“전원 이 남자를 막아라!”
“유키! 에이스! 먼저 가!”
“너 혼자서 이 많은 고스트들의 상대가 될 리 없잖아?!”
“연약하다니, 얕보인 채로 있을까 봐?! 따끔한 맛을 보여주겠어.”
“에펠! 조심해야 해!”
“따끔한 맛을 보여주고 올게, 유키!”
유키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에이스의 손을 잡아 끌었다. 에이스가 당황하여 유키를 쳐다보았다.
“이제부터는 스피드런이야! 최대한 빨리 신부에게 가서, 이 결혼식을 끝내는 거야.”
유키가 속사포로 내뱉었다. ‘스피드런’이라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완전히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에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유키의 손을 잡고 냅다 달렸다. 대식당까지 한달음에 달려가서, 문을 박차고 외쳤다.
“그 결혼! 잠깐 멈춰어어!”
“뭐, 뭐야 당신?! 중요한 결혼식을 방해하지 말아줄래?!”
“뭐—가 중요한 결혼식이야! 하고 싶은 대로 하기나 하고. 지금 당장 저승으로 보내주지!”
“공주님께 손대지 마!”
공주에게로 달려가는 길을 가신 고스트들이 막아섰다. 쓰러트려도 계속해서 일어나는 고스트들의 특성상 공주에게로 가는 짧은 길이 그렇게 길게 느껴졌다. 점점 가까워지고 있긴 하지만, 이데아에게 키스만 하면 되기 때문에 그를 구하는 일은 요원해 보였다.
“정말, 이데아 님도 참. 언제까지 도망칠 생각이에요?”
“조, 졸자, 처, 첫경험은 소중하게 하고 싶은 파입니다!”
“이데아 선배를 봐. 얼굴을 필사적으로 움직여서, 전력으로 거부하고 있잖아!”
에이스가 외쳤다. 실제로 얼굴만 움직일 수 있는 이데아는 그 얼굴을 필사적으로 돌려가며 공주의 입술을 피하고 있었다.
“너희도, 실은 자신들의 공주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고 있잖아?”
“모든 것은, 공주님을 위해서다! ……공주님은 정말로 상냥하고, 밝고, 나라의 모두가 공주님의 장래를 기대하고 있었지.”
할멈이 비명처럼 외쳤다. 자신들의 상냥하고 밝은 공주님이 한 순간에 다른 사람의 생을 앗아갈 고스트가 되었음에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갑자기 일어난 이웃나라와의 전쟁 때문에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없어졌다! 하지만 당신을 지키지 못했던 우리를 나무라지 않으시고, 공주님은 언제나 웃어주고 계셔.”
“우리 앞에서는 괜찮다고 말씀하지만, 괜찮으실 리가 없잖아! 500년이나 언젠가는 왕자님과 만날 거란 꿈을 꾸지만, 이루지 못하고……”
“우리들은 모두, 좋아하는 공주님의 단 하나의 꿈을 이루어드리고 싶은 게야.”
에이스 옆에서 계속 입을 꾹 다물고만 있던 유키가 더이상 참지 못하고 냅다 소리쳤다.
“그렇다고 당신들의 공주님처럼 불쌍한 사람을 더 늘려버리면 안 되는 거잖아요?”
가신 고스트들의 공격이 잠시 멈췄다. 바보 같은 표정을 쳐다보던 에이스가 씩 웃었다.
“하하! 유키, 좋은 말 하잖아. 다른 사람에게 민폐를 끼쳐도 괜찮은 사정은 없어. 저 공주님이 바라는 ‘이상적인 왕자님’이 있을 리가 없잖아?”
“……왕자님이, 없어?”
“당신에게 맞춰진 것처럼 이상적인 상대가 있을 리가 없어.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잖아!”
유키가 옆에서 “맞아!” 소리쳤다. 반으로 쪼개진 거울처럼 잘 맞는, 이상적인 상대 따위가 있을 리가 없다. 만약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잘 꾸며진 거짓일 가능성이 높다. 사기꾼이거나 포교하려는 사이비 종교 신봉자일 확률이 훨씬 높은 것이다.
“공주님께 무슨 망발을!”
“공주님, 귀를 기울이실 필요는 없습니다!”
“당신들이 그런 이상한 희망을 불어넣으니까, 공주님은 존재하지도 않는 상대를 오랫도록 찾아헤매게 된 거야!”
공주님을 감싸던 할멈과 할아범이 입을 다물었다. 에이스가 씩 웃었다.
“불쌍하다고 해서, 공주님을 설탕 과자 다루듯 다루는 거, 동정심도 뭣도 아니라고! 결국, 주위 녀석들이 본인을 마주하는 걸 피해서 지내고 있을 뿐이잖아!”
트레이와 케이터가 서로 눈을 마주하고선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에이스가 마지막 한 마디를 내질렀다.
“제대로 공주님께 가르쳐 줘! 신랑에게 중요한 건, 겉모습 따위가 아니라고.”
공주는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이데아에게서 한 발짝 물러섰다. 에이스를 가만히 바라보며 질문했다.
“그럼, 겉모습 외의 무엇으로 왕자님을 골라야 해?”
“그~러~니~까! 우선, 왕자님일 필요가 없다는 거야! 이상적인 결혼 상대란 건, 함께 울고 웃을 수 있는 녀석, 아무리 괴로운 때라도 함께 힘낼 수 있는 사람이라고. 부끄러운 소리 하게 하지 마! 가신이라는 녀석들이 그런 당연한 것도 안 알려주고! 500년이나 함께 있었으면서, 도움이 하나도 안 되잖아!”
그리고 문이 다시금 열렸다.
“에이스가 말한 대로야.”
“기숙사장!”
“에펠! 늦었잖아!”
“맞아. 두 사람 다, 늦었잖니.”
유키가 에펠에게 장난스럽게 외쳤다. 그 말을 받아 빌이 폼피오레의 두 사람에게 면박을 줬다.
“좋—아. 턱시도 부대도 다들 모였으니…… 슬슬 포기해 주실까?”
“그대들, 지금이라면 아직 다시 할 수 있다네. 소중한 공주님을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나쁜 고스트로 만들고 싶진 않겠지?”
루크의 말을 듣고 공주가 눈을 깜박였다. 자신이 저지르려는 짓을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었다. 공주 옆에 있던 뚱뚱한 근위대장 고스트가 속삭였다.
“나쁜 고스트? ……나를 말하는 거야? 생을 앗아가다니, 그럴 생각이, 난……!”
“들을 필요 없습니다, 공주님. 당신은 나쁜 사람이 아니야.”
“끝까지 그렇게 말하기냐?”
“자신이 잘못되었다는 걸, 아직 모르는 거야?”
공주 옆에 있던 뚱뚱한 고스트가 에이스와 에펠의 반박에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되었든, 어떻든 상관 없어! 온 세상을 적으로 돌리더라도 나는 공주님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나의 남은 한. 내 소원이다!”
뚱뚱한 고스트의 모습이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마네킹처럼 굳어버린 다른 이들을 대피시킨 이후 리들이 외쳤다.
“전원, 전투 준비!”
“이제는 단절의 반지도 끼울 수 있을 것 같군.”
“그런…….”
공주가 고개를 푹 숙였다. 에이스의 빈정거림도, 신난 에펠의 외침도 그에겐 닿지 않았다. 공주가 결국 포기한 줄 안 유키가 안쓰러운 눈으로 공주를 쳐다보았다.
사랑이란 원래 민폐인 법.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하는 것. 공평하지 못하고 특정 인물을 편애하는 것. 그런 법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기에 유키는 사실, 조금은 공주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좋아하는 마음을 말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엄청난 용기가 필요하니까. 신난 에이스를 쳐다보던 유키가 한숨을 폭 쉬었다.
고개를 든 공주가 이름을 외쳤다.
“처비—!”
“……에?”
유키가 얼빠진 소리를 냈다. 그러건 말건 공주는 아까 전의 뚱뚱한 고스트에게 다가가 외쳤다.
“아아, 어떻게 이런 일이. 처비. 나를 악당으로부터 지키고, 이렇게 너덜너덜해져서는…….”
“악당? 지금 우리 말하는 거?”
유키가 에이스의 옆구리를 찔렀다. 조용하라는 뜻이었다.
“공주님, 슬퍼하지 말아주세요. 당신의 미소가 제 행복입니다.”
“처비? 어째서, 네 몸이 점점 사라지는 거지?”
“아까 전투로 힘을 다 써버린 모양입니다. 공주님…… 부디 언제까지나, 웃어주세요. 당신의 행복을 항상 마음 속에서 빌겠습니다. 왕자님과, 오래오래 행복하게…….”
신파극 찍고 있네. 에이스가 작게 빈정거렸다. 유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저런 비련의 여주인공 흉내 내봤자 결국에는 패배한 자들의 이야기일 뿐이다. 이제는 빼앗긴 일상을 돌려받을 때였다.
“가지 말아줘! 나, 그대가 항상 곁에 있어주었기 때문에 괴로워도 꿈을 좇을 수 있었어. 그대가 필요해!”
“공주님…….”
“아…… 그렇구나. 이제, 겨우 알았어. 내 진정한 왕자님은…… 처비 너야!”
모두가 경악했다. 유키가 에이스에게 속삭였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내가 알까보냐…….’
두 사람이 그런 대화를 나누건 말건, 공주와 처비는 두 사람만의 세상에 빠져 있었다.
“처비……. 사랑해.”
공주가 처비에게 키스하자 처비의 몸이 아물기 시작했다. 사랑의 키스가 그를 구했다며 기뻐하는 공주님과 가신들을 보며 나이트 레이븐 칼리지 학생들이 어이없는 표정을 했다. 두 사람이 결혼하고 이데아를 놔준 건 좋은 일이지만…… 이렇게 간단히?
“……뭔가 졸자, 고백도 안 했는데 차인 것처럼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런 것은 신경쓰지 않도록 하죠. 이데아 군.
“다들, 움직일 수 있게 돼서 다행이야.”
“구하러 와줘서 고마워, 유키.”
“공주님 앞에서 아무 말도 못한 바보 말은 안 들려.”
“잠깐, 유키?!”
유키가 듀스와 떠들며 킬킬거렸다. 움직일 수 있게 된 다른 사람들도 다른 턱시도 부대들에게 고맙다고 말하는 등 떠들었다. 학원장이 해피엔딩이라고 떠드는 소리를 넘어서 고스트들이 신혼여행을 가겠다며 사라졌다. 어쨌건,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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