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유키] 크리스마스 이브 디너
벽난로에서 나무 타들어가는 타닥타닥 소리가 났다. 유키는 벽난로에서부터 전해져 오는 다정한 온기를 느끼며 제 무릎 위에 누운 그림을 쓰다듬었다. 이제 완전히 고양이 취급을 받는데도 다정한 손길이 마냥 좋은 모양인지 그림은 기분 좋게 졸고 있었다. 가끔 “유키…… 참치캔이 산처럼 쌓여 있다고?” 같은 잠꼬대를 하는 것을 보니 꿈에서 산타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도 받는 모양이었다. 이럴 땐 뜨개질이라도 하면 딱인데. 유키는 고교 입시가 끝난 2학기의 학교에서 하겠다며 산 뜨개바늘과 실들을 떠올렸다. 지금의 생활비로는 꿈도 못 꿀, 울이 잔뜩 들어간 실을 샀는데. 색색의 실들로 목도리를 짜서 그림과 고스트들에게도, 에펠에게도, 츠노타로에게도, 에이스와 듀스에게도 주고……. 일어날 수 없는 일을 떠올리며 유키가 옅게 웃었다.
이런 상상을 하지 않아도 최근의 유키는 트위스티드 원더랜드에 떨어진 이래 가장 행복했다. 일단은 대형 사고가 일어난 스카라비아에서 탈출했지 않은가. 게다가 무릎 위에서는 먹보 고양이가—사실은 마수지만— 졸고 있고, 할 것도 없어 매지카메의 피드만을 새로고침하고 있는 한가로운 일상이라니. 이런 평화로운 일상만이 계속되었으면 좋겠다—고, 유키는 잠깐이지만 생각했다. 이렇게 평화롭게 지내다가 돌아갈 수 있으면 좋겠네. 이미 바로 K고에 입학할 수 있을 정도로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그건 어떻게든 되겠지. 유키가 그림의 털을 쓰다듬으며 후훗, 작게 웃었다.
유키가 맨날 ‘돼지 고양이’라고 놀리지만, 먹는 양에 비한다면 그림은 도무지 살이 찌지 않는 축이었다. 유키는 그림의 말랑말랑한 목살들을 주물렀다. 언젠가 다이어트를 시키긴 해야 하는데 말이야. 살찐 고양이의 집사나 할 법한 생각을 하며 유키는 창 바깥으로 눈을 돌렸다. 아직 완전하지는 않지만, 이제 고물 기숙사는 겨우 흉가 티를 벗어내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엄청나게 오랜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막상 날짜를 세어 보면 얼마 되지 않았지만. 3년 정도는 흐른 줄 알았는데 고작 3개월밖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무척 신기했다. 크리스마스를 가족이 아닌 그림과 단둘이 —고스트까지 포함한다면 다섯이서— 보내야 한다는 건 조금 외로울지 모르지만, 그래도. 그럼에도 내일은 성탄절이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는, 가족과 사랑을 나누는 날. 내일은 이 세계에서의 가족 같은 존재들과 충분히 즐겨야 했다.
오늘은 크리스마스 이브. 학원장이 보낸 식재료들도 도착했고, 로스트 치킨의 레시피 메모도 끝냈다. 소고기는 냉장고에서 순조롭게 양념이 배어들어가고 있었으니 내일은 끝내주는 크리스마스 디너를 보낼 수 있을 것이다. 트레이 선배한테 크리스마스 푸딩의 조리법도 여쭤볼걸……. 매지카메로 갑자기 연락하기는 좀 그렇나. 생각하며, 유키는 침까지 흘리며 자는 그림의 볼따구를 사정없이 늘렸다.
“돼지 고양아. 일어나.”
“이익, 유키 이 바보! 이 몸은 돼지도 고양이도 아니라구!”
“그럼 먹보 너구리라고 불러줄까?”
“너구리도 아니라구! 나는 대마법사가 되실 그림 님이라니깐—?!”
“알겠어. 알겠어. 오늘 저녁 메뉴나 생각해 보자.”
저녁 메뉴 이야기가 나오자 불만 가득하던 그림의 눈에 반짝 총기가 돌아왔다. 한쪽 손을 번쩍 들고 발표하듯이 자신있게 소리쳤다.
“오늘 저녁 메뉴? 나는 참치 캔—!”
“기각. 참치 캔은 간식이고, 오늘은 이미 한 개 먹었잖아.”
“이익. 유키 정말 치사하다고!”
“교장이 참치캔은 추가로 안 보내줬단 말이야. 학교 재단에서 나오는 생활비 장학금으로는 두 사람분 식비 감당하기 힘든 거 알지?”
“몰라! 교장도 유키도 치사하다고!”
그림은 그렇게 소리치고선 돌아앉았다. 그림의 동그란 뒷통수를 보며 유키가 한숨을 푹 쉬었다. 정말이지, 이 먹보 고양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유키는 잔뜩 삐져 돌아앉은 그림을 그대로 끌어안고 말했다.
“대신에 오늘은 참치 캔 말고, 생선을 구워 먹을까? 기름이 잔뜩 오른 꽁치를 오븐에 껍질이 바삭하게 굽는 거야. 내 고향의 일죽삼채(一汁三菜)를 보여줄게.”
“일족삼치? 뭔가 생선 요리 이름 같다구!”
“아하하, 그건 아니고, 메인 요리 하나와 세 가지 반찬을 이야기하는 거야. 마침 교장이 보낸 식재에 쌀과 야채들이 있었거든.”
유키는 그림을 끌어안은 그대로 부엌으로 향했다. 부엌 바닥에 그림을 내려놓은 이후 냉장고를 열었다. 막상 일본에 있을 때는 크리스마스 이브 때 가족들과 양식 파스타와 스테이크 같은 것을 먹었는데, 트위스티드 원더랜드에 오고 난 이후에는 이런 특별한 날에 일식을 먹게 된다. 평소에 양식을 먹어서 그런 걸까. 신기하네. 공연한 것을 생각하며 유키가 킥킥 웃었다. 유키가 웃는 것을 올려다보던 그림이 뭔가 기억난 듯 소리쳤다.
“그러고 보니까 지난번에 고향 음식 해줬던 걸 기억한다고! 밥이랑 소고기 카레! 일족삼치는 뭔가 다른 거야?”
“일죽삼채라니깐. 그리고 그건 음식 내는 방식을 말하는 거야. 음식 이름이 아니라구.”
“음식이 아니면 관심 없다구!”
“그러니까아…… 아니다. 나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
유키가 앞치마를 둘러멨다. 냉장고의 쌀통에서 쌀을 퍼담아 씻었다. 가구를 만들 수 있는 마법 기구가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 가구로 전기밥솥까지 만들 수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지만. 순식간에 쌀을 씻어 밥을 안친 유키는 다음으로 냉장고에서 오이와 가지, 당근 같은 야채들을 꺼냈다. 밥 짓는 냄새가 서서히 나기 시작하자 고스트들이 부엌을 기웃대며 유키가 하는 양에 말을 얹어댔다.
“유키, 벌써 저녁을 준비하는 거니?”
“로스트 치킨부터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야?”
“그림은 야채를 싫어하는데, 야채 조림을 만들려고?”
“간단하게 야채 절임을 만들 거예요. 로스트 치킨이 올라가는 크리스마스 디너는 내일. 오늘은 꽁치 오븐 구이를 먹을 거예요.”
요리에 일가견이 있다던 고스트가 의아한 얼굴로 질문했다.
“꽁치 오븐 구이? 생각보다 소박하네. 크리스마스 이브인데 그걸로 되겠어?”
“제 고향에서 해먹던 식으로 하려고요. 그리고 크리스마스 디너에 고기 요리가 두 가지나 올라갈 텐데, 오늘은 좀 소박하게 먹어도 되지 않겠어요?”
유키가 그러며 지퍼 백에 썰어둔 야채를 담았다. 간장, 식초, 설탕과 물을 섞은 소스를 그림이 잡고 있는 지퍼 백에 넣고 단단히 잠갔다. 겨우 이걸로 다 된 거냐고 질문하는 그림에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지퍼백 채로 냉장고에 넣어 이렇게 한두시간 절여 주면 된다고 설명할 쯤, 현관에서 누군가가 초인종을 눌러왔다.
“네, 나가요—.”
이 날씨에 손님을 바깥에 세워둘 수는 없어 앞치마도 풀지 않고 급하게 뛰쳐나갔다. 문을 열자 키 큰 남자가 유키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눈꼬리가 올라간 것을 보니 옥타비넬의 곰치 쌍둥이 중 제이드 쪽이었다.
“오랜만입니다, 유키 씨.”
“아, 제이드 씨! 오랜만이에요.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신가요?”
“크리스마스 파티 초대장을 드리러 왔습니다.”
“어머. 크리스마스 파티요?”
“예. 그림 씨와 단둘이 보내시는 것은 아무래도 외로우실 것 같았기에.”
그리 말하며 제이드가 눈을 접어 웃었다. 마치 홀릴 것 같은 곱고 예쁜 웃음이나 유키는 그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알았다. 아즐 씨가 또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모양이네. 유키는 깊게 고민하지 않고 말했다.
“이거 아쉬워서 어떡하죠. 옴보로 료의 식구들과 함께 저희 나름대로의 크리스마스 파티를 준비하고 있어서요.”
“옴보로 료의 식구라고 하시면, 고스트들까지 포함하시는 건가요?”
“예. 같이 밥을 먹을 순 없지만, 함께 노래하고 춤출 수는 있으니까요.”
“예. 알겠습니다.”
그대로 돌아서려는 제이드에게, 유키가 갑자기 생각난 듯 제안했다.
“제이드 씨, 혹시 시간 괜찮으시다면… 저녁 드시고 가실래요?”
“저녁 식사… 말인가요?”
생각지도 못한 제안에 제이드가 눈을 크게 떴다. 의외라는 표정에 유키가 멋쩍게 웃었다.
“마침 와주신 김에, 네요. 저녁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거든요. 옥타비넬의 세 분께는 감사한 일도 있고 하니.”
“빚을 하나라도 줄여두겠다, 이 말씀이시군요.”
“음, 그런 것까진 아닌데… 그냥 겸사겸사죠. 꽁치가 홀수로 들어와서.”
유키 제가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꽁치가 하나 더 남았다면 그림에게 하나 더 구워주면 될 일 아닌가. 제이드도 그렇게 생각하는지, 조금 놀란 표정으로 유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유키가 그를 마주 올려다보자, 그는 곧 심란한 표정으로 유키의 눈을 마주보았다. 유니크 마법이라도 쓰려는 걸까. 유키는 바짝 긴장했지만 그 눈을 피하진 않았다.
제이드는 유니크 마법을 사용하지도, 그렇다고 다른 말을 하지도 않고 유키를 쳐다보기만 하다가 결국 입을 열었다.
“넘어가줘야 합니까?”
“그건 제이드 씨 마음이죠.”
“그 때 중정에서도 그렇고. 유키 씨는, 정말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태연하게 하시는군요. 어머니께서 말씀하셨죠, 여자의 눈물 다음으로 믿으면 안 되는 것은 여자의 혀라고.”
“저,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는데요.”
순진한 표정을 하면서도 유키는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채고 속으로는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다. 제이드는 매지컬 시프트 대회 직전의 일을 말하고 있는 것이었다. 하츠라뷸 학생들과 그의 충돌을 막기 위해, ‘너무 잘생겨서 좀 봤는데… 안되나요?’ 라며 거짓말을 했던 일을. 그 때도 꼭 아까 전처럼 눈을 크게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가, 어쩐지 즐거운 표정으로 놓아줬었지.
“모르신다면 됐습니다. 유키 씨. 숙녀의 비밀을 캐내는 취미는 없기에.”
“……그래도 추우니까, 몸이라도 좀 녹였다가 가시지 않을래요? 저녁 식사는 거절하셔도 괜찮으니까.”
“누가 거절한다고 했던가요?”
“에.”
이번엔 유키가 눈을 동그랗게 뜰 차례였다.
“맛이야 조금 걱정되긴 하네요. 지난 번 모스트로 라운지에서의 아르바이트 때, 그림 씨가 끔찍하게 일을 못했기에.”
“요리는 그림이 아니라 제가 하니까, 걱정 않으셔도 돼요.”
“그런가요?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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