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즐유키] 자, 그럼 계약서에 사인을
“저를 알고 싶어요?”
아즐 아셴그로토는 무력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감한 갈색 눈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유키 화이트는 한참이나 뒤에 입을 열었다.
“알고 싶다는 말씀이 단순히 좋아하는 것이나 싫어하는 것을 알고 싶다는 의미는 아닐 거라고 생각해요.”
“정확합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의, 어떤 본질에 가까운 것입니다.”
“그럼 계약할까요.”
순간 ‘제정신입니까?’라고 외칠 뻔했다. 아즐 아셴그로토는 마음을 가다듬었다. 유키 화이트가 계약을 요청해 온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첫 번째 계약은 고물 기숙사를 담보로 한, 말미잘들을 풀어주기 위해 한 계약이었다. 유키 화이트가 이겨 아즐 아셴그로토는 기껏 노예로 만든 말미잘들을 모조리 풀어줘야만 했다. 추후 물어봤을 때, 이길 자신은 전혀 없었다고는 하지만……
‘실상은 전혀 모르는 거지.’
유키 화이트가 자신이 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아즐 아셴그로토는 생각한다. 하긴, 사바나클로의 기숙사장 레오나 킹스칼라를 구워삶았는데 아즐 아셴그로토 따위가 두려울까. 고소를 머금은 아즐이 유키에게 질문했다.
“조건은?”
“먼저 사랑에 빠지는 사람이 지는 것.”
“……예?”
아즐은 멍청한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유키가 차분하게 말했다.
“연애를 하는 거예요. 아즐 씨에게도 저를 알아가야 할 기회가 있어야 하니까.”
아즐은 이를 악물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부끄러움이나 떨리는 기색 하나 없이 그런 말을 하는 유키는, 정말이지 아즐을 전혀 사랑하게 될 일 없는 것 같았다. 아즐은 분한 마음을 감추고 말했다. 저 작은 여자가 아즐이 이미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것만 같아서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유키 씨는, 그걸로 괜찮습니까?”
“네. 제 과거라면 그냥 말해드릴 수도 있긴 한데, 제가 아즐 씨에게 받고 싶은 게 있거든요.”
“무엇입니까?”
아즐은 조금 성급하게 말을 꺼냈다. 유키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다 새침하게 한 마디 내뱉었다.
“말할 수 없어요.”
“서로 지불할 것을 모르는 상태로는 계약을 할 수 없습니다만.”
아즐의 말에 유키가 잘 모르겠다는 듯 눈을 깜박이다 대답했다.
“그래요? 그러면…… 음. 소원권으로 할까요.”
“소원권?”
“네. 딱 한 번, 무슨 말이든 들어주셔야 하는 거예요.”
“제가 많이 밑지는 것 같군요.”
“그럼 아즐 씨도 소원권 하나 받아가세요.”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밑질 게 없다는 태도였다. 무조건 이길 거라고 장담하는 태도. 첫 번째 계약 때도 유키는 저런 얼굴이었다. 연기하듯 감정을 숨긴 채 사무적으로 자신을 대했다. 다른 친구들 앞에서는 걱정도 하고,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해 놓고서는 아즐의 앞에서만 무미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유키도 아즐의 앞에서 감정의 조각을 보여준 적이 있었다.
‘몸은 좀 괜찮으신가요? 이제 괜찮아요. 아무도 당신을 해하지 않아. 모두 당신을 걱정하고 있어요…….’
자신을 죽이려 한 자에게 보여주는 투명한 위로. 그것은 아즐을 동정하거나 연민해서가 아닌 걱정해서였다. 저 여자는, 나약한 자 앞에서는 제 가장 연한 부분을 보여주고 강한 자 앞에서는 온도가 없는 냉막한 얼굴을 한다. 자존심도, 평소의 얼굴도 버리고 울며 매달렸어야 했나. 문득 그런 상상을 하다, 아즐 아셴그로토는 픽 웃는다. 그런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그 조건, 받아들이지요.”
“그럼, 오늘부터 1일인 걸까요?”
그제야 유키 화이트는 장난스럽게 웃는다. 개구지게 웃는 표정을 보며 아즐이 고개를 끄덕인다. 황금 계약서를 꺼내 유키에게로 내민다.
“자, 그럼 계약서에 사인을.”
그렇게, 계약 연애가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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