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빌유키] 한낮의 태양

<span class="sv_member">린더</span>
린더 @frauroteschuhe
2025-11-25 06:19

0.

 

 

 

덥다.


세탁이 끝난 세탁기에서 이름 모를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세탁이 끝난 옷가지들을 챙겨 옥상으로 올라왔다. 볕이 좋아 밖에서 옷을 말릴 생각이었다. 이번 여름은 유독 뜨겁고 찬란하다. 이렇듯 빛나는 한낮의 태양 아래에 서 있으면 진득하게 들러붙는 그늘 따위는 모두 사라질 것처럼 느껴진다.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햇빛이 눈에 들이쳐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빛 아래에서 눈을 감으면 시야가 온통 빨갛다. 피의 색이다. 밤이 되면 이 거리를 밝히는 홍등의 색이다. 여름의 뜨거움도, 갑갑한 공기도 참을 수 있지만 이것만큼은 참을 수 없다. 찝찝한 기분을 털어내듯 괜히 옷가지들을 몇 번 더 털어 넌다. 옷을 턴다고 하여 이 기분이 털릴 것도 아닌데. 괜한 몸부림이다.


빨래를 모두 넌 후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엄마는 자고 있다. 어젯밤도 엄마의 방에서는 신음과 욕설이 들려왔다.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잤다. 어릴 적부터 매일 듣는 소리라 새삼 잠 못 들 것도 없었다.


유키노.”

, 엄마.”

내 아기…….”


꿈 속에서 어린 시절의 나라도 보고 있는 모양이지. 엄마는 내가 나이 먹는 걸 싫어했다. 늘 자기 손 안에서 굴러다니는 작은 아기로 남아줬으면 했다. 더 어릴 때에는 엄마가 왜 그러는지 몰랐는데, 이제는 나도 알았다. 남자애로 태어났으면 그러지 않았을 텐데, 내가 여자아이였기 때문이다.


이곳에 흘러들어와 자리를 잡은 여자들은 대체로 창녀가 된다. 이곳은 그냥 여자를 몸 파는 여자, 웃음 파는 여자로 만드는 장소다. 하다못해 흘러들어온 여자들도 그럴진대, 이곳에서 태어난 여자는 어떻겠는가. 엄마는 바깥에서 이곳으로 흘러들어온 여자다. 만일 엄마가 이곳에서 태어난 여자였더라면 나를 지웠을 테다. 그러나 엄마는 외부에서 짓밟히다 이곳까지 도망쳐온 사람이었고, 비극적인 운명을 알지 못한 채 나를 낳았다.


이곳의 아이들은 모두 아빠가 없었다. 나도 그랬다. 그런데 엄마는 내게 아빠가 있다고 했다. 그리고 내 성으로 아빠의 성이라는 시라사키를 붙여주었다. 그리하여 내 이름은 시라사키 유키노가 되었다. 엄마는 내가 스무살이 되기 전에 아빠가 나를 찾으러 올 거라고 했다. ‘시라사키라는 성이 내게 아빠를 찾아줄 거라고 했다. 나는 그것을 믿지 않는다.


내가 그것을 믿든 말든 엄마는 나를 항상 유키노라고 불렀다. 나도 그 이름이 좋았다. 어딘가의 아가씨 같은 이름이니까. 더러움 따위는 모를 것 같은 새하얀 이름이라서.


그렇지만 여기 사람들은 모두 나를 유키라고 불렀다. 시라사키 유키노가 아닌, 성도 없는 그냥 유키. 엄마는 나를 우리 공주님, 내 아가 같은 말로 불렀지만 이 집 바깥으로 나서면 나는 그냥 유키였다.


열일곱 살, 창녀의 딸. 시라사키도 유키노도 아닌 그냥 유키.


유키의 꿈은 별 거 없다. 공주님이 되는 꿈은 애저녁에 버렸다.


공부를 열심히 해서, 엄마랑 같이 이 더러운 곳에서 나갈 거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거다. 아직까지 오지 않는 아빠는 버리고,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 가서 엄마랑 행복하게 살 거다.


집 안에 묵은 공기가 텁텁하다.


창문을 열었다.






1.

 

 

 

이곳에는 최신 영화 포스터가 잘 붙지 않는다.


영화를 볼 사람이 있어야 포스터도 붙는 법이고 뒷골목도 뒷골목 나름이다.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 중 영화 볼 사람은 찾기가 힘들다.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돈도, 여유도 없고, 이곳을 드나드는 사람들은 영화보다 더 원초적인 것에 관심이 있는 탓이다.


학교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뒷골목 초입에 웬 영화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처음에는 멜로 영화인가 했다. 제목을 읽어 보니 유명 액션 영화 시리즈의 신작이었다. 분명 자유의 여신상도, 뉴욕의 저 높은 빌딩도 시원하게 다 터트려 버리는 블록버스터 영화일 텐데 그 남자의 눈빛 때문인지 멜로 영화처럼 보였다.


아니, 아니다. 다시 보니 포스터 속 남자 배우는 강렬한 눈빛을 하고 정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차갑게 느껴지는 아름다운 눈이 포스터 속에서 나를 응시했다. 나도 모르게 포스터 속 그와 눈을 마주쳤다.


그 찬란한 순간,


나는 그저 죽고만 싶어졌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 눈빛에 내 너절한 마음 속 가장 깊숙한 곳까지 샅샅이 파헤쳐진 기분이었다. 온몸이 밝은 태양 아래 발가벗겨진 양 부끄러웠다. 내 모든 것이 그 앞에서는 너저분하고 하찮아 보였다. 그 차가운 눈동자에는 내가 비치지 않는다는 사실이 그토록이나 서러웠다. 수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휘돌았고, 동시에 그 어떤 생각도 명문화되지 않았다.


기이한 감각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이나 그 아름다운 얼굴을 바라보았다.


홀린 듯 영화 포스터에 그려진 입술에 키스했다.


나는 내가 왕자님의 키스를 통해 죽음에서 살아돌아온 공주님이라도 된 줄 알았던 걸까? 입술에 느껴지는 것은 오로지 차가운 무정물. 환상은 깨지고 나는 화들짝 놀라 입술을 떼냈다. 누군가가 보진 않았을까 걱정되었고, 무엇보다 수치스러웠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히도 아직 이 주변을 지나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유 모를 두려움과 수치심으로 나는 포스터 속 남자를 노려보았다.


포스터 안에 그려진 금발의 남자는, 방금 제가 키스당한 줄도 모르는 백치처럼 여전한 얼굴이었다.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작은 글씨로 제목 밑에 적힌 주연 배우의 글씨를 읽었다. 시리즈의 주인공 역을 맡는 유명 배우 옆에, 그 남자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그 남자의 이름은,


빌 셴하이트.


윌리엄이 아닌, . 빌런VillainVil.


뒤에 붙는 셴하이트Schoenheit는 아름다움이란 뜻의 독어.


그러므로 그는 가장 아름다운 악.


나는 도둑질이라도 하듯 벽에 셀로판 테이프로 대충 붙여 놓은 포스터를 뜯었다. 그 얼굴이 보이지 않게 둘둘 말아 손에 쥔 후 황급히 그 자리를 떠났다.


불이라도 붙은 듯 가슴이 화끈거렸다.






2.

 

 

 

도망치듯 집에 들어왔다.


엄마는 사춘기 아이에게는 혼자만의 방이 필요한 법이라며 내게 혼자 쓸 수 있는 방을 내줬다. 창고로 썼던 방이라지만 이 뒷골목의 아이로서는 잘 누릴 수 없는 호사다. 엄마는 안방에서 자고 있는지 안방 쪽에서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낮의 골목은 밤과는 달리 고요하다. 두방망이치는 심장 소리가 엄마를 깨우진 않을까 조심스러워졌다.


살금살금, 죄 지은 사람처럼 방에 들어와 손에 쥔 포스터를 펼쳤다. 포스터 속 남자는 그 벽에 붙어있었던 것처럼 여전히 아름다웠다. 휴대폰을 켜서 포털 창에 검색했다. 빌 셴하이트. 아주 어릴 때부터 아역 배우를 맡은 모양으로, 며칠 전에 열아홉살 생일을 지나보낸 소년이었다. 최근 3년간은 공부에 전념하느라 작품을 하지 않았다고……. 나는 손톱을 이로 씹었다. 불안해질 때마다의 버릇이었다. 불안할 때마다 손톱을 엉망으로 만들어 놓는 바람에 엄마한테 자주 혼나곤 했다. 다시 말리려고 하는 포스터를 노려보며 나는 주먹을 꼭 쥐었다.


이 기분은 뭐지? 아까 전처럼 꼭 죽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두려웠다. 심장이 괴롭게 뛰었다. 아직 어린데 심장에 문제가 생긴 건 아니겠지. 거울 쪽으로 고개를 홱 돌리자 붉어진 내 얼굴이 나를 바라본다. 떨리는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서 붉어진 낯. 기분 나쁠 정도로 소녀인 얼굴.


나는 그제야 이해했다. 영화에서 노래 가사에서 소설에서 드라마에서 지겹도록 떠들어대던 사랑이란 것이 내게 왔다는 것을.


그러나 사랑이란 것이 원래 이렇게 지독하게도 기분 나쁜 것이었던가?


알 수 없다. 비교군이 없기 때문이다. 엄마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또래 남자애들과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여고에 다녔고, 남자와의 대화는 내 쪽에서 쳐냈다. 남자와 대화하지 마. 잘못 얽히면 큰일나. 엄마처럼 돼. 유키노, 유키노는 엄마처럼 살면 안 돼…….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손톱을 씹지 못하니 얼굴에다 난장을 쳐 놓는구나. 엄마가 그렇게 말할 게 뻔했다. 그치만, 그치만. 두려웠다. 엄마의 실망이, 가슴을 터트릴 것 같은 이 감정이. 빌 셴하이트는 연예인이고, 나는 일반인이라 그에게 닿지 못한다는 사실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사랑이 심장을 터트려 놓더라도 나의 삶은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그 사실을 깨닫자 놀랍도록 마음이 가라앉았다. 여전히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지만 불안했던 마음은 놀랍도록 편안해졌다.


그래.


그는 내 삶을 해칠 수 없다.


닿지 않을 사람이니, 내 삶은 오로지 나의 것.


그러므로 내 삶을 진창에 처박거나, 이곳에서 꺼내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게 하거나,


모두 나의 선택.


나는 가방 속에 포스터를 접어 넣었다. 시계를 보니 5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슬슬 엄마를 깨울 시간이었다.






3.

 

 

 

결국 영화관에 왔다.


매표소에서 표를 사고 영화가 시작되길 기다린다. 포스터 속의 그 영화다. 남자애들이나 좋아할 법한 블록버스터 액션 영화. 자동차가 변신하는 그 영화 시리즈. DVD방에서 봤던 경험에 의하면 이 시리즈의 전작들은 별로 내 취향이 아니었다. 이번에도 크게 다를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지만, 나는 확인해야만 했다.


내가 느낀 그 감정이, 사랑이 맞는지.


이맘때 여자아이가 연예인을 좋아하는 일은 흔하지 않는가. ‘덕심과 사랑은 구분된다는 말도 흔하게 해대지 않는가. 사랑 같은 게 아니라 단순한 성욕일 수도 있지 않는가.


멍하게 매표소 앞에 앉아서 팝콘 부스를 쳐다보았다.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더라면 팝콘도, 콜라도 사서 기다리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평범한 고등학생이었더라면 친구와 함께 왔겠지. 혼자 이런 곳에서 초라하게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친구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서 영화에 대한 기대평이나 악평들을 쏟아냈겠지…….


그러나 나는 혼자였고, 팝콘 부스는 가깝고도 멀었다. 거리로는 가까웠고 지갑과는 멀었다. 내가 사는 곳이 슬럼이 아니었더라면, 내가 차라리 저 슬럼의 애들과 같았더라면. 쓸데없는 IF의 이야기들을 떠올린다.


팝콘 먹고 싶니?”


어른 남자의 목소리가 상념을 깬다. 나는 놀라 감각을 곤두세운다. 팝콘 하나로 내 존엄을 사려 할지 몰라. 무슨 짓을 할지 몰라. 나를 저 슬럼에서도 더 깊은 구덩이에 처박을지 몰라. 두려움과 경계심에 바짝 긴장해 있자 남자가 익숙한 듯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선다.


아니, 그런 게 아니야. 나는 이런 사람이란다.”


명함을 내밀었다. S 에이전시 신인개발팀 팀장. S 에이전시라면 휘석국에서도 3대 연예 에이전시라고 불리는 곳이다. 어제 검색해본 바로는 빌 셴하이트도 이 에이전시에 속해 있었다. 이런 사람이, 나에게 왜?


학생 마스크가 너무 좋은데, 우리 회사에 카메라 테스트 한 번 받으러 왔으면 좋겠어서. 팝콘과 콜라는 뇌물.”


이 사람이 나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르지만, 눈을 찡긋거려 보이는 남자에게서 특별한 음험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괜찮지 않을까?


키가 조금 더 크면 좋겠는데. 작은 키도 로맨스에서는 먹히니까 괜찮나. 학생 나이가 몇이야?”

……일곱이요.”

열일곱? 아직 어리네. 아이돌도 할 수 있겠다. 배우 해보고 싶은 마음 없어요?”

, 없어요.”


남자는 속사포로 질문들을 내뱉는다. 나는 정신이 없어져 있는 그대로 대답하고야 만다.


정말로? 한 번도 그런 생각 안 해봤어? …… 그렇지, 빌 셴하이트 좋아해요?”

…… 모르겠어요.”

트랜스포머 시리즈 팬?”

그건 아니에요.”

빌 좋아하는구나.”

…….”


얼굴이 발개졌다. 시도때도 없이 붉어지는 얼굴이 사람을 우습게 보이게 할 게 뻔했다. 그렇지만 그 이름만 들어도 심장이 뛰는 것을 어떡하나. 나는 이미 사랑에 빠져버렸는데. 연예기획사 팀장이라는 사람이 옆에서 킥킥 웃었다. 부끄러워져 얼굴이 더 빨개졌다.


그럼 빌 싸인 받아줄 테니까 나중에 한 번 와보는 건 어때요? 이런 제안 잘 안 들어오는 거 알죠?”


남자는 눈을 찡긋거려보였다. 팝콘과 콜라를 내게 안겨주고 명함에 적힌 연락처로 연락 달라며 떠났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끌어안은 팝콘의 버터 향도, 플라스틱 얼음 컵의 차가움도 내가 발딛고 선 이곳이 현실임을 알려주지 못했다. 순식간에 일어났다가 사라진 일은 현실감 없었다. 엄마가 연예인이 되는 걸 좋아할까. 엄마와 똑같이 몸 팔고 웃음 파는 일이라며 싫어하지 않을까…….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곧 시작한다는 알림이 울렸다. 나는 콜라가 든 얼음 컵을 꼭 쥐고 영화가 시작될 상영관 안으로 들어갔다. 상영관 안은 밝았고 사람이 꽉 차 있었다. 곧 조명이 꺼지고 광고가 시작되었다. 광고의 주연은 빌 셴하이트. 커다란 스크린에 그의 얼굴이 가득 찼다.


.


오디션을 보러 가야겠다.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을 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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