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말레린더] 너랑 나

<span class="sv_member">린더</span>
린더 @frauroteschuhe
2025-11-24 20:29

글자를 써내려가던 매지컬 펜의 움직임이 문득 멈췄다. 말레우스 드라코니아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처리하던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서류의 문제는 아니었다. 서류는 단지 디아솜니아 내부의 마법 연습실 사용 신청 대장일 뿐이었으니. 그러나 그는 곧 신청서에 사인을 끝내고 릴리아에게 서류들을 넘겨주었다. 그를 오래 본 사람이 아니라면 모를 일이나, 표정이 조금 어두워져 있었다.

 

말레우스여,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게냐?”

 

책상 앞에 서서 말레우스가 서류 정리를 끝내기를 기다리던 릴리아가 의아한 표정을 했다. 그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라 수 있었다. 말레우스에게 무언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 모양이었다. 창밖에 비가 오거나 천둥이 치지 않는 것을 보면 거대한 감정의 동요는 아닌 것 같았지만, 그가 이런 표정을 하는 일은 무척 드물다. 말레우스 드라코니아는 부정적인 감정을 숨기는 것이 일상인 이 아니던가.

 

아니, 중요한 일은 아니다.”

 

저렇게 나 무슨 일 있어요.’라고 써 붙인 듯한 심란한 얼굴로 태연하게 거짓말까지. 더는 서류들이 중요하지 않았다. 릴리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네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 어찌 중요한 일이 아닐까. 말해보거라, 말레우스여. 네게는 사소해 보이는 일이라도 실제로는 사소한 일이 아니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

 

말레우스가 한숨을 쉬었다. 말레우스의 한숨은 때로는 거대한 폭풍을 부르는 것이다. 감정을 숨기지 않고 표현하면서도 힘을 제어하고 있다니. 도저히 자신이 아는 범위 내에서는 그럴 만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던 릴리아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말레우스를 바라보았다. 말레우스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

 

그저, 그녀의 본명을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녀? 고물 기숙사의 유키 말이냐? 사실은 가명을 쓰고 있었다니. 또 무슨 사정이 있는 것일까, 그 아이는.”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말레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사람의 아이를 말하는 것이 아니야. ‘그 여자에 대한 이야기다.”

“‘그 여자’? 그가 누구기에 감히 우리의 왕의 심기를 어지럽히는 것일꼬.”

……이름을 모르기에 누구인지 말해줄 수도 없군.”

 

말레우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마음이 무척이나 심란해 보이는데도 바깥은 여전히 맑았다. 잠시 고민하던 말레우스가 말했다. 차분한 목소리였다.

 

간단히 말하자면밤산책 친구라고나 할까.”

산기슭 거리에서 여자를 만났더냐?”

 

릴리아가 장난스레 질문했다. 첫사랑 이야기를 재촉하는 듯한 장난스러운 목소리였다. 말레우스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다. 거울사 주변에서 만났지.”

결계를 아무렇지 않게 뚫고 들어와서 거울사 주변을 배회하는 여자라. 흥미로운 이야기구나.”

흥미로운 이야기라…… 그렇지. 나를 알면서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은 두 번째니 말이다.”

강력한 마법사가 항상 두려운 존재인 것은 아니잖나, 말레우스여.”

 

릴리아의 말에 말레우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릴리아도, 실버와 세벡도 그를 크게 두려워하지는 않았으나, 보통의 인간에게 자신이 어떻게 비치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드래곤 요정인 말레우스 드라코니아가 누구이며, 어떤 힘을 가졌는지 알면서도 그를 스스럼없이 대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말레우스가 대답이 없자 릴리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음이 어지러워 보이는구나. 그러면서 그리 감정의 조절을 할 필요가 있는 것인가. 말레우스여.”

비가 오면, 그녀는 오지 않아.”

 

느린 말씨로 말레우스가 말했다. 겨우 그런 이유로? 릴리아가 놀라움에 눈을 크게 떴다.

 

비는 싫어하지 않지만, 오는 길이 미끄러워 비 오는 날의 외출은 즐기지 않는다고. 그리 말했지.”

그런 건가. 그래. 요컨대, 너는 그 여자를 만나고 싶은 거구나.”

그래. ……그런 것 같다.”

 

담백한 인정이었다. 릴리아는 말레우스의 눈을 가만 들여다보았다. 친애인지 사랑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온도 높은 감정이 눈 안에 뭉쳐 있었다. 어쩌면 정념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법한 뜨거운 감정. 그리 뜨거운 감정을 지니고 있으면서 어째서 직접 만나러 가지 않는 것인지, 의아하여 릴리아는 질문했다.

 

그러면, 만나러 가면 되지 않느냐?”

나는 그녀를 만나러 갈 수 없는 모양이더군.”

 

말레우스는 해가 아직 지지 않은 창 밖을 바라보며 말했다. 릴리아는 더욱 의아하여 말레우스의 옆모습을 가만 쳐다보았다.

 

그녀는 해가 져야만 이곳에 올 수 있다는 것 같고.”

네가 만나러 갈 수 없는 인물이라. 그 여자가 기꺼워하지 않는 것이더냐?”

그녀가 돌아가면, 길이 사라지기에. 추적해보려 했지만, 신호 자체가 사라지더군. 마치 닿을 수 없는 다른 세계로 사라진 것처럼.”

 

릴리아가 안타까운 한숨을 쉬었다.

 

원할 때 네 곁에 와서 마음을 휘젓고는, 제멋대로 사라지는 여자라. 참으로 맹랑한 여아구나.”

……린더는, 내 마음을 휘젓거나 하지는 않았어.”

그 여아의 이름이 린더더냐?”

그래. 본명은 아닌 것 같더군.”

 

말레우스가 의자의 팔걸이를 움켜쥐었다. 어째서 본명을 가르쳐주지 않았는지에 대해 그리 고민했는데도 답을 알 수 없었다. 오늘도 올까. 별이 보일 정도로 날씨는 맑지만, 날씨가 좋다고 하여 항상 그녀가 오는 것은 아니다. 최대한 자주 오겠다고는 말했지만, 즉슨 오지 않는 날도 있을 수 있다는 뜻 아닌가. 말레우스는 그것이, 정말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부정적인 생각은 릴리아의 목소리에 끊겼다.

 

그럼, 오늘 물어보면 되는 것 아니냐.”

……오늘?”

청춘이구나, 청춘이야. 말레우스여. 그래. 말해주지 않았다면, 질문하면 되는 것 아니냐. 말해주길 꺼린다면, 기다리면 되는 것이고.”

기다리면, 된다고?”

 

불안한 목소리. 말레우스의 반문에 릴리아가 씩 웃었다.

 

그래, 시간은 있지 않느냐? 오늘만 날이 아니다. 다음에도 그 여아는 이곳으로 오겠지. 사랑에는 기다림도 필요한 법이란다, 말레우스여.”

사랑은, 아니야.”

그래. 그런 것으로 해 두자.”

 

그리 말하며 릴리아가 키득키득 웃었다. 창밖으로 해가 점점 지고 있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