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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유키] reading winter - 외길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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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25 21:19

ⓒ 외길 님


Reading: Winter


대본처럼 너를 읽고

대본처럼 나를 보니

어느새 첫눈 속 무대 위에.






소식을 듣고 의무실을 찾은 빌은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미묘하게 좁아진 미간 아래의 자색 눈동자가 창가 쪽 침대에 앉아 있는 소녀를 담아냈다. 늘 양 갈래로 묶어 인상적이던 하얀 머리카락을 차분하게 흐트러뜨린 채 멍하니 풍경을 내다보고 있는 상대는 조금 편안한 행색일 뿐, 아픈 사람으론 보이지 않았다. 품에 안긴 짐승을 쓰다듬는 손길 역시 평소와 다를 게 없었는데…. 가늠하던 빌의 낯빛이 일순 못마땅하게 변했다가 수 초 사이 원 상태로 돌아왔다. 티 나지 않게 눈썹을 치켜올린 그가 유키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그러니까 나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거니?”

이미 여러 차례 확인해 본 사실의 반복 검증이었다. 여유로운 말투로도 차마 지우지 못한 떨떠름한 기색을 알아차린 유키가 느지막이 고개를 돌려 빌을 마주 보았다. 그림을 쓰다듬던 손길을 관둔 걸 보아하니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고민하는 듯했다.

“음…, 네.”

그러나 장고 끝에 들려오는 대답은 몇 분 전과 토씨 하나 다르지 않았다. 빌은 저를 숫제 낯선 사람으로 대하는 유키를 정시하다가 입술 끝을 말았다. 깨어난 소녀를 막 마주했을 때 들은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떨어지질 않고 있었다.

‘저… 죄송하지만, 누구실까요?’

분명히 예의를 갖춰 건넨 질문이었음에도 무척 무례하게 느껴져 숨이 막혔다. 이 모든 사건이 괴상한 내기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이 특히나 거슬렸다. 옥타비넬 기숙사장과 위험한 내기를 벌여 승리한 것까지는 어리석긴 해도 당돌한 면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그로 인해 기숙사장의 오버블롯에 휘말려 다치는 일은 완벽히 NG다. 마법도 쓰지 못하는 꼬맹이가 대체 무슨 자신감으로 그랬던 건지.

잠시간 의식을 잃었던 소녀는 다행히 생명에는 큰 지장이 없는 상태로 깨어났지만, 기억에 심각한 공백을 안고 있었다. 그림도 알고, 에펠도 알고, 자기가 고물 기숙사에 살고 있는 것도 알면서 정작 눈앞의 자신은, 빌 셴하이트는 알아보지 못했다. 그 어떤 배우를 불러와도 지금의 유키 화이트만큼 저를 생소하게 여기는 표정은 짓지 못할 것이라 확신한 빌이 한숨을 내쉬며 팔짱을 끼었다. 톡, 톡. 잘 다듬어진 손끝이 습관처럼 팔뚝을 두드렸다.

“폼피오레의 기숙사장, 빌 셴하이트란다. 에펠에게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텐데?”

조금은 냉담하게 떨어진 소개에 유키가 고개를 갸웃거린다 싶더니 이내 무언가를 떠올린 듯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소문의 그 선배님…?”

“소문?”

“무서운 선배님이 계신다고….”

“…아하. 에펠?”

끝이 올라간 목소리에 한 걸음 뒤에서 두 손을 모은 채 그게 아니라는 눈빛을 보내고 있던 에펠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제가 지은 잘못을 아는 그 낯빛에 눈을 가늘게 떴던 빌이 곧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노래하듯 속삭였다.

“네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다녔는지는 나중에 들어봐야겠구나.”

“그게….”

손을 들어 이어지려는 변명을 끊어낸 남자가 다시 유키를 응시했다.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건지 신경 쓰이긴 했지만 지금은 에펠을 붙들고 따질 때가 아니었다.

“몸은 좀 어때?”

“괜찮아요. 머리가 조금 아프긴 했는데 지금은 별 느낌이 없네요.”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당분간은 쉬어 두렴. 기억은?”

“음…, 그건 언제 돌아올지 모른다고 하셨어요. 푹 쉬면서 익숙한 사람이나 가 봤던 장소를 접하면 도움이 될 거라곤 하시던데….”

잠시간 말끝을 흐린 유키가 그새 제 품에서 빠져나가 창가에 붙어 있는 그림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림. 이리 와.”

“또냐?”

푹 한숨을 쉰 그림이 유키의 품에 안겼다. 가볍게 저항하는 그림을 달래듯 토닥인 유키가 작은 앞발을 잡아 들었다. 마치 짠, 하고 애착 인형을 소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건 그림이 도와주면 되지 않을까요?”

“뭐? 이 몸이 왜 도와야 하는데?”

“그림이랑은 항상 같이 있었으니까?”

“…그건 맞지만!”

반박하지 못한 그림이 꼬리를 퍼덕였다. 당최 기쁜 건지 귀찮은 건지, 둘 다인 건지 모를 몸짓이었다.

눈에 익은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던 빌이 자조했다. 누구는 새까맣게 잊어버리더니 저런 모습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공연히 맥이 빠진 남자가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 그럼 마음대로 하려무나.”

참견의 의지를 잃은 그가 그림과 아웅다웅인 소녀를 뒤로하고 의무실을 나왔다. 잠시 등 뒤로 시선이 따라붙는 듯했으나 붙잡는 사람도, 멈춰 서는 이도 없어 그날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빌은 다시 한번 유키가 머무는 의무실을 찾았다.

…난방이 엉망이네. 학기가 끝나 완연한 겨울에 접어들어 그런지 의무실은 지난번 방문 때보다 더 한기가 돌았다. 창문 틈새를 흘기던 빌이 침대 옆 탁자에 과일 바구니를 내려놓았다.

“회복에 좋다니 먹어두렴.”

“…주시는 건가요?”

“그럼 내가 먹으려고 가져왔겠니?”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감사합니다.”

까칠한 선배. 소문에는 이유가 있었구나…. 딱 그런 생각을 하는 낯이다. 속내가 죄 보여 눈꼬리를 치켜올렸던 빌이 보조 의자를 끌어다 앉고서 다리를 외로 꼬았다. 공간에 남아 있는 약 냄새가 눈앞의 소녀가 환자임을 증명해 간신히 쓸데없는 말을 덜게 됐다.

“몸은 좀 어떠니.”

“여전해요.”

“어지럽거나 속이 메스껍지는 않고?”

“네.”

기억은?

습관처럼 따라붙으려는 질문을 혀끝에서 회수한 빌이 인상을 찌푸렸다. 기억을 잃은 당사자보다 자신이 더 조바심을 내는 듯한 이 상황이 이해 가지 않았다. 초조한가? 그런 건 아닌데.

…그런 건, 정말이지 전혀 아닐 텐데.

자신은 그냥, 기억을 잃어 멍한 모습의 유키 화이트가 별로일 뿐이다. 그리 되뇐 빌이 턱을 치켜들며 조언했다. 당분간은 무리하지 말라는, 명령 같은 충고에 고개를 주억거린 유키가 답했다.

“네, 셴하이트 선배.”

셴하이트 선배라….

무심코 읊조릴 뻔한 빌이 손끝에 힘을 주었다. 물론 틀린 호칭은 아니었다. 실제로 그렇게 부르는 학생도 많았고 애초에 제 이름 중 일부였으니까. 하지만 유키 화이트가 자신을 그렇게 부르는 것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빌 선배, 하고 부르던 아이였기에 그런가.

아니. 그것 때문만은 아니지….

빌이 생각하기에 지금의 소녀는 정말이지, 그를 조금도 어려워하지 않았다. 처음 만난 상급생에게 보일 법한 예의를 갖출 뿐, 눈만 마주쳐도 어깨를 움츠리고 거리가 좁혀지면 괜히 손을 만지작거리다가 그림과 대화하는 양 딴청을 피우던 유키 화이트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봐야 했다. 당연히 가끔 드러나던 붉어진 귀끝도 구경할 수 없었고.

그것이 거슬릴 뿐이다. 그래. 그러니까 이건 태도의 문제였다. 하루아침에 나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지면 누구라도 불편해하지 않겠는가. 같은 이유로 빌도 유쾌하지 않았다. 그러니.

“…빌 선배라고 부르렴.”

“네?”

“셴하이트 선배가 아니라 빌 선배라고 부르는 걸 허락한다는 소리야. 어차피 너는 나를 그리 불렀으니까.”

“빌 선배, 라고요….”

조금 전 빌이 그랬듯 기억에 익숙하지 않은 호칭을 읊조린 유키가 힐끗 눈동자만 굴려 빌의 낯을 훑었다.

“…선배님은 왜 이렇게까지 해주세요?”

“무슨 말이지?”

“그게, 자주 와 주시는 것 같아서요. 과일도 주시고… 저는 폼피오레 학생이 아닌데, 괜찮나요?”

이래도 되느냐는 투에 빌이 입을 달싹였다. 그야 품위 있는 기숙사장이라면 언제든 같은 학교 학생의 안부를 살펴야 하니 그렇지. 괜찮지 않을 것도 없단다. 평소 같았으면 곧장 튀어나올 법한 말인데 이상하게도 혀뿌리에 걸려서 나오질 않았다.

기실 그는 폼피오레 학생들만 돌보기에도 하루가 모자랐다. 그런데도 구태여 이 고물 기숙사의 감독생을 찾아 이러고 있으니 단순히 에펠의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는 스스로를 설득할 수가 없었다.

납득하지 못하는 말은 꺼낼 수도 없는 법이다. 그 말 앞에서 당당하지 못한데 어떻게 얘기할 수 있을까…. 결국 빌은 그린 듯 완벽한 대답이 아닌 적당한 대안을 택했다.

“…학생이 다쳤는데 모르는 척할 수는 없잖니.”

“그런가요?”

“그보다, 유키.”

“네?”

“전에 가졌던 커피 브레이크를 기억하는지 궁금한걸.”

자연스럽게 화제를 전환한 빌이 유키의 갈색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누군가와 달리 진실을 숨길 이유가 없는 눈동자가 의외라는 듯 살짝 커졌다.

“저희가 커피를 마셨나요?”

“그래. 그때도 그림이 함께 있었지. 루크도 있었고.”

“어…. 죄송해요. …전혀 기억 안 나요.”

복기하듯 눈동자를 굴려보던 유키가 이내 민망해하며 사과를 건넸다. 어차피 기대도 하지 않았던 빌은 손을 휘저으며 후배의 사과를 중단시켰다.

“됐어. 중요한 건 아니니.”

“아하….”

“하지만 네 기억을 찾는 데엔 도움이 될지도 모르지. 어떠니?”

“네?”

…뭐가요?

눈동자로 반문해 오는 소녀에 빌은 다분히 연극적으로 웃어 보였다. 감정을 숨기고자 더욱 화려해진 미소가 아름답다. 밤에 피는 장미를 연상케 해 멍해진 유키는 멀리서 들려오는 듯한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무슨 답을 한지도 모르고. 몸에 새겨진 듯한 반응이었다.


***


‘다시 커피 브레이크를 가져 보지 않겠니?’

그 말에 유키가 고개를 끄덕인 다음 날, 빌은 화려한 트레이를 가지고서 의무실을 찾았다. 환자를 데리고 밖을 나갈 순 없었으니 의무실 자체를 정원으로 삼는 게 최선이었다.

그렇다 보니 정작 의도와는 달리 그날과 맞지 않는 것이 많았다. 야외도 아니었고 루크도 없었다. 하나 개의치 않은 빌은 어색하게 저를 보는 유키에게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림을 매만지며 놀고 있던 소녀가 입을 벌렸다.

“…저랑 그림이 서로를 우산으로 쓰겠다고 싸웠다고요?”

“그래. 아주 가관이었지.”

“그렇다면 그림이 먼저 그랬을 것 같은데….”

하아? 안겨 있던 짐승이 항의하기 시작한다. 유키가 쿡쿡 웃었다. 그래도 며칠 보았다고 제가 편해지기라도 한 건지, 전보단 한결 부드러워진 미소였다. 확실한 변화를 지켜본 빌이 잔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둥근 잔의 가장자리가 마찬가지로 둥근 입매를 가려 웃음을 지워낸 찰나였다.

“선배는 생각보다 좋은 분이시네요.”

“…생각보다?”

“어, 아니. 이전에는 나쁘게 생각했단 뜻은 아니고요.”

깜짝 놀라 서둘러 덧붙인 유키가 손을 휘젓자, 빌이 조용하게 웃어 보였다. 와. 여유로움이 가득한 미소에 유키가 숨을 삼켰다. 원체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생각하긴 했지만, 인상이 부드러워지니 그 품위가 한층 돋보였다. 왜 이런 사람이 제게 잘해 주는 걸까. 해결하지 못한 의문을 품은 유키가 커피를 마시는 척 고개를 숙였다. 왜인지 목 아래가 뜨끈해지기 시작했다.

“흐음.”

아닌 체하며 그 모든 모습을 살피고 있던 빌이 나직한 허밍을 흘렸다. 기억이 돌아오고 있는 걸까. 눈앞의 아이가 다시 자신을 의식하기 시작해 흡족스러웠다. 이제야 정상 궤도에 오른 것 같았다.

잠시만.

…정상 궤도?

“그림, 너도 먹을래?”

정상 궤도가 무엇인데?

자문에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유키 화이트가 사람 속도 모르고 웃으며 질문했다. 선배는 제가 기억을 빨리 찾길 원하는 거죠? 그 목소리를 들은 후에야 겨우 정신을 차린 빌이 평소보다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쿵, 쿵. 머리에서 심장이 뛰는 것 같았다.

“…급할 필요는 없지. 여유를 즐길 줄 아는 것이 품위니까.”

알 수 없는 조바심을 감추며 내놓은 연기에 유키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가요? …저는 빨리 찾았으면 좋겠는데요.”

“왜.”

“그래야 선배한테 은혜를 갚을 수 있을 것 같아서요…? 도와주신 만큼 도움이 되고 싶은 건 당연하니까요.”

아하하…. 민망함을 감추려는 것처럼 유키가 배시시 웃었다. 그 속에서 사고 이전의 유키 화이트가 비쳐 보인 빌이 숨소리를 죽였다. 당돌하면서도 어딘지 허술하고. 능력이 있는 것 같으면서도 사람을 거슬리게 해 언제나 빌 셴하이트의 시선 끝에 걸리던….

‘빌 선배!’

사람의 시선을 끄는 순백의 소녀가 그곳에 있었다.

…여전하구나.

순간적으로 찾아오는 깊은 안도감에 기분이 이상해진 빌이 눈을 깜빡였다. “어… 선배.” 유키 화이트가 당황한 듯 입을 열었다.

“어디 아프세요? 열이 있으신 것 같은데….”

붉어진 얼굴을 보고 하는 말이었다. 덕분에 제 얼굴에 열이 올랐단 사실을 인지한 빌이 헛웃음을 삼켰다. 그러니까 내가….

기다리고 있었다고?

저, 유키 화이트를?

왜? 단계적으로 추궁하던 빌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야.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그런 감정을 품을 리가 없잖니. 강하게 부정하면서도 빌은 확신하지 못했다. 그야 어느 순간부터 그는 유키 화이트 앞에만 서면 패배하고 있었으니까. 이토록 단호히 부정하면서도 어떤 승리도 예감할 수 없었다.

“선배?”

흔들리는 눈동자에 문제의 감독생이 비친다. 눈이 마주치자 유키 화이트가 웃었다. 그 이름처럼 순백하게, 겨울의 눈처럼. 찰나의 순간 도화지 위에 놓인 기분이 된 빌은 새로운 배역을 맡았을 때와 동일한 감각에 지배되며 눈꺼풀을 내렸다.

이런. 작은 탄식 속에서 능숙한 연기자는 깨닫고야 만다. 제게 새로운 역할이 부여될지도 모른다는 것을. 이 캐스팅을 받아들이고 배역을 해석하는 건 언제나 그의 몫이었는데, 과연 이번에도 그럴 수가 있을까.

유키 화이트 앞에서 그는 언제나 무엇도 확신할 수가 없었는데.

늘 강한 이끌림에 휘어잡히고 있었다. 내어준 적도 없는 무언가가 저당 잡힌 것처럼. 그래, 마치….

“…….”

고요한 세상이 표백된다. 약재 향이 지워진 세계에서 빌이 맡을 수 있는 건 설탕을 넣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달게 느껴지는 커피 향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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