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유키] Three, two, one, ac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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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09-03 21:17

ⓒ 백합물리학 님





Three, two, one, action!






세월은 흐르는 저 바다의 물결보다도 가볍고 미련이 없는 존재라, 그것이 나아가기만 해도 그 옆을 지나는 수없이 많은 존재가 시간에 쇠퇴하고 스러지고 만다. 한 세기가 다 무어냐, 고작 10년이라는 시간에도 천지가 쉽게 뒤집힌다. 영원할 것만 같던 철제 구조물에 녹이 슬고, 산보다도 거대하던 돌덩이가 흐르는 물방울에 깎여 조약돌이 된다. 인간의 기억은 죽음으로 사라지고, 기록조차 풍화되어 사라진다. 영광은 쇠퇴하고, 시대는 뒤로 저문다. 생명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강물이 흘러 언젠가 바다에 도달하는 것처럼, 모든 것들은 언젠가 순환하여 무로 돌아간다.

하지만 말이다. 그 모든 것이 죽어 없어지고, 닳아 사라진다 한들 존재가 걸어온 역사는 어딘가에 남는 법이다. 이제는 홍콩 영화계가 이전과 같은 명작을 줄줄이 토해내는 황금알 낳는 거위가 아닐지라도, 그것의 영광된 시절이 여전히 나라 곳곳에 남아 있는 것처럼. 스타의 거리와 옛 풍경, 그리고 영화 속 홍콩을 그리며 찾는 관광객은 이전의 세월을 증명하며 오늘날의 증인이 된다. 보라. 오늘도 수없이 많은 관광객이 화면 속 낭만을 기대하며 홍콩 땅을 밟고 있지 않은가.

습하고 더운 공기 속을 가르는 붉은 택시와 버스를 보며 화려한 시절을 되짚는 관광객을 홍콩에서 보게 되는 건, 이 땅이 반환되기 전부터 그리 신기하거나 드문 일이 아니었다. 낡아 흐릿해진 과거를 추억하는 이라면 모두가 한 번쯤 담배를 꼬나문 채 지폐를 태우는 초록빛 화면을 보았고, 그들은 마치 빛에 벌레가 이끌리듯 자연스레 이곳으로 이끌렸다. 하지만 오늘은 드물게 찾아오곤 하는 월척의 날인 듯 하다. 방금 페리 안으로 간신히 도망친 한 무리 중 그저 관광객이라 칭하기에는 과하게 유명한 남자가, 그리고 그의 몸집의 반도 채 되지 않는 귀여운 소녀가 섞여있으니 말이다. 벌레 아닌 나방이 하나가, 감히 ‘평범’하다 칭하기엔 어려움이 있을 얼굴이 눈에 들어온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야? 유키. 네가 원하는 대로 내 정체도 잘 숨기고 다니고 있는데.“

“전혀 숨기지 않으셨잖아요. 겨우 선글라스 하나 꼈다고 사람들이 빌 선배를 못 알아볼 리가 있나요?”


팬과 안티는 종이 한 장 차이라는 말 들어본 적 있나? 그들은 스타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는 점에서 닮았고, 그렇기에 순식간에 그 행동이 뒤집힐 수 있다는 사실에서 유래된 말이다. 그렇다면 파파라치는 어떠한가? 늘 스타의 옆에 붙어 살아가며, 그가 없으면 삶의 가치를 잃는다는 게 꽤 닮지 않았나? 또한 제 사랑 앞에서는 카메라 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는 점도.

이러한 연유로 둘은 직전까지 팬—인지 파파라치인지 차마 구분할 수 없는—무리에게 쫓기고 있었다. 분명 우버를 불러 움직일 때만 해도 모든 게 완벽하다고 생각했는데, 스타의 거리에 발을 딛는 순간 어떠한 화학작용을 일으킨 것마냥 누군가가 소리를 내질렀다. “빌 셴하이트다!”

수소와 산소가 만나면 물이 생겨나는 것처럼 스타와 스타의 거리가 만나면 팬이 생겨나기라도 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의 인기가 어디에서도 식을 줄 모르는 탓일까. 할리우드 아닌 아시아의 작은 섬나라에서까지 이런 일을 겪을 줄은 차마 알지 못했던 터라 어린 연인은 아슬아슬하게 페리에 올라타고서야 겨우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유키의 지적대로, 빌은 눈에 아주 잘 들어오는 선글라스와 민소매옷을 입은 채였다. 누가 보더라도 꼭 옛 홍콩 영화배우 같은 꼴이었으나, 빌도 할 말은 있다. 몰라서 그렇지, 이건 홍콩에서 아주 평범하다 못해 거리에 자연스레 녹아드는 복장이라는 항변 같은 것 말이다. 만일 그가 조금이라도 못나고 추한 데가 있었다면, 혹은 지금보다는 덜 유명했더라면 이 전략이 조금은 먹혀들 수도 있었겠다. 그러나 그가 누구인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남자, 독일이 낳은 최고의 모델이자 배우, 이븐 칼리지에 빼앗겼다가 돌아온 우리의 스타, 빌 셴하이트가 아니던가? 미치지 않고서야 전 세계에 널려있는 그의 팬들이 이런 허접한 분장에 속은 척을 해줄 리가 없다.

그러므로 그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아는 유키는 빌의 안일함에 토라질 수밖에 없었다. 미라에게 “가르쳐다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나지?” 같은 말을 하던 건 언제고, 이제 와 평범한 사람인 양 군단 말인가? 그와 사귀는 때부터 이런 날을 각오하지 않은 건 아니다. 아름다운 꽃에는 독이 있는 법이고, 그와 함께 걷기 위해서는 필시 그 독과 함께 살아가야 할 테니까. 하지만 그가 이토록 자신의 인기를 모르는 것처럼 굴 때면 속상함이 울컥 솟았다. 유키 그녀 또한 그의 연인인 동시에 팬인 탓이다.

유키가 그런 생각으로 입술을 문 채 낡은 나무 의자에 늘어져 있자, 빌도 점차 말이 없어졌다. 여행까지 와서 이런 싸움이라니. 본래 연인이란 싸움이 잦을수록 그 애정이 깊어지는 관계라지만, 홍콩은 그러기엔 너무나도 더운 곳이다. 심지어 여기는 에어컨조차 나오지 않는 바다 한가운데인데! 평소 자신에게 크게 화를 내는 법이 없던 유키가 이렇게 구는 이유가 있었군. 뒤늦게 짜증의 이유를 파악한 빌은 이대로는 아주 큰 싸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한 직감을 느끼며 그녀의 옆에 앉아 익숙한 손길과 눈빛을 몸에 붙인 채 머리칼을 슬슬 문질렀다. 그러자 유키의 빳빳하던 입술이 조금 풀어졌고, 그 모습에 빌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뚝 끊어지고 말았다. 달리는 사이에 그녀의 뒤꿈치가 까져 새빨간 피가 흘러내리고 있던 탓이다. 그는 놀라 당장 그 상처를 살피려다, 직후 따라올 일련의 잔소리와 다툼을 떠올리며 겨우 충동을 억눌렀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이나 하지. 그녀나 자신이나 이런 일에는 아주 서툴기 짝이 없었다.

“미안해. 유키. 난 여기라면 우리가 간만에 오붓하게 데이트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아무래도 내가 내 인기를 얕봤나 봐.”

남이 했더라면 분명 재수가 없다 느껴졌을 말일 텐데, 저 얼굴로 말하니 설득력이 있었다. 게다가 저 표정. 분명 자신의 다친 곳을 본 것일 테다. 민망함에 괜히 발을 꾸물거리며 숨기려 들자, 빌이 그녀의 얼굴을 잡아다 돌렸다. 강압적이지는 않았으나, 내가 말하고 있을 때 다른 일에 신경을 쓰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는 태도다. 아주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와도 빌 셴하이트는 빌 셴하이트였다. 여러 가지 의미로.

“아니에요. 저도 죄송해요. 괜히 짜증이나 부리고…”

“아니, 내 판단 미스야. 이번에도 바보같이 네 말을 안 믿고 나를 과소평가한 결과거든.”


사람들은 언제나 빌런보다는 주인공을 기억하는 법이니, 적어도 이 먼 타국에서 자신에게 열광하는 팬들을 만나리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는 게 그의 변명이었다. 그런 그의 반복되는 자기 고백을 들을 적이면, 유키는 그가 안쓰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얄미웠다. 내가 하는 말을 도대체 뭐로 듣는 거람! 그렇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렇게 말해주었다면 뭐라도 달라졌을까? 그런 생각을 해보아도 바뀌는 건 없다. 지나간 시절은 돌아오지 않고, 물은 한 방향으로만 흐르는 법이므로. 그러니 대신 이렇게 말하기로 한다.

“선배, 있잖아요. 홍콩영화에 나오는 주인공들은 다 악당인 거 아세요?”

“뭐라고?”


뜬금없는 말에 빌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그 모습에 이제는 유키가 하하 웃어버린다. 이상하죠? 하지만 진짜예요. 빌 선배. 화양연화의 주인공들은 불륜을 저질렀고, 영웅본색의 주인공은 폭력 조직의 깡패죠. 그 유명하다는 중경삼림은 또 어때요? 한 여자는 마약을 팔고, 다른 한 여자는 주거침입을 저질러요. 그야말로 빌런에게 천국 같은 영화계인 거죠.

그 뜻 모를 소리에 빌의 표정이 더더욱 구겨지지만, 유키는 멈출 생각 없이 그저 미소 짓기나 한다. 이것으로 그의 시선을 돌렸으니 이미 반쯤 성공하긴 했지만, 그보다 중요하게 전할 말이 있었기에.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유명하고,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이의 뺨을 문지른다. 당신은 부정하지만, 이 다정한 손길은 당신에게 배운 것이다.

“그러니까, 선배가 여기서 너무너무 유명한 건 이상한 게 아니에요. 오히려 우리가 선배의 주무대에 제 발로 찾아온 거나 다름없죠.“

그래서 자신은 출발하기 전부터 각오를 했고, 어쩌면 당신이 연애를 공표하는 순간부터 각오가 되어있었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말을 전달하는 과정은 무척이나 순조로웠다. 마치 배가 바다를 가르기 시작하며 불어오는 미풍처럼. 선선하고 부드럽게 그들을 스치고 지나간다.

“저는 이 모든 게 싫지 않아요. 오히려 선배가 환영받는 곳에 와서 들떴는걸요. 그 인기를 본인이 자각을 못 하는 것 같아서 조금 아쉽지만…”

“무슨 소리야. 내가 최고라는 건 이미 잘 알고 있는걸.“

“흠, 정말요?”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저기 뒤에 있는 파파라치한테 손이라도 흔들어주지 그래요? 놀란 그가 돌아본 순간, 셔터가 팡 터진다. 그야말로 주인공에게 어울리는 인기였다. 찍습니다! 하나, 둘, 셋, 액션!





너무너무 아름다운 글이에요……

나는 진짜로 이런 글을 읽기 위해 살아온 걸지도 몰라

오늘 그 많았던 일들이 치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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