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래빈소희] ✨ 우주 최후의 고래 ✨
아주 작은 선의가 구하는 당신의 세계
2024-06-05

📻 : 고래의 노랫소리는 사람의 가청 주파수를 벗어난다는 말, 들어 보셨나요?
고래는 바닷속에서 그들만의 언어와 노래로써 소통하지만 그 소리는 우리의 귀에 닿진 못합니다.
인류가 우주를 정복했을진 몰라도, 바닷속 노래의 아름다움만은 영영 미지 속에 남겨둘 거라는 이야기이죠.
지금부터 들려드릴 곡은 그러한 바닷속 노래의 아름다움을 그린 드뷔시의 곡입니다……
당신은 오래된 라디오의 다이얼을 돌립니다.
나긋하게 이어지던 DJ의 목소리가 잦아들고 고요가 찾아듭니다.
당신은 테이블 앞에 앉아 턱을 괸 채,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침을 먹던 중이었던 것 같은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뭐,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을 보니 중요하진 않은 모양입니다.
혹은, 너무 오랫도록 한 생각이라 그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마저 잊어버렸을 수도 있겠죠.
눅눅해진 시리얼을 대충 한 입 떠먹으며, 당신은 테이블 위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봅니다.
김래빈:(대충 떠넣은 시리얼의 맛을 느끼지도 못한 채 잊어버린 생각을 떠올려보려 톡톡,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며 머릿속을 정리하다 문득 사진첩이 눈에 들어온다.) …….
사진첩의 첫 장부터 그 애가 보입니다.
요즘 시대에 이런 식으로 사진을 보관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죠.
아날로그를 선호하는 당신과는 달리 그 애는 얼리어답터였지만, 이러한 필름 카메라 감성은 퍽 좋아했더랍니다.
필름을 하나하나 현상한 사진들이 붙어있는 사진첩.
몇 장 넘기면 함께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따위도 눈에 띕니다.
그 애. 우주를 보고 오겠다며 사라졌던가요.
당신은, 그 애가 떠난 이후 어떻게 지냈었나요?
기억을 되짚어 봅시다.
김래빈:…… 후우. (사진첩을 넘기자마자 보이는 소희의 모습에 저절로 깊은 곳부터 후회 섞인 한숨이 올라온다. 우주를 보고 오겠다며 미소를 짓던 그 모습이 이젠 기억에서도 흐려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난 것만 같다. 어떻게? 라는 질문 대신 늘 그랬던 것처럼 한 치의 흔들림 없는 믿음으로 소희에게 잘 다녀오라 했던 제 탓일까. 사실 소희를 믿고 있긴 하지만 불안한 마음도 있다며 가지 말라 혹은 같이 가자고, 붙잡았어야 했던 걸까. 소희가 떠난 후의 생활은 별다를 것 없이 매일매일 평범하게 흘러갔다. 언제나처럼 작업을 하고 그룹 활동을 하고 콘텐츠를 찍고…… 다만 달라진 것은 가슴 한구석이 텅 빈 허전함이었다. 소희를 다시 만난 후 이렇게나 오래 떨어져 있던 적이 있던가. 보고 싶고 듣고 싶고 닿고 싶을 때, 그 어느 때도 제 곁에 소희가 없다는 것을 깨달을 때마다 세상에 혼자 남은 기분이 들었다. 일상에 스며든 그리움과 외로움이 이젠 너무나 당연하게 되어 잠시나마 잊었다는 것이 스스로 우스울 정도였다.)
많이 외롭고, 그리웠지요.
그 애가 우주 여행을 떠난지 몇 달 지나지 않았음에도 그 웃는 얼굴을 잊어버릴 정도로요.
유일한 이해자를 잃었지만, 그럼에도 당신은 잘 지냈습니다.
잘 지냈다고 해도 좋은 걸까, 의문이 울컥울컥 올라오겠지만 어쨌건 당신은 그 시간들을 문제없이 보냈으니까요.
그 박문대 씨가 아무 말 없을 정도니 말 다했지요.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립니다.
핸드폰 액정을 켜니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가 몇 통 와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새롬내과병원: 지난 금요일 예약이었는데 방문하지 않으셨더라고요. 전화 주시면 새로운 내방 일정을 잡아 드리겠습니다.
A&R 팀: 래빈 씨, 새 타이틀 곡 트랙 방향은 잡았어?
박문대: 작업 끝나면 연락해라.
그러고 보니, 휴대폰에 적힌 오늘의 날짜가 많이 바뀌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지난 금요일에 작업을 시작한 이후 집중하느라 시간 감각을 잃은 모양이에요.
오늘은 그로부터 3일이 지난 월요일입니다.
그 애도 작업에 집중하면 시간 감각이 없어지는 일이 많았죠.
당신은 늘 그런 그 애를 끌어내는 역할이었는데, 어느 순간 그 애처럼 되어 있었습니다.
예술가들의 숙명이라고 해야 할까요. 정말로 그럴지도요.
쌓인 연락들에 대강 답장을 하고 난 이후, 당신은 시리얼 그릇을 정리합니다.
설거지 하는 동안 열어둔 창문 밖에서 선선한 바람이 들어옵니다.
작게 소란스러운 소리도 나는 것 같네요.
뭐, 아주 없는 일은 아닙니다.
작업실 근처 근린공원에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들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요.
그런데, 이건 사람의 목소리라기보다는...
김래빈, 듣기 판정.
김래빈:
듣기
기준치:80/40/16
굴림:69
판정결과:보통 성공
동물의 소리 같습니다.
정확히는 말이나 소가 발굽을 구르는 소리와 울음소리 같네요.
이 근처에서 영화 촬영이라도 하는 걸까요?
그것이 아니라면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소리가 들릴 리가 없잖아요.
당신은 귀를 의심합니다.
창문으로는 보이지 않는 걸 보니, 공원 한참 안쪽인가 봐요.
갑작스러운 궁금증이 인 당신.
홀린 듯이 공원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합니다.
김래빈:(창문을 통해 아무리 살펴도 보이지 않는 소리의 진원이 이상하게도 저를 홀려 이끄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급히 외투를 걸쳤다. 모자만 하나 푹 눌러쓴 채 빠른 걸음으로 공원을 향해 발을 옮긴다.)
의문의 노인:어허, 이 녀석아! 진정하래도.
공원에는 청회색 털의 말을 탄 노인뿐입니다.
이 시간에 공원에 아무 사람도 없을 리가 없는데, 희한한 일이군요.
공터를 마구 뛰어다니며 투레질을 하는 모습이 제법 성질 사나운 말 같네요.
김래빈:(흔하지 않은 말의 생김새에 눈이 팔려 잠시간 감상하듯 그 모습을 바라보다 이윽고 공원에 노인과 말, 그리고 본인 외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당황한다. 더하여 2020년대의 데한민국의 공원에서 말을 탄 노인? 아무리 봐도 흔한 일은 아니었다. 짧은 시간 긴 고민 끝에 노인에게 조심스레, 하지만 큰 목소리로 묻는다.) 괜찮으십니까?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의문의 노인:아, 이 녀석은 괜찮다네. 이 녀석아! 괜찮다니까? (말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는다. 잠시 기다리자 말은 진정해 가만히 선다. 노인은 말에서 내리더니 말에게 의문의 손짓을 해 보인다. 손짓을 본 말은 몸집을 줄이기 시작하더니, 반짝이는 은빛 별무리를 흩뿌리며 여러 마리의 해마로 나뉘어 노인의 허리춤에 있는 웬 주머니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노인은 피로한 얼굴로 당신을 바라본다.) 아. 그러고 보니 젊은이가 도와줄 일이 있는데 말이야........
김래빈:헉. (눈 앞에 펼쳐진 기이하고도 신비한, 심지어 아름답기까지 한 광경에 동공이 확장되고 입이 떡 벌어져 뻐끔거리며 뒷말을 잇지 못한다. 분명 말이었는데 말이 어떻게……?! 제가 너무 피곤한 나머지 헛것을 봤음에 틀림없다는 생각까지 닿자 팔을 들어 손등으로 눈을 세차게 비벼댄다. 꾹 감은 두 눈을 다시 뜨고 앞을 보자…… 아직도 노인이 있었다.) 어, 어떻게 된 겁니, 아니. 사, 사람이십니까?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도와드릴 수는 있지만, 제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거라 미리 약속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의문의 노인:(당황하여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는 당신을 빤히 보다가 너털웃음을 짓는다.) 아,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가 가는 일은 아닐세. 죽기 전의 생명을 구하는 일이니까. 흠...... 자네는 우주 고래를 아는가? 시공을 헤엄치는 짐승인데, 멸종 위기에 처한 가엾은 녀석이지. 나는 그 녀석을 구하려 하는 거라네. (지친 미소로 당신을 봅니다.)
김래빈:우주 고래요? 처음 들어봅니다. 시공을 헤엄치는 짐승이군요. (평소라면 잘 쓰인 SF 소설이나 영화로 치부했을 이야기가 현실성 없는 장면을 보여준 노인의 입에서 나오자 그 무엇보다도 신뢰가 갔다. 아직도 제가 피곤함에 절어 헛것을 보는 건지, 이 모든 것이 꿈인지 알 수 없었지만, 기이한 동물의 울음소리가 저를 이곳까지 부른 이유가 있겠거니 싶어 흔쾌히 고개를 끄덕인다.)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돕겠습니다. 뭐부터 하면 됩니까?
의문의 노인:그래! 잘 생각했네. (당신의 손을 붙들고 한번 흔들더니, 그는 부리나케 공원을 움직이며 사각형 모양의 영역을 표시하기 시작한다. 분필로 사각형 모양을 그리며, 노인은 당신에게 질문한다.) 혹시 집에 전화기, 노끈, 천 같은 게 있나? 종류는 뭐든 좋아. 대신, 좀 커야 하네. 이 사각형을 다 덮을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해!
김래빈:전화기, 노끈, 천. 네! 휴대전화도 괜찮다면 다 있는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금방 가지고 나오겠습니다. (정체 모를 노인이지만, 이왕 돕기로 했으니, 최선을 다하고자 마음먹으며 노인이 말한 세 가지 물품을 가지러 집으로 달려갔다. 이사를 할 때 남아 창고에 챙겨뒀던 분홍색 노끈을 먼저 품에 안고 커다란 천을 찾으려 이래저래 찾아본다. 야외 촬영 때 가져가도 좋다고 허락받은 큰 담요가 마침 눈에 들어와 마저 팔에 얹는다. 그리고 전화기. 아차, 하며 박문대에게 잠시 멸종 위기 동물 보호 활동을 하고 오겠다고 메시지를 남긴 후 주머니에 꽂아 넣는다. 우주에서는 전화가 터지기 힘들겠지만,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여 제가 주로 쓰는 사적인 폰이 아닌 스케줄 상의 공적 연락만 따로 주고 받던 휴대전화를 챙겨 세 가지 준비물을 다시금 확인한 후 집을 나서 공원으로 향한다. 가까운 거리지만 달려온 탓에 불규칙하게 숨을 몰아쉬며 준비물을 모두 노인에게 건넨다.) 여기 있습니다……! 잘못된 준비물이거나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말씀해주십시오.
의문의 노인:자네 정말 빠르구만? (당신이 가져온 물품들을 가지고 일하기 시작한다. 손뼉을 칠 때마다 풀밭에서 석영 기둥이 솟아올라 신비로운 빛을 반사한다. 당신이 가져온 담요의 네 귀퉁이를 노끈에 묶기 시작하더니 나무에다가 매다 펼치자, 담요가 반투명하게 변하며 은은한 무지개빛으로 빛났다. 정체 모를 노인이지만, 일단 평범한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분명하다. 당신은 비현실적인 기분으로 파르스름한 하늘 아래 노인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본다. 노인은 금방 준비를 끝내고는 당신에게 다가간다.) 자, 꼭 필요한 준비들은 끝냈네. 이 고래는 이제부터 자네를 등대삼아 항해할 거야. 그러니, 자네는 모든 시공간이 자네를 주목할 만큼 빛나는 기억을 떠올려야 하네. 사람은 누구라도 좋아. 지금 당장 가장 그리운 사람. 가장 보고 싶은 사람을 떠올려 봐.
김래빈:그리운 사람…… 소희. (노인의 말에 저도 모르게 소희의 이름을 입 밖으로 내뱉으며 주먹을 꽈악 쥔다. 누구는 고작 몇 달이라지만 제게는 몇 년, 아니 몇십 년과 같은 세월이 흐른 것만 같은 그녀의 부재가 그 어떤 것보다 컸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 애의 이름을 부른 순간, 당신의 전화기가 울립니다.
실종된 사람에게서 연락이 오다니.
그것도 지난 몇 달 동안 연락 한 번 없다가, 이제서야?
그러나 당신의 휴대폰에 떠 있는 이름은, 그리운 그 이름 그대로입니다.
당신은 걸려오는 전화를 가만히 바라봅니다.
그리고... 결심한 듯, 전화를 받습니다.
차소희:여보세요- 어, 받았네. 다행이다. 가기 전에 전화 한번 하고 가려고 했거든. 혹시 지금 전화 돼? (속사포로 말을 내뱉는다.)
김래빈:(얼마만인지 모를 연인의 목소리에 그만 울컥하는 감정이 올라와 쉬이 입술을 떼지 못한다. 겨우 숨을 고르고 말을 골라 무언가 대답하려다, 가기 전이라는 구절이 마음에 걸려 의문이 쌓인다.) 소희야, 지금 어디야?
차소희:으응? 아직 집. 짐 챙길 거 더 있나 생각하고 있었어. 그 사람은 아무 준비물도 필요없다고 했지만, 우주에 가는 건데 아무런 준비물도 필요 없을 리가 없잖아. 늦지 않게 집에 돌려보내준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세면도구 정도는 필요하지 않을까? 우주선에서 물이 안 나온다는 이야기는 들었는데, 치약 칫솔이랑 갈아입을 옷 정도는... (음- 하는 소리와 함께 잠시 생각하는 듯 말이 없다.)
김래빈:(그제야 생각이 나는 것 같았다. 이건 소희와 떠나기 전날 했던 마지막 통화라는 걸. 시간을 건너뛰어 평행세계의 너와 연락이 닿은 걸까? 그렇다면 지금 네게 가지 말라고 부탁한다면 현재의 시간선의 네가 다시 내 곁에 있어 줄까? 하지만 과거를 마음대로 바꿔도 되는 건지, 혼란스러운 감정이 머릿속을 뒤덮어 입술을 꾹 깨문다. 그래도 한 번쯤은…….) 소희야, 꼭 지금 가야 해? 조금만 기다려줄 순 없을까? 나도 같이 가고 싶어, 너랑. 너 혼자 보내기가, 아니 나 혼자 남는 건 두려워. 넌 나 없이도 괜찮아? 늦지 않는다는 말이 정확한 기한을 말하는 게 아니잖아. 소희야, 네가 없는 일상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모르겠다.
차소희:응? (듣더니 조금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물론, 나도 마음이야 같이 가고 싶지. 근데 너는 스케줄 때문에 바쁘고, 다음에는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몰라서....... 그것보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꿈이라도 꾼 거야? 왜 누나 없이는 아무것도 못하겠다는 아기가 되셨을까요, 김래빈 씨?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묻지만 걱정이 숨겨지지는 않는다.)
김래빈:…… 그렇지. 쉽게 오는 기회는 아니니까. 꿈…… 응, 꿈을 꿨어. 네가 돌아오지 않는 꿈. 불안했나 봐. 미안해. 가기 전에 잘 다녀오라고 웃으면서 보내지는 못할 망정. (한참을 망설이다 마음을 먹은 듯 덤덤한 목소리를 꾸며낸다.) 잘 다녀와, 소희야. 내 일에 충실하면서 잘 기다려볼게. 걱정하지 마. …… 사랑해. 어느 순간의 너라도. 다녀오면 자리를 비운만큼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내자.
차소희:에이... 꿈은 반대라잖아? 너무 늦지 않게 돌아올 거야. (전화 너머는 조용하다. 자신도 할 수 있는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가 겨우 말을 꺼낸다.) 옆에 있었으면 머리라도 쓸어줬을 텐데. 응. 나 못 자고 있을 때 네가 그랬던 것처럼... 금방 다녀올 테니까,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한참 뜸을 들이다 속삭이듯) 나도 사랑해. 다녀오면 네 휴가 맞춰서 시간 쭉 비울게. ......벌써 보고 싶어. 어떡하지?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어색하게 웃는다.)
김래빈:(전화기 너머의 어색한 웃음마저 사랑스럽기 그지없이 느껴져 저도 따라 입꼬리가 올라간다.) 나도. 갈증이 날 정도로 보고 싶어. 하아……. 도착하면 바로 전화 줘. 데리러 갈게. 다른 사람 눈치 보지 말고, 알았지?
차소희:당연하지. 넌 내가 다른 사람 눈치 보는 거 봤어? (말하며 씩 웃는다.) 응. 그럼 다녀올게.
다녀온다는 말과 함께 전화는 끊깁니다.
황망하게 고개를 떨구면, 빛나는 핸드폰이 눈에 들어옵니다.
핸드폰이 빛나는 만큼 공원 중앙에 매여있는 불투명한 막 역시 어쩐지 슬프고 아름다운 빛으로 일렁입니다.
그 빛무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핸드폰이 다시 진동하기 시작합니다.
전화를 걸어온 사람은, 역시 그 애입니다.
김래빈:(방금의 통화로 무언가 바뀌어 정말 현재의 소희가 전화를 준 게 아닐까 하는 기대감에 부풀어 심장이 쿵쾅거리며 뛴다.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레 통화 아이콘을 터치해 슬라이드 한다.. 긴장한 티가 역력히 드러나는 굳은 얼굴로 크게 목울대를 울려 마른침을 삼킨다.) 여보세요.
차소희:여보세요. 집에 도착했어? (부드러운 목소리로 질문합니다.) 오늘 엄청 추운데, 집에 빨리 들어가. 바로 요 앞이긴 하지만... 너 오늘 얇게 입고 왔잖아. (짧은 잔소리.)
김래빈:…… 응. 바로 집 앞이야. (네가 말한 시점이 현재가 아님은 분명했기에 어느 시간선의 너와 통화를 하는지 빠르게 머리를 굴려본다. 설마…….) 소희야, 고마워. 매일 더 커지는 사랑을 보여줄게. 날 받아준 걸 절대 후회하게 만들지 않을게. 정말로 좋아해. 어떤 미사여구로도 표현하지 못할 만큼.
차소희:어우. ...... 래빈이 너.... 너는 어떻게 그런 부끄러운 말을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응. 나도 좋아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고는 빠르게 말한다.) 너 빨리 들어가. 눈도 오고, 너네 형들한테... 오늘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얘기도 해야지. 참 나, 내가 오늘 너 보고 얼마나 놀란 줄은 알아? 눈은 다 맞아가면서 와서는....... 너 감기 걸리면 진짜 속상할 것 같단 말이야. (말해놓고서는 부끄러운지 작게 툴툴거린다.)
김래빈:기적이라고 생각했어. 마음이 같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거든. (네 입에서 나오는 좋아한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마음을 간지럽히며 설레게 하는 힘이 있어 부재의 현실을 잠깐이나마 잊고 미소 짓게 해준다.) 응, 오늘 바로 형들이랑 차유진한테도 다 얘기하려고. 옆에서 많이 걱정해 주셨으니까. 걱정마. 문대 형의 특제 수프를 먹으면 감기는 오다가도 달아날 거야.
차소희:......응. 그래도. (입속으로 말을 우물우물거리다 결국엔 뱉지는 못하고 한숨을 쉰다.) 도착하고 멤버분들...하고 얘기 다 마치면 전화해. 알겠지? 꼭. 전화해. (꼭, 이라는 말에 강세를 둔다. 어떻게 될지 불안한 모양이다.) 그리고. ... 아니야. 조금 있다가 이야기하자. 끊을게. (조금 시무룩해진 목소리. 전화가 끊긴다.)
슬슬 어둑어둑해져가는 하늘 아래 막이 환하게 빛납니다.
저 날의 그 애는, 정말 중요한 이야기를 하는 줄 알았더니 별 것도 아닌 것을 걱정했었죠.
좋아한다는 말과 함께 끊긴 그 날의 두번째 전화가 아직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지금도 여전히 부끄러워하기는 마찬가지지만, 그 때의 빨개진 얼굴은 눈 감으면 선명하게 보이듯 기억납니다.
전화가 다시 울립니다.
직감으로 알 수 있습니다.
이게 마지막 전화구나.
떨리는 손으로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으면, 어리고 차가운 목소리가 당신을 반깁니다.
차소희:...미안. 갑자기 전화해서. 혹시 내 기타 악보집, 네 연습실에 놔두고 갔던가? 찾아봐줄 수 있어? (고등학생 시절의 얇고 날카로운 목소리. 아무래도 시점은 학기말 발표회쯤일 것이다. 그 때 딱 한 번 같이 작곡한 곡을 선보이는 무대를 한 이후, 다시는 같은 조로 묶일 일이 없었으니까. 아무 감정 없는 목소리가 당신은 낯설면서도, 어쩐지......)
김래빈:아……. (아직 앳된 목소리를 듣자마자 언제의 너인지 단번에 깨달을 수 있었다. 반가움과 어색함이 공존해 단어를 고르고 골라, 감정을 최대한 지우고 조심스러운 태도로 대답한다.) 응. 찾아보고 연락해 줄게. …… ……저녁은 먹었어? (용건에 대답하는 것 외에 아무 말도 못 하던 고등학생의 김래빈과 지금의 김래빈은 다를 것이 없었다. 고백 후 사랑을 키워오며 저도 많이 변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그 시절의 너를 마주하니 무슨 말을 해야 할 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결국 마지막 전화를 조금이라도 더 끌어보고자 애쓰다 생뚱맞게 식사 여부를 물어본다.)
차소희:응? 저녁, 아직. ......너는? (어색한 목소리다. 당신은 나에게 굳이 말을 걸지 않았고, 나는 당신을 피했다. 그러므로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어색했다. 예의상의 질문인 것을 알면서도, 괜히 기분이 이상했다. 나한테 왜 질문하지. 귀찮다...... 그런 마음 뿐인데, 속이 텅 빈 말을 내뱉고 보니 기분이 이상했다. 바로 끊으려고 했는데 대화를 나눠야 하잖아. 짜증에 가까운 것 같기도. 혼란스러운 감정.)
김래빈:나도 아직. 그래…… (숨소리까지 죽여가며 네 목소리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짧은 대답에 어색함과 불편함이 그대로 전해져왔다. 그 시절부터 먼저 호감을 느낀 건 역시 저란 걸 알고 있으면서도 늘 걱정과 다정함이 묻어나던 네 목소리가 차갑게 들려오니 괜스레 싱숭생숭해진다. 나를 피하지 말아 달라고, 똑바로 봐달라고 말하고 싶지만 그러면 안 되겠지. 그때의 저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기다림이 미학인 일도 있으니.) 그럼 내일 보자. 아, 찾으면 바로 연락할게.
차소희:응. 내일... 봐. (이상한 기분. 이걸 단순히 짜증으로 치부하면 안 된다는 걸 어렴풋이 알 것 같은데, 더는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해야 하는 것은 너무 많고, 머리를 비울 수 있는 건 없고. 아무래도 오늘 밤은 기타를 끌어안고 내내 보내야 할 것 같다. 전화를 무신경하게 끊어버리려 했는데, 그게 잘 안 된다. 결국 작게 중얼거리고야 만다.) ...고마워.
짧았던 전화는 금방 끊어집니다.
당신은 싱숭생숭한 마음으로 끊긴 전화가 뜬 액정을 바라봅니다.
그 순간, 거대한 빛의 폭포가 하늘에서 쏟아져 내리는 것을 당신은 발견합니다.
빛 알갱이들은 작은 송사리 떼 같기도 하고, 무지개의 파편 같기도 합니다.
노인은 그 작은 입자들을 자루 안으로 쓸어담고는, 위를 올려다봅니다.
위에는, 문이 열려 있습니다.
그 문에서 소리가 들려옵니다.
생애 처음으로 듣는, 고래의 노래입니다.
언어로 형용할 수 없는 아름다움.
음악으로만 전할 수 없는 지극한 슬픔.
그 너머로 우주를 가로지르는, 혼자된 거대한 생生이 당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보입니다.
우주고래.
당신이 구해낸 단 하나의 경외스러운 생명.
의문의 노인:고래의 여행에 휩쓸린 아이가 있구나... 저 아이의 생 또한 자네의 선의가 불러온 것이겠지.
노인의 중얼거림이 아스라히 멀어집니다.
조개껍질 마차의 고삐를 쥔 노인이 고래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이 보입니다.
작아진 고래가 신을 향해 헤엄칩니다.
모든 것이 신기루처럼 옅어지고, 눈을 감았다 뜨면 아무것도 없습니다.
마치 신과 같던 노인도, 우주 고래도, 빛나는 석영 기둥도...
다만 남아있는 것은......
차소희:......김래빈?
마지막으로 본 그 모습 그대로인 차소희.
캐리어를 돌돌 끌며 그 애가 당신에게 다가옵니다.
김래빈:…… 소희? 차소희? 소희야! (들고 있던 폰을 놓친 걸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정신없이 달려가 소희를 강하게 끌어 안는다.) 너 정말 소희 맞아? 꿈 아니지?
차소희:응? 꺅! 깜짝이야. (당신에게 안긴 채 잠시 상황 파악을 한다. 차원을 헤매이다 갑자기 풍경이 바뀌어 보니 당신이 보여서, 오히려 이쪽이 더 꿈 같다. 질문하는 당신에게 픽 웃으며 답한다.) 꿈일 리가... (당신을 마저 안고 높은 곳에 있는 머리를 쓸어준다.)
김래빈:(머리카락에 닿는 보드라운 손길에 그제야 실감이 난다. 그토록 기다리던, 매 순간 바라던 네가 드디어 돌아왔음이. 양팔에 힘을 줘 너를 더욱 세게 끌어안으며 너무나도 하고 싶었던 말을 온갖 감정을 실어 내뱉는다.) 어서 와, 소희야. 보고 싶었어.
차소희:응. 나도 보고 싶었어. (드디어 돌아온 건가? 긴가민가하던 의문이 확신으로 변한다. 드디어 돌아왔구나. 네가 있는 곳으로. 괜히 울음이 터져 당신의 가슴에 얼굴을 묻는다.) 진짜, 진짜로 보고 싶었어. (발음이 다 뭉개진 채로 중얼거린다.)
김래빈:나도, 정말로. 진짜 보고 싶었어. 네 생각을 안 한 시간이 없어. 너를 한순간 떠올리는 게 아니라 너를 그리워하는 게 숨 쉬는 것처럼 당연한 일이 될 정도로. (커다란 손을 올려 제 품에 안겨 흐느끼는 네 머리를 살살 쓰다듬는다.) 왜 울어. 드디어 왔는데. 그만 울고 나 봐줘, 응? 잘 기다렸으니까 칭찬의 의미로 네 얼굴 더 많이 보여줘.
차소희:안 돼. 못생겼어.... (훌쩍거린다. 그러면서도 얼굴을 들어 당신을 본다. 바보같이 못난, 우는 얼굴이라도 괜찮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진짜 무서웠어, 나...... (중얼거립니다.)
김래빈:뭐가 못생겼어. 내 눈엔 예쁘기만 해. 웃는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그냥 어떤 모습이든 네가 지금 내 앞에 있어서 고맙고 좋아. (엄지로 조심스레 눈 아래를 훑어 눈물을 닦아주고는 앞머리 사이로 언뜻 보이는 동그란 이마에 입술 도장을 찍는다.) 이제 괜찮아. 앞으로 널 혼자 보낼 일은 추호도 없을 거니까. 늘 내가 옆에 있을게. 무슨 일이 있어도 지켜줄게. 그리고 오늘처럼 찾아낼게.
차소희:응...... (훌쩍거리던 것을 멈추고 당신의 눈을 가만 쳐다본다. 여기가 내가 있어야 할 곳이구나. 숨을 고르고 조금 진정한 채 말한다.) 믿어. 진심으로.
선한 자는 보답받는다는 말이 있지요.
권선징악과는 먼 세상이지만, 그럼에도 찰나의 선이 모든 악을 누를 수 있기를 바라며.
END. 다시 만난 세계

핸드아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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